마음을 산에 비유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산에 불이 크게 나면, 불이 꺼진다고 해서 산이 금방 복구되는 것은 아니다. 흐트러진 균형을 다시 잡고, 무너진 것들을 되돌리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산불 이후에 잔재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불이 나게 돼있다. 숨어 있던 작은 불씨가 작은 바람을 만나면 금세 큰 불길로 번지는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트라우마에 대한 방치는 타인이 불러온 작은 바람에 의한 큰 고통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그렇기에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영화 <월플라워>는 주인공 찰리가 그의 마음속에 정리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작은 불씨를 정리하는, 다소 아프고 힘겨운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1. 트라우마
주인공 찰리는 구타당하는 패트릭을 위해 나선 순간이나 자살 충동을 느낀 때 등의 극단적 순간마다 기억을 잃는다. 이러한 찰리의 부분적 기억상실은 어린 시절, 믿고 따르던 헬렌 이모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후 시작된 것이다. 어린 찰리에게 그 '사건'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었기에,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도피의 한 방법으로써 그 사건을 기억 속에서 모조리 지워낸다. 그리고 이때의 충격은 이따금 찾아오는 블랙아웃으로 남아 찰리를 괴롭힌다. 여전히 그 사건을 떠올리지 못한 채 헬렌 이모에 대한 좋은 기억들, 그리고 자신이 헬렌 이모를 죽게 했다는 자책 속에서 살아가던 찰리는, 어느 밤 허벅지를 쓰다듬는 샘의 손길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샘과 패트릭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그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기억들에 또 한 번의 블랙아웃을 마주한다. 병원에서 깨어난 찰리는 그제야 이모에 대한 기억을 바로잡고, 상처를 인정함으로써 마음속에 방치되어있던 불씨를 정리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렇게 찰리는, 성장한다. 상처를 외면한 채 살아가다 보면 그 상처는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덧나서, 결국에는 더 큰 아픔을 몰고 온다. 그래서 아프더라도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물론 잘 소독되고 치료된 상처조차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상처는 아픔을 머금은 채 흉터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속에 그 흉터가 자리할 공간을 작게나마 남겨두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를 살피다 문득 마주하게 되는 흉터는 상처 입은 순간을 상기시키거나, 어쩌면 또 하나의 아픔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흉터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는 것은, 흉터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곧 나 자신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밝음과 어둠 모두를 인정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를 여과 없이 바라보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사랑
앞서 말했듯 불씨를 정리하는 과정은 아픔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 찰리에게 그 과정이 마냥 고통스럽기만 하지는 않았던 것은, 그 시간을 지나는 동안 사랑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패트릭과 샘의 사랑,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또 온몸과 마음으로 느껴가면서 배운 사랑은 찰리의 시간들이 아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울 수 있도록 힘을 보탠다. 누나와 샘이 사랑으로부터 상처 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찰리는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왜 좋은 사람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택하냐'고 질문한다. 이 물음에 선생님은 '우리는 자신의 크기에 맞는 사랑을 선택한다'고 답한다. 영화 초반의 샘, 그리고 찰리의 누나는 자신들보다 '작은' 사람에 상처 받고, 애써 견뎌내며 힘겨워했고, 선생님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던 찰리조차 자신이 샘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생각에 휩싸여 마음을 숨기며 아파한다. 자신의 크기를 찾지 못한 채 타인을 사랑하고자 했기에, 그 사랑은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조차 자신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완성된다. 샘과 찰리의 사랑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그들이 스스로를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자신들이 그리 작지 않음을 깨달은 후에야 이루어진다. 그제야 크기에 맞는 사랑을 찾아낸 것이다.
어느덧 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트라우마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 그리고 치료를 통해 서서히 아물어간다. 타인이 자유를 느끼는 것을 동경하기만 하던 찰리는, 어느덧 온몸에 부딪히는 바람을 느끼며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삶의 출발점에 얽매여 있기를 멈추고 목적지에 초점을 맞추며, 마침내 남겨진 상처가 주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난다.
강함을 강요하고 트라우마를 덮어내라 말하는 세상에 신물이 날 무렵 만난 이 영화는 흉터를 안고 나아가는 법을 부드럽게 제시한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을 미화하지도, 단순화하지도 않는다. 그저 세상의 많은 찰리들에게 담담하게 '당신도 출발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며 손을 내밀뿐이다.
나 또한 마음속에 정리되지 못한 채 덧나고 있는 상처를 방치하며 살아왔다.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잔뜩 부어오른 그 상처를 인정하고 달래 보려고 한다. 흉터를 위한 작은 공간은 남겨두되, 그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길, 흉터가 '지금'을 방해할 수 없도록 순간에 집중할 수 있길. 남겨진 흉터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오길 바란다. 그 순간에야 우리는 비로소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