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실주의자다. 모든 게 불안정하기만 했던 10대를 지나 20대로 건너오며, 나는 현실이 얼마나 매서운지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적나라한 비포장도로 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를 몇 차례, 어느새부턴가 '더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압도했다. '낭만이 없을지언정 흔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대로를 달리고 싶다'고 생각한 나는 이윽고 내 앞의 모든 길에 콘크리트를 덮어 씌우기 시작했다. 내 현실을 지켜내려면 낭만보다는 안정성이 필요했다. 콘크리트 아래 덮여버린 들꽃을 생각한 겨를 따위는 없었다. 꽤 어린 시절부터 장래희망을 쓰는 칸에는 어린아이의 티 없는 꿈 대신 그를 힘주어 눌러썼던 흔적과 흩어진 지우개 가루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런 삭막한 삶의 방식을 고집해오던 나에게, 들꽃 몇 송이쯤, 낭만 몇 스푼쯤은 남겨 두는 게 어떻겠냐며 유쾌하고 따뜻하게 설득해오는 영화가 있다. 팀 버튼 감독의 2004년작 영화, <빅 피쉬>다.
에드워드 블룸의 아들, 윌 블룸은 늘 자신의 아버지가 못마땅하다. 윌에 눈에 비친 에드워드는 매일 허무맹랑한 허풍만을 늘어놓는 거짓말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제발 진실을 말하라'며 쌓여온 불만을 내뱉은 윌은 결국 에드워드와 크게 다투며, 이후 부자간의 대화는 단절된다. 그러던 어느 날, 윌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은 윌의 마음과 달리, 에드워드는 여전히 동화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 하지만 윌은 이내 아내와 어머니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배워나간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재미를 찾았으며, 그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꿈을 더했을 뿐'이었다. 에드워드의 판타지적 이야기들은 매서운 인생을 견디고, 그 기억들을 감싸 푹신하게 추억하기 위한 하나의 은유였다. 결국 윌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꿈과 판타지를 더한 달콤한 이야기로 에드워드의 긴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하나의 이야기이자 인생의 끝을 맞이한 에드워드는 윌의 이야기 속에서 영원하게 된다.
'팩트'가 너무도 중요해진 오늘, 세상은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다. 빠르고 가시적인 성취에 최적화된 지금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팩트'에 눈이 먼 채 인생을 씁쓸하게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직된 인생 속의 꿈과 낭만은 푹신한 쿠션이 되고,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하는 인생의 크고 작은 타격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기억은 환상을 만나 추억이 되고, 우리는 그 추억에 힘입어 살아간다. 좀 달콤해도 좋고, 좀 행복해도 좋다. 오랫동안 콘크리트 아래 덮어둔 나의 들꽃들을 떠올려 본다. 이제는 그 꽃들에게 숨 쉴 자리를 조금 내어주기로 한다. 물론 오랜 시간 나를 짓눌러 온 두려움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나 자신에게 꽃의 아름다움과 반짝이는 낭만을 선물할 용기가 생겼다. 꿈에 젖어 보내는 밤이면 아른거리던, 그럼에도 애써 외면해왔던 들꽃들에 숨을 불어넣고 조금의 낭만과 더불어 살아가려 한다. 그 아득한 향기와 함께라면, 그리고 가끔은 그에 취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삭막하게만 느껴지던 인생도 생각보다 달콤할 테니까.
사랑으로 이루어진 낭만은 인생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낭만이 더해진 인생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오래도록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