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인파를 바라보며 든 단상
삶이 무료한 사람이라면 평일 아침 8시 40분에 서울 여의도역 3번 출구에 가보기를 바란다. 한국의 대표적 금융지구인 여의도는 셀 수 없이 많은 직장인이 출근하는 곳이다. 여의도역은 특이하게 지하를 통해 국제금융센터 및 더현대 서울 백화점과 연결돼 있다. 이 지하 보행로를 통하면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러 건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여의도역 3번 출구는 이 지하통로의 초입에 있다. 그래서 그쪽에 서 있으면 지하철에서 쏟아져 내려 바쁘게 지하통로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볼 수 있다.
출근 시간에는 역 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 대부분 역에서부터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10초에 거의 수백 명의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브리 만화영화나 이누야샤에서 작은 요괴들이 큰 괴물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것 같다. 인간이 인간 같지 않다. 인간도 하나의 사물로서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가며 움직이는 것 같다. 난 아직도 서울 직장인들이 매일 아침 수백 명의 인파와 부대끼며 작은 요괴 신세가 되는 삶을 지금까지 견뎌왔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익숙함과 훈련을 통해서라면 고통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 지하통로에는 특징이 하나 있다. 무빙워크가 설치돼 있다는 거다. 평지에 펼쳐진 에스컬레이터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동으로 우측통행을 할 수밖에 없다. 더 빨리 가려면 무빙워크를 타는 게 효율적이니.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생긴다. 사람들은 무빙워크가 시작되는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어차피 조금만 더 걸으면 우측으로 빠져야 하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다들 우측으로 모여서 걷는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보더콜리의 지도 아래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양 같다. 보더콜리가 없이도 알아서 질서를 지킨다는 게 다르지만.
현대철학에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이라는 게 있다.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가 대표적인 사상가인데, 세상이 각종 행위자 간의 연결에 의해 이뤄져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행위자란 말 그대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대상을 뜻한다. 흥미로운 점은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서는 사람만 행위자로 보는 게 아니라는 거다.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물이 다 행위자다.
예를 들어서, 무빙워크는 여의도 직장인들에게 엄청난 행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보더콜리보다도 더 착실하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우측통행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여의도역 지하통로에서 인간보다 무빙워크가 훨씬 더 행위력이 있다. 인간은 무빙워크를 비롯한 통로의 구조에 의해 이끌리며 이동할 뿐이다.
평소에 우리는 당연히 인간이 행위자이고 인간이 이용하는 여러 도구는 수동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핸드폰을 이용하는 거지, 핸드폰이 나를 이용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과 사물 사이의 이런 구별은 생각보다 이 세상의 여러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조금만 인간주의적 관점을 내려놓고 생각해 보면, 내가 핸드폰에 행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동시에 핸드폰 역시 나에게 행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때로는, 아니 현대인들에게는 거의 대부분 시간에 인간과 도구 사이의 힘의 관계가 뒤집어진다. 사람이 사물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사물이 사람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게 현실을 더 잘 설명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인간이 정어리 떼처럼 신속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여야 하는 지하철역에서는 인간보다 더 강력한 다양한 행위자가 질서를 수호하고 있다. 표지판과 전광판은 사람들이 서로 길을 묻지 않고도 알아서 갈곳을 잘 찾아가도록 한다. 자동 개찰구는 무임승차를 막는다. 스크린도어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차단한다. 그런데 스크린도어가 ‘행위’하는 이유는 지하철이 지연 없이 운행되도록 하기 위함인가,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인가? 지하철역은 자신을 위해 행위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