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잘 만나서 미국에서도 살아보고 좋겠네”
남편의 일 문제로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먼 친척분이 나에게 하셨던 말이다. 기분 나쁘게 듣자면 끝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뭐 틀린 말도 아니다.
이렇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국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지난 3년 동안, 언제든 갑자기 미국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고 정착하기까지 이사를 다섯 번이나 해야 했지만,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과거 나의 바쁜 직장생활 때문에 반쯤은 포기했던 귀한 둘째도 얻었고,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늘 바랬던 미국에서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선물처럼 주어진 감사한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이곳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친절했고, 가끔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릴 만큼 온갖 한국 음식들로 가득한 마트와 식당이 지척에 있고, 이곳에서 병원에 가는 일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섭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며, 모든 게 느리다는 이곳도 택배를 한국처럼 빠르면 반나절만에 받을 수 있었다.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인데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는가.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자연스레 따르는 시행착오만 몇 번 겪어내면 어려울 것도,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그리움이다.
얼마 전 우리 부부가 아끼는 오래된 지인이 출장길에 우리 집을 방문했다. 몇 년 만에 만나지만 어제 만난 것 같은, 오래된 인연이 주는 편안함이 반갑고 좋았다. 일정이 빠듯해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만을 같이 보냈지만, 그 짧은 시간이 준 행복은 아주 커서 그 기억으로 몇 달은 외로운 타향살이를 꿋꿋이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또 언제 이런 따뜻함과 편안함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 가슴 한구석이 쓸쓸하기도 하다.
내가 가늠할 수도 없는 부담감을 안고 온 가족의 미국생활을 지켜내고 있는 남편이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괜찮다 괜찮다 하지만,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몇 년째 재택근무를 하며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같이 담배 한 대 태울 동료도 없이 일하는 것이 어찌 쉬울까. 그래서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오래된 지인이 돌아간 뒤 남편의 마음이 어떨지 안쓰러워서.
물론 미국에서도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평생 한국에서 살아온 삶이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속 깊은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다. 한국에서도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이 걸려 쌓은 관계이니, 미국에서도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의 간극만큼 느껴지는 마음의 거리가 가끔씩 타지 생활을 하는 나의 마음을 외롭게 만든다. 다가가고 싶은 조급한 마음을 드러낼수록 더 멀어지는 것 같은 어려운 게임이다.
또 이런 외로운 마음에 불을 지피는 건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의 애매한 나의 처지이다. 미국에서 현지인이 되려고 애쓰는 만큼 조금씩 멀어지는 오래된 한국의 인연들. 살아가는 세상이 달라졌으니 나눌 것이 점점 줄어들고 그렇게 관계도 조금씩 소원해지는 것이 당연지사겠지만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도 새로운 만남의 설렘과 오래된 인연의 편안함 사이 그 어딘가에서, 애매하게 외로운 마음을 나눌 이를 찾으며 또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