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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론 Feb 03. 2024

슬픔의 어려움

독후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 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P.28)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P.53)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나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어떤 ‘태도’를 줘야 한다는 것. 이것 자체로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결과도 장담하기 힘들다.
내 사랑은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나의 사랑은,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불행이 되고 마는, 무력한 사랑이다. (P.346)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그 대상이 '무엇'이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경우에는 더욱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곤 한다. 누군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 사람의 행동, 말, 표정, 상황 등 여러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설령 그 파악의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파악이 곧장 그 사람에 대한 이해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면밀한 파악의 과정은 상대와 나의 차이점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이해가 안 되는 사람'으로 쉽게 낙인을 찍어버리는 데에 사용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이해의 역설. 내겐 그 높은 벽을 뛰어넘을 용기와 꾸준함이 없다. 그렇기에 언제부턴가 상대방이 표출하는 쉽고 단편적인 감정에만 제대로 호응해 주자는 식으로 기준을 낮추게 되었다.


그러한 호응을 '공감'이라는 멋진 단어로 포장하고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감은 이해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개념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해로부터 도망쳐 나오던 중 '이거라도 걸치자'라는 식으로 집어 든 단편적인 호응을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이 왠지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 죄책감이 포장하려는 욕구보다 아주 조금 더 무거웠을 뿐이라는 사실을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조금 더 가벼웠을 뿐인데 낙오되어 버린 포장 욕구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앞서 말한 단편적인 호응을 '공감하는 척'이라고 쓰자고 합의를 봤다.


타인의 감정 중 그나마 가장 쉽게 공감하는 척을 할 수 있는 감정은 기쁨이다. 어쩌면 그 이유는 기쁨이라는 감정 자체의 특징 때문인 것 같다. 기쁨 자체가 대부분 긍정적인 감정이기에, 공감의 영향을 그렇게 크게 받지 않는다. 이미 한없는 기쁨에 빠져 있는 이에게 내가 진심 어린 공감의 문구를 던지든, 아니면 그냥 "와, 정말 잘 됐다!"라는 피상적인 문구를 던지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대체로 기쁜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오히려 그 기쁨의 순간에 '너의 어떠어떠한 부분이 이러쿵저러쿵해서 결국 이런저런 결과를 이루어내서 참 잘 됐구나!'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놓는 몇몇보다는, '대박', '우와' 같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 다수의 주변인을 갖는 것이 그의 기쁨을 배가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기쁨은 '깊이'보다는 '넓이'가 중요한 감정 같다. 그 이유는 어쩌면 대부분의 기쁨들, 그리고 그 기쁨을 표출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일정 부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려는 마음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기 때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반면 타인의 감정 중 가장 공감하는 척하기 어려운 감정은 슬픔이다. 기쁨을 누리는 이들 중 대부분이 스스로가 기쁜 이유를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반면(그 파악이 곧 그들이 기쁨을 표출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에 잠긴 이들 중 그들이 슬픔을 짊어지게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슬픔의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에 빠졌을 수도, 또 다른 몇몇은 이유를 알게 되면 더 깊은 슬픔의 구덩이로 내려앉을까 봐 그 이유를 찾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포기해버렸을 수도 있다. 어쩌면 슬픔의 원인을 찾는 과정 자체가 그들에겐 가장 힘들고 슬픈 일인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누군가의 슬픔에 다가가는 일은 더욱 조심스럽고, 어렵다(물론 동시에 조심스럽고, 어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픔이라는 깊은 감정의 골 어딘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나도 숨을 참고 그 언저리까지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일의 수고로움 때문인지 이기적인 본성은 '내가 꼭 그들의 슬픔에 호응해 줘야 하나?, 꼭 내가 그래야만 하나?'라는 질문 공세들을 끊임없이 퍼붓는다. '그냥 "힘내!"라는 말 한마디 던지고 말자. 그게 그 사람에게도, 내게도 최선이야.' 


하지만 그 영혼 없는 "힘내!" 한 마디를 건네고 마는 것이 내게도, 그 사람에게도 최선이 되어야 할까. '그래서 네가 어쩔 수 있는데? 뭘 할 수 있는데?' 맞는 말이다.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그렇지만 바로 그 사실이 나를 슬픔에 빠지게 한다.


그들의 슬픔의 깊이와 나의 그것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희망을 걸어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의 슬픔과 나의 그것이 결코 같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슬픈 사실이 어쩌면 내 얕은 슬픔을 얼마간 더 깊은 곳으로 끌어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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