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무진기행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번득이는 철편이 있고 눈뜰 수 없는 현기증이 있고 끈덕진 살의가 있고 그리고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와 사랑도 있는 것이다. (P.25)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P.146)
어떤 사람을 잘 안다는 것, 잘 아는 체한다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 불행한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고 적어도 평가하려고 드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에 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1-182)
고등학교 때였나. 국어 교과서에 김승옥 작가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일부가 지문으로 실렸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은 교과서 지문에서 재미있는 대화가 나오면 그 대화를 실생활에서 주고받는 유치한 놀이에 빠져 있었다.
<서울 1964년 겨울>에서는 그런 재미있는 대화가 여럿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여러 소설을 속 지문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대사들을 최대한 활용해 우리의 유치한 상황극의 재료로 우려냈다. 대뜸 '안'이 '나'에게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부분은, 동네 마트에서 산 왕꿈틀이를 사고 하나씩 손에 쥐면서 누군가가 상대의 성씨를 따라 "0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라고 각색했다.
마침 같은 동네에 그 유치한 상황극의 배우가 나를 포함해서 총 세 명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중 누군가가 갑작스레 "이제 어디로 갈까?"라고 말하면 자동적으로 남은 두 명이 눈치껏 차례대로 "어디로 갈까?"라고 내뱉기만 하면 되었다.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인 '사내'와 '안'과 '내'가 차례로 "이제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라며 동어를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부분을 재현하듯.
우리는 그 대사들을 내뱉으며 낄낄댔고, 상황극의 맥락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을 그런 우리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아주 드물게는 신기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당시 우리가 헤어질 때 내뱉던 멘트는 거의 고정되어 있었다. 소설 맨 마지막 부분 '안'과 '내'가 헤어지면서 내뱉었던 대사다. 대사량이 꽤나 긴 편이었지만, 우리는 "재미 많이 보세요."라는 왠지 찰떡같이 입에 붙는 대사 때문에 앞 대사들까지 외워서 주고받곤 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그 뭔가가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살입니다." (당시에는 우리의 실제 나이를 넣어서 말했던 것 같다.)
"하여튼..."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재미 많이 보세요."라는 말을 누군가 마지막으로 내뱉으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나름 고증을 살리려는 우리만의 노력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어떤 생각으로 그런 식의 유치한 상황극을 이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지나고 나서 돌이켜 봤을 때 "잘 가.", "안녕", "내일 봐" 같은 무난한 이별 인사 대신, "재미 많이 보세요."라는 다소 우스운 이별 인사말을 주고받을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쑥스러운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면 당시의 의도와 목적이 어쨌든 간에 그 상황극이 값진 추억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음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황극을 주고받던 일이 이제 더는 '추억'이라는 상자 밖에서 펼쳐지기 힘드리라는 당연한 사실에 괜히 씁쓸해지기도 한다. 각자의 상황 때문에 거주지가 달라지고, 생활패턴이 달라지면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무척이나 어려워진 오늘날의 상황은 더 이상 우리를 유치한 상황극 배우로 놔두지 않았다.
묘한 우연의 일치로, 무진기행을 다시 읽게 된 오늘날 내 나이가 딱 25살이 되는 해다. 이제 더 이상 소설 후반부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라는 대사를 별도의 수정 과정 없이 그대로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우면서도, 그런 대사를 주고받을 이가 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쓸쓸해진다.
어느덧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그 소설을 읽는 자체로 친구들과 유치한 상황극을 벌이는 그 당시로 나를 데려다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물론 당시와 현재의 상황이 완전히 동일하지도 않고, 그렇기에 당시에 대한 회상 행위가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의 마지막이 항상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채워지는 것은, 당시에 우리가 그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흘러간 시간과 서먹해진 관계를 핑계로 그 당시의 즐거운 상황극을 스스로 추억의 상자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못 박아 둔 것은 아닐까?
'그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적이 언제였지?'
둘이 속해 있는 마지막 단독방의 대화는 몇 년 전부터 죽어 있었고, 각각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연락도 몇 달 전에 보낸 간단한 안부 연락이 전부였다. 안부도 물을 겸, 당시의 추억도 나눌 겸<서울 2023년 여름>이라는 톡 방에 둘을 초대해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살입니다."라고 보냈다.
친구들이 당시의 상황극 대사를 행여나 잊지 않았을까, 갑작스레 뜬금없는 문구를 보내서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걱정하던 중, 얼마지않아 채팅창에 올라온 문구를 보며 그 걱정이 쓸데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