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월의 끝자락이다. 새로운 해의 새로운 달을 맞이하는 동안 몇 편의 짧은 글들을 썼지만 제대로 끝맺은 글이 한 편도 없다. 영화 시나리오, 단편 소설, 술에 관한 에세이, 유치한 여러 단상들. 작가의 서랍엔 꺼내보지 못할 글들만 쌓여가는데, 오늘은 또 어떤 글을 써내려 가고, 또 조용히 밀봉하게 될까.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중적인 마음. 이 글이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함과 함께, 닿지 않았으면 하는 얄팍한 애틋함. 현학적인 수사와 문장으로 글을(쓴 나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싶으면서도, 수수하고 담백해 보이고 싶은 비릿한 속내. 불안정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불완전한 글들이 한 무더기다.
1.
어제는, 혼자 산책을 했다. 크기가 다른 손을 꼬옥 맞잡고 익숙히 돌아다녔던 그 동네를 다시 거닐었다. 흰 눈이 녹아내려 꽃이 필 그 거리엔 이제 사람은 없고 사랑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거리를 자근자근, 꾸욱꾸욱 눌러 밟으며 추억을 압축한다. 천천히 걸어간다.
2.
꿈을 사고 파는 이야기. 한 편의 영화는 두 편으로 나뉜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부모의 머리맡에서 잠든 아이가 잠에서 깨는 장면. 노곤한 잠결에 어른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옛날엔 꿈을 사기도, 팔기도 했다는 꿈같은 이야기. 영화의 전반부는 컬러다. 아이는 후천적 색맹이다. 색깔이 있는 꿈을 꾼다. 꿈이어서 엉뚱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영화의 후반부. 후반부는 현실이다. 영화는 흑백이다.
3.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의 첫 문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기에 제 인생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된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아는 체 해 죄송합니다만 으레 그렇듯, 이야기란 것들은 모두 첫 문장, 그리고 첫 단어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선 관심도 없을뿐더러 그런 건 사실 하등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과연 놀라시는군요. 헌데 사연 없는 요람은 존재해도 사연 없는 무덤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하여 다만 저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문장을 찾고자 헤맬 뿐이었습니다. 거창한 유언 따위를 남기려는 건 아닙니다. 보잘것없으면서도 지난했던 것이 바로 제 인생입니다. 지리멸렬했던 일생을 일격에 압축시킬 만한 단 한 문장. 그런 문장 하나를 가슴에 품고 영영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문장이 아니라 알맞은 단어 하나로 남아도 좋겠습니다만, 배움이 짧은 탓에 그런 고상한 단어를 찾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 역시 그렇다고요? 제 말에 공감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자, 서있지만 말고 이쪽으로 좀 걸읍시다. 바람이 꽤 선선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위해 짧은 기도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역시 친절하십니다.
아멘. 딱 알맞은 기도였습니다. 다시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 역시 방금 그 기도만큼이나 제 인생의 맺음말로 써먹기 알맞은 문장을 결국 찾아내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기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치장할 만한, 꽤나 그럴듯한 맺음말 하나 씩을 가지길 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좀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다만 그 내밀한 욕망을 쉬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남들에게 있어 그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신다고요? 그것은 섣부른 우려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정말 그렇습니다. 위인이나 천재라 불렸던 이들의 말들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단물이 새어 나오지만, 저희 같은 치들이 뱉는 말들이란 마치 오래된 포도주처럼 시큼 텁텁하기만 해 영 도저히 삼키기가 어렵습니다. 발효는커녕 부패해버린 그 독주를 속 안에 품고서 제 스스로 취해버리기 마련이란 말입니다.
저기, 잠시만요, 길가에 은행들이 떨어져 있으니 조심하세요. 앞만 보고 걷다가는 나도 모르게 된통 당하기 일쑤입니다. 이미 밟으셨군요. 냄새가 고약합니다. 나뒹구는 은행만큼이나 맛과 향이 따로 노는 족속들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잘 차려진 식탁 위에선 그 어떤 음식보다도 고소한 풍미를 자랑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제몸에 독한 구린내를 품고 자라왔죠. 그러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당신처럼 친절한 패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악취에 물들기 마련입니다. 자, 계속해서 걸어갑시다. 거리를 예의 주시하세요.
아마 당신은 저 같은 불순분자들을 이미 많이 만나보셨겠지요. 불순분자란 말에 웃으시는군요. 괜찮습니다. 불순분자란 말이 거슬리신다면 다른 표현도 좋겠습니다. 부랑자라던지, 불량배라던지. 아무렴 상관없으시다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런 자조적인 표현을 빌려 당신을 시험해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종종 벌이는, 꽤나 유치한 악취미입니다. 다른 이들 앞에서 부러 제 자신을 놀림거리로 삼고선, 그 사람들 면면으로 스쳐 지나가는 표정들을 관찰하는 게 썩 흥미로운 놀음거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놀이를 즐겨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었지요! 개중에는 얼마 전 집 근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사내가 있었는데, 참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 사내는 제게 자신을 예술가라 소개했습니다.
4.
우리 양조장엔 원심분리기가 있다. 원심분리기는 참 재밌는 녀석이다. 요란스러우면서도 요긴하다. 몇 천 리터의 맥주 안에서 떠다니는 몇 천만 마리의 미생물들을 단숨에 제거해준다. 혼탁했던 맥주는 순식간에 맑은 빛깔을 띈다. 그렇다면 빨대로 라떼를 휘젓는 내 손목의 운동이, 원심분리기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면 이것들은 섞이기보단 되려 분리될까? 물론 슬프게도 내 손목뼈가 먼저 분리되겠지만. 왜 천천히(다분히 상대적인 표현이다) 회전하면 섞이고, 빨리 회전하면 분리될까? 아직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에겐 신기한 현상이다. 회전 속도? 속도에 따라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나다니. 이거, 어쩌면 우리 인생하고도 비슷하겠다.
빠르면 분리되고, 느리면 섞이고. 인생을 게으르게 살아가는 나로서는, 마음에 드는 대목이다. 시간이 점점 지나다 보니 예전과 달리 세상살이에 큰 미련이 없어졌다. '언제든 죽어도 되지만, 굳이 죽어야만 할 이유가 없다면 살고 싶다' 정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돈 많이 벌어 좋은 차 타고 좋은 집에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며, 좋아하는 사람 만나 좋아하는 이야기 나누는, 그런 안분지족한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누군가는 내게 나태한 거라고, 옹색한 변명이고 졸렬한 자위일 뿐이라고 말할(때를 대비해 변명거리를 찾는 중이기도 하다)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면 또 어떤가, 싶기도 하지만 역시 흔들릴 때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 나조차도 나를 잘 모르고, 하물며 인생이란 것도 잘 모르기에 무어라 단언할 순 없겠지만, 몸과 마음이 분리된 채 이성과 감성이 유리된 채로 살아가는 것보단, 조금은 느리고 혼탁할지라도,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삶에 썩 잘 스며들고 그렇게 섞여들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