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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일 Jan 01. 2021

일기는 후회를 싣고

 매직키드마수리 마법 목걸이 달고 다니던 초딩 시절, 방학 숙제로 내줬던 일기를 반강제로 적어낸 일을 제외한다면,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시기는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군대 전역하기 전까지 꾸준히, 하지만 굉장히 느슨히(매일 쓰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써왔다. 아무래도 들고 다니기 불편한 탓에 매일 일기를 쓰는 게 굉장히 힘들었는데(술이라도 마시는 날엔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에나 기억을 쥐어짜내 일기를 써내야 했다),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한 뒤로부터는 매일 매일 일상을 틈틈이, 그리고 촘촘히 기록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16년도 생일 날 과음을 하고선 휴대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2015년-2016년 5월의 행적이 몽땅 날아가버려…, 내 발자취는 2016년 5월 12일부터 다시 시작됐다. 이제는 백업을 수시로 한다.

작년에도 일기장을 들여다 보며 작년 한 해를 정량적으로 헤아려 봤다.

 사실 지난 일기를 들여다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거면 일기를 왜 쓰나? 하는 마음에, 크고 작은 이슈들을 수치화해서 정리해보는 일을 작년에 처음 하게 됐다. 일기를 하나 하나 꼼꼼히 들여다 본다는 게 굉장히 피곤하긴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고 지난 한 해를 다시 되돌아 본다는 점에서 꽤나 유의미하게 다가온 작업이었다.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일기장 연말결산을 했다.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2020년이었는데 꽤나 발발거리고, 꽤나 취해있었다. 해서 굉장히 죄송스럽고 대단히 조심스럽다. 작년에 다짐했던 목표를 이룬 것도 있고, 이루지 못한 것도 있어 부끄럽기도 하면서 뿌듯하기도 하다.

 항상 연말이 되면 새로 다가올 일들에 대한 설렘보다는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로 그득하다. 그래서 늘 묘한 긴장감을 가지며 째깍째깍 헐떡이는 초침을 바라보게 된다. 올해도 또한 기뻤던 일보다 슬펐던 일이 더 기억에 남고, 감사한 일보다 미안한 일이 더 많으며, 내가 잘한 것들보다 못한 것들이 더 아른거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쉽게 넘어가는 달력처럼 나 역시 구렁이 담 넘듯 이 모든 걸 쉽게 망각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마디가 없고 뜨고 지는 해에게 경계란 없어. 연말만 되면 설레발치는 이들에게 조소를 던지면서도, 내일은 내년이 되고 어제는 작년이 되버리게 하는 리셋 버튼에 가장 적극적으로 손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일지도 모른다.


 171편의 영화를 봤다. 36권의 책을 읽고, 네 번의 등산을 했다. 열 번의 독서모임과 네 번의 영화모임이 있었고, 두 번의 영화제에 다녀왔다. 한 번의 큰 거짓말과 한 번의 큰 우유부단함, 한 번의 큰 후회를 했다. 종로 일대에 63번, 한남동 일대에 45번 방문했다. 한 친구를 33번 만났다. 응급실에 한 번 다녀왔고, 한 번의 다래끼도 났다. 열네 번의 전시와 세 번의 박물관에 다녀왔다. 한 번의 경주, 제주, 수원, 충북, 부산, 해남을 방문했다. 159일 술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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