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같은 마음, 시 같은 사람, 시 같은 삶
어제는 북촌의 한 술집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얼어 눈이 되어 내렸다. 여러 토막의 이야기들이 오갔다. 김현식 님의 노래를 들으며 조덕배 님과 70, 8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누군가 말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시인 같다고. 시 같은 시절이라고. 다른 누군가도 말했다. 그 시절에 살고 싶다고. 나는 말했다. 뭐, 아무리 그래도 지금이 더 살기 좋지 않겠냐고.
유독 시를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시는 너무 어렵다며, 지나치게 함축적이라며 투정 부렸다. 친구는 내게,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어 보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내 어리광에 씩 웃어버리고 마는 친구의 그 모습이 참 시와 같았다.
시예요, 언니가
장률 감독의 영화 <춘몽>에는 이런 멋진 대사가 나온다. 시를 쓸 줄 안다는 '주영'이, 시는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예리'에게 언니가 곧 시라고 말한다. 시처럼 계속 곱씹어보게 되는 이 대사를 감히 헤아리지 못했다. 당시에도 무척 인상 깊었던 장면이긴 했지만 저 말을 채 소화시키지 못한 상태로 <춘몽>의 감상을 마무리지었다. 나도 저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어볼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말을 해볼 수 있을까, 정도의 의미로만 남아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저 문장을, 이제야 조금씩, 조심스럽게 벗겨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짐 자무쉬가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자신은 시를 제일 좋아한다고, 시만한 것이 없다고. 본인의 영화도 시와 같은 면모를 지니길 바란다고. 그러면서 자무쉬는 본인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로 '다른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없'다는 점을 꼽았다. 아, 정말 그렇구나. 쉽게 번역될 수 없는 것.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쉽게 해체할 수 없는 것, 지나치게 토속적이어서 쉽게 다른 언어로 대체될 수 없는 것. 아니 사실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고요하지만 고유한 것, 그게 바로 시였다.
언젠가,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와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앞에서 걸어오는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유모차엔 아기가 곤히 자고 있고, 아빠 엄마는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대며 웃고 계셨다. 아마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계셨던 것 같았다. 내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던 건 비단 그분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빠 엄마는 농인분들이셨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저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분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되려 슬픔을 느꼈다. 그분들의 인생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농인인 부모님을 둔 청인 소년에 대한 이야기로 단편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국내외의 농인을 소재로 하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장애를 겪고 있는 분들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차별적 시선과 언어폭력, 섣부른 재단과 대상화에 대한 문제를 의식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다.
그렇게, 염치도 없이, 그분들의 인생이 나에 의해 쉽게 번역되고 훼손당했다. 결국 시나리오 쓰는 일을 멈췄다. 순전히 자기반성과 죄책감의 발로라기 보단 애초에 그 이야기를 매듭지을 만한 능력도 깊이도 내겐 없었다. 고작 네 페이지 분량이었다.
"언니가 시예요"라는 영화 속 그 말이,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뭔가 내밀한 것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 보기와 달리 성숙해 보이는 사람에게 칭찬으로 어울릴 만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언젠가 현실에서 저 말을 실제로 하게 된다면, 상대에게 호감을 얻고 싶어 꾸며낸 말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주영'의 그 말에는 섬세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두 손 위에 얹힌 둥근 비눗방울이 혹 터져버리진 않을까 조심조심, 애타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당신을, 당신의 삶을,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당신의 그 시 같은 마음을 나의 언어로 쉽게 번역하지 않겠다는 배려. 쉽게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을 소중히 다루듯, 당신이 살아온 궤적을 쉽게 번역하고 쉽게 훼손하지 않겠다는 마음.
나는, 시를 볼 줄은 알아도 읽을 줄은 모른다. 시에 대해 말할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른다. 시를 좋아하던 그 친구는, 시를 읽어낼 줄도 알고 써내릴 줄도 알았다. 번지르르한 글을 앞세워 꾀죄죄한 현실을 외면해왔던 나와 달리 그 친구의 몸과 마음은 글이 아닌 현실에 닿아 있었다. 함부로 말하지 않고 쉽게 쓰지 않았다. 요란하지 않고 묵묵히, 현실을 충실히 살아갔다. 몸으로 먼저 다가갔고 마음으로 먼저 포용했다. 시처럼 살아가며 인생을 써내려 갔다.
참 시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