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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Sep 28. 2017

해보기 전에 겁먹지 마세요.

지는 노을을 바라보다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며 불안한 마음을 꼭꼭 눌러가며 시간을 보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일상을 스스로 바꾸려는 의지는 흘러가는 대로 살고자 하는 본성과 부딪히기 마련이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난 선택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잘 안된다고 느껴질 때는 우울감에 미끄러지곤 했던 날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여기 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정보를 접하니 포트폴리오를 더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아쉽기도 하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시간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조곤조곤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누구나 아는 미국, 영국의 명문 미대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면 처음부터 '명문 미대 포트폴리오 끝내기'식의 제목을 걸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 길이 아니었다. 누구나 아는 대학, 누구나 아는 회사에 당당히 들어가면 단지 그때뿐. 돌이키고 포기하기엔 너무 큰 부담을 안고 하루하루를 사는 것 이외에 내가 보람을 느낄 일은 적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100명의 독자에게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성공담보다는 한두 명에게 큰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다.


예술이 개인에게 주는 힘이 무엇일까. 그건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음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경쟁하지 않고 개인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그네를 탈 때 누군가 뒤에서 밀어주면 붕 떠오르듯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성취감이 원동력이 된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혼자 드로잉을 끄적이던 시절, 어렵게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림을 배우고 싶으면 자신에게 배우라는 말을 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스케치북을 가방 안에 넣었다.


그 후로 웬만하면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이 어렴풋하게 존재하고 나는 절대 그 기준에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입시미술을 할 자신도 없었고 그저 취미로 미술을 적당히 즐기기엔 돈이 많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캐나다로 떠나기 전 날 짐을 싸다가 그때 그렸던 그림을 발견했다. 선도 엉망이고 미숙하지만 '내 그림' 같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을 지우니 내 선이 분명했다.


미술을 한다고 해서 꼭 연필을 들고 명암을 연습할 필요도 없고 화방의 모든 재료를 알 만큼 지식이 충분할 필요도 없다. 결국 큰길을 돌아 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을 따라서 캐나다의 구석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모두 즐겁게 자신만의 예술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완벽한 그림을 그리는 목표를 갖기 전에 나에게 예술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미술 포트폴리오는 왜 비전공자에게 어려울까. 한국 교육은 미술의 본래 목적과 상관없이 시스템 내에서 훈련받은 학생들이 기술적인 면을 완벽하게 해내야만 창의성에 다가갈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설계되어 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 평가하고 평가받는 형식이 익숙한 사회에서 기술이 아닌 추상적인 창의력을 평가하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미술도 어떤 공식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마치 근의 공식도 모르면서 미적분을 풀려고 덤비는 학생에게 버럭 소리 지르는 선생님 같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정하지 못한 학생에게 갑자기 너를 표현하라니. 세세한 가이드라인도 없고 개수와 데드라인만 딸랑 던져 놓은 포트폴리오 요강은 불친절하다. 어떻게든 여기서 공식을 찾아내야만 하는데 도무지 보이지 않으니 어렵다. 하지만 원래 미술이 그렇고 예술이 그런 것 아닐까. 누군가가 정해준 공식을 따라가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결국 언젠가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할 때가 온다. 시작도 하기 전에 겁먹지 말자.



나는 요즘 NSCAD의 Extended studies에 올라온 수업을 골라 듣는다. (정규수업은 다른 공립컬리지에서 디자인 코스를 등록했다.) 왜 미대인 NSCAD에 진학하지 않았는지는 간단하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방학시간표를 스스로 짜는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대의 합격통지를 들고 몇 주간 고민하다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4년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하고 싶었던 게 모두 1학년인 파운데이션 코스에 있었다. 만지고 붙이고 해체하고 부딪히는 경험으로 가득 찬 1년이 너무 탐났다. 그리고 다행히 그 모든 수업이 학점과 상관없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Extended studies에 있었다.


내가 듣는 디자인 코스도 물론 포트폴리오를 내야 했다. 그리고 수업을 들으며 가장 좋은 건 손으로 하는 작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프로세스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과제를 하다 머리가 아프면 오일페인팅 수업을 가고 레터 프레싱 기술을 배우고 북바인딩 수업에서 책을 만드는 일상이 나에게 잘 맞다. 그리고 우연히 Extended studies 목록에 포트폴리오 준비를 위한 온라인 강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글링을 해보면 RISD같이 유명 미대의 교수들이 운영하는 포트폴리오 첨삭 서비스를 찾을 수 있다. 또, 혼자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어렵다면 가고 싶은 대학에 온라인 강의목록을 한 번쯤 살펴보는 걸 추천한다. 꼭 그 대학에서 제공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포트폴리오는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하더라도 비슷하게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대학의 수업을 듣더라도 방향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비용도 한국에 있는 미술학원에 가는 것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하다.


미술이 모두에게 즐거운 놀이였으면 좋겠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며 내가 좋아하는 놀이가 무엇인지 더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큰 결심을 하고 유학을 준비한다면 꼭 어떤 특정 대학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일상을 살고 싶은지 먼저 고민하고 그에 맞는 나만의 길을 만들어갔으면 한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다양한 삶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발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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