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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민 Aug 03. 2023

흑석9구역과 명수대

생성과소멸과정에서 발견하는 지역의 속성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흑석9구역이 역사적맥락에서는 어떠한 이야기가 있고, 어떻게 변해왔는지, 현재시점과 연결해서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려고 그동안 이리저리 많이 고민했었다. 아무리 오래 전, 과거의 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현재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변화과정에서의  ‘생성과 소멸’ 현상으로만 남게 된다.

흑석 9구역 재개발 현장 모습

모든 도시공간이 똑같이 해석될 수 없다는 것도, 항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형적인 특수성이 변화하고 사람이 살지 않던 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닌가 싶었다. 곧 건물 철거가 본격화 될 흑석 9구역에는 도시형한옥을 비롯하여 다세대, 다가구 주택, 80년대 유행했던 단독주택이자 양옥건물이 섞여 있었고, 그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한강에서 뻗어나오는 많은 지천으로 뒤덮혀 있던흑석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경성의 주택지>책에 실려있는 1930년대의 흑석동 모습

1920년의 흑석동은 키노시타 사카에라는 일본인에의해 ‘명수대’라는 주택지로 불려졌던 곳이다. 하지만 6·25전쟁 직후 서울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흑석동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고급주택과 판잣집이 혼재된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이 중 일부는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생겼기 때문에 현재시점에서판잣집과 고급주택의 중간지점이 되는 곳이 바로 흑석9구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덕으로 보이는 저 곳이 명수대로 불려지는 주택지 추정

또, 과거와는 다르게 당시 명수대로 여겨지던 주택지의분위기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혼재된 주거지로써의 풍경이 중앙대 병원 앞에서 갈라지는 길을 기준으로 구분되어 보이기도 한다. 걷다보면 저절로 '아 여기가 왜 과거에 명수대로 불려졌던 것인지. 대충 찍어서 이쯤이 메인 길이었겠구나.' 하고 추정되는 블럭이 있고, '여기는 뭐가 많이 섞였는데? 한강과는 거리가 좀 있어서 잘 안보이는데? 경치가 좋았을까?' 하는 블럭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은돌을 의미하는 '흑석'보다 '명수'라는 이름이 지속적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는 걸 보면 그 의미를 계속 가져가고 싶어하고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시기와 구역의 명확한 구분없이 흑석동 전체가 그냥 명수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명수대'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풍경들

명수대 주택지 개발은 1930년대 말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 정책의 일환 중 하나로 추정된다. 이 때 경성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경인선 인접구역인 구로, 오류, 괴안, 소사, 부평일대는 1939년 경인시가지 계획안에 따라 주택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 여파로 일본의 개발회사들이 노량진, 신길정(현 신길동), 번대방정(현 대방동), 영등포일대, 오류동, 소사동 일대를 주택개발지로 주목하고 있었다. 근데, 유일하게 흑석동은 ‘투자목적으로 투지를 구입’ 하도록 권유되었고, 대표적 사례가 바로 ‘명수대 주택지’인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의 개설로 강북에서 다리를 이용해 건너오면 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었기때문이다. 이건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어쩌면, 삶의 터로써 여기던 땅을 ‘투기’, ‘투자’라는 자산의 개념으로 여기게 된 건 1970년대의 강남개발이 아니라 1930년대의 한강이남의 주택지 개발로 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을련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명수대를 시작으로 '경성에서 인천으로 이어지는 경인선 인접구역인 구로, 오류, 괴안, 소사, 부평일대'의 주택 개발지 성격을 파악하다보면 좀 더 면밀하게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35년 9월 28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명수대주택지

“1930년대 말 한강 이남에서 벌어졌던 주택지 개발은 주택을 짓는 목적 이외에 전쟁의 불안한 상황 속에서 토지 투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도했다. 실제로 당시는 모든 물자가 제한되기 시작했던 때로 토지를 구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장 주택을 건축한다기 보다 토지구입을 통한 자산 보전 목적이 강했을것이다. 때문에 분양되는 토지에는 정지가 된 땅도 있었지만 정지가 되지 않은 땅도 있었다. 1930년대 말 이후 일제에 의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조선의 경성주변에서의 주택지 개발은 토지 투기와 연결되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전에 한강 이북에서 한양도성 주변의 미개발지를 대상으로 했던 단순한 주택지 개발과는 다른 것이었다.”

<경성의 주택지>, 한강너머의 이상향 흑석동 그리고 토지 투기의 확산 파트,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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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내용의 일부는 도서 <경성의 주택지>, 저자: 이경아. 를 참고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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