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업계가 원래 그래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컬처덱을 만들잖아요. 조직의 원칙을 글로 정리하고 있죠. 그러다보니, 수많은 분들이 자신의 의견과 인사이트를 공유해주시더라고요. 그 중 최근에 다시 대답하고 싶은 명제가 생각났어요.
일전에 누가 해준 조언입니다.
"뭐 컬처덱 만드는 거 좋고, 의미도 좋고, 뭔지 알겠는데 솔직히 업계 특성 무시 못한다?"
이 말을 들은 것이 3,4년 전 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게 어딨어! 사람이 모인 곳엔 원칙이 있어야 하고, 누구든 일을 잘하고 의미 있게 살고 싶어할거야!] 라는 생각이 있었죠. 지금와 생각해보면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을 겁니다.
재미있는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업계인지 말하면 괜히 논란이 될 것 같으니, 그냥 겪었던 현상만 적을게요.
그 업계는 굉장히 자신의 커리어가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회사 이름보다 브랜드 이름이 훨씬 중요해서, '내가 OOO 브랜드 했다!' 는 타이틀 한 줄만 가지면 바로 퇴사해서 다른 곳에 이직해서 연봉을 높이는 행태가 많았죠.
음...그 업계회사 대표님 피셜에 의하면 '높은 능력치의 인재는 아주 드물고, 대부분 중소 브랜드를 빠르게 이직하며 스킬을 쌓아온 사람들이 많다' 고 합니다.
뭐 사실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제가 관찰한 바로는 전반적으로 회사에 충성하지 않고,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우선 되는 분위기였죠. 당연히 원 팀이나 하나의 목표, 기여, 협업...등 이런 문화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은 상태였달까요.
그러나 그 대표님은 자칭 [스타트업 마인드]를 추구하셨어요. 그래서 굉장히 고객 중심적이고, 원팀, 주도적인 마인드와 서로 니 일 내 일 하지 않는 그런 문화를 만들고 싶어했죠. 그래서 세계 유수의 호텔 브랜드의 조직 문화를 참고하기도 하고, 여러 문구와 제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문제는 내부 사람들은...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컬처덱이 만들어져 갈수록 구성원들은 서서히 입을 다물더라고요. 그리고, 놀랍게도 전파자라고 모인 분 20명(나중에 알고보니...바쁜 와중에 그냥 강제 차출 당했더라고요)모두 워크샵 하는 내내...심지어 TF미팅을 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모두가 노트북을 켜고 자기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대답도 노트북을 보며 하시더라고요 정말 그 누구도 이 시간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멀뚱멀뚱 있거나,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죠. (사실 대표님도 저랑 미팅 중에 자기 할 일을 하시더라고요...)
어쨌든 대표님은 화가 났어요. 그래서 강요가 시작됩니다 '컬처덱 활동이 제일 우선이고, 나머지 일은 후순위다!' 그러자 구성원들은 구겨진 표정으로 모여서 뻔한 답만 대충 내놓고 빨리 자기 일을 하러 돌아갔습니다.
솔직한 의견과 적극적인 의견을 요청드리자, 일제히 옆에 계신 이사님을 힐끗 보며 [없어요 ㅎㅎ] 라고 말하던 모습도 있었죠.
가장 활발했던 건 [개선사항] 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이런 걸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견과, 회사 자체가 틀렸다, 대표가 바뀌어야 한다는 둥...유일하게 활발한 세션이었죠.
그리고 컬처덱이 어찌어찌 완성되고 난 후, 컬처덱을 전사 공유했고. 일주일 뒤 타운홀에서 대표님이 컬처덱을 본격 소개해주시기로 했어요.
저는 대표님의 첫 마디에서 몹시 놀랐습니다.
"여러분 컬처덱 읽어보셨어요? 어차피 안봤겠죠? 내가 몇 번을 말해도.. 맨날 똑같지. 그죠? 안봤을 것 같아서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전 이마를 짚었고, 예상대로 그 세션은 망했습니다. 끝나고 대표님께 왜 그렇게까지 세게 말씀하셨냐라고 하니까 "그렇게 안 하면 못 알아들어요 다들. 이 업계가 그래요 원래" 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어요.
여긴 업계 자체의 위계가 정말 정말 명확한 곳이었습니다. 이미...수많은 미디어에서도 다뤄질 만큼 상하 관계가 뚜렷하고 사실상 도제식 문화가 역사적으로 강했던 터라... 이걸 깬 다는 건 너무 어려웠죠. 실제로 컬처덱을 만드는 동안 소위 [위에 계시는 분들]은
"그것[소위 아랫사람]까지 저희가 신경써야 하나요?"
라는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사실 저는 이 질문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제대로 답변하기도 힘들었죠. 실제로 그 분들은 계속 [그들과 우릴 같은 선에 놓으시면 안되죠] 라는 말로 정색하셨습니다.
저는 몇 년전 저에게 [업계 특성 어쩔 수 없다]고 말한 분의 멘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정말 그건 업계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 회사의 문제였을까... 정확히 대답하긴 힘드네요.
너무 오래 고착된 어떤 패턴, 암묵적인 룰의 힘이라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거든요. 첫 사례를 표면적으로 보면 대표 태도의 문제 같아 보이지만, 결국 그 분도 업계 안에 있는 분이고, 그곳에서 커오신 리더거든요. 두 번째 사례도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일까요? 또 그렇진 않습니다. 그렇게 배워온거죠.
이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과 경험의 전승은 컬처덱의 종이와 글자가 쉬이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죠. 일하면서, 수도 없는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 개인적으론 고정관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론 저 명제에 동의하지 않으려 합니다. 만약 제가 업계에 따라 컬처덱의 힘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한다면, 저희가 믿고 있는 핵심철학 [좋은 언어가 좋은 행동을 만든다]는 명제에 어긋나는 것이거든요.
저는 업계 특성...그러니까 오랫동안 누적, 고착되어 온 인습들도 결국은 사람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고착되어 온 시간보다 짧다고 믿습니다. 컬처덱이 그 시발점이 되었으면 하고, 그런 걸 시도하는 회사들이 가급적 좋은 사례들을 만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3,4년 전 저는 그 분의 조언(?)에 [아 진짜요?] 라고 답했습니다. 지금 다시 만나 같은 얘길 듣는다면 다른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업계 특성이 있는 건 사실인데, 그걸 좋은 쪽으로 이끄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라고 말이죠. 그리고 저는 그런 클라이언트와 함께 하는게 몹시 벅차오른다고요.
욕심을 하나 부리자면, 과거의 그 분이 [그런 분들 다 망했어] 라고 반박할 수 없게, 다들 대단히 성공해서 업계를 뒤흔들어 놔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