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가 말아주는 비하인드 스토리
제 브런치에는 탑10 콘텐츠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2019년도에 쓰여진 고인물 콘텐츠죠. 결혼 이후엔 이런 글을 잘 안쓰게 되더라고요. 대부분의 인터넷 콘텐츠가 그렇듯 많이 잊혀졌습니다. 그 중 아직까지도 꿋꿋하게 살아 움직이는 두 개의 콘텐츠가 있죠.
바로 50만 조회수를 기록한 대한민국 넵병의 시초... 바로 넵병 심층탐구와,
https://brunch.co.kr/@roysday/103
20만 조회수였고, TOP10 콘텐츠 중에선 5위를 차지한 친구. 요즘 사건의 지평선에서 기어올라와 역주행 중인 판교사투리입니다.
https://brunch.co.kr/@roysday/368
그 중 판교사투리는 최근 쓰레드에 공유되면서 다시 역주행하나봐요. 지금와 다시 읽어보니 약간의 이불킥과 오글거림을 참기 어렵지만, 저에겐 나름 애정있는 콘텐츠입니다.
판교사투리를 처음 썼던 그 때와는 달리, 제 시선이 조금 달라져 있는 것도 알 수 있었죠. 결혼해서 그래. ENTP랑 결혼해서 뭔가 정신개조가 많이 된 느낌... 여튼 판교사투리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좀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글은 2019년 8월 12일.. 제가 카카오 판교캠퍼스 디자이너님들에게 협업 관련한 무슨 강연차 판교에 방문했을 때 쓴 글입니다. 그 때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고, 강의 시간까진 2시간 정도가 떠있었죠.
근처 아티제에 앉아서 강의안 정리하고, 못다한 일도 하고 있었는데 그날 따라 이어폰 밧데리가 다 되어가지고, 생고막으로 화이트노이즈를 견디고 있었거든요. 근데, 옆자리 앞자리 뒷자리에 앉아있던 직장인 분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다보니.... 아니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거에요.
그래서 일을 하다말고, 들리는 단어들을 주워 담아 1시간 만에 뚝딱 썼던 글이었습니다. ㅎㅎ 그리고 냉큼 업로드를 했는데... 다음날 17만 조회수에 770좋아요가 눌리며 대박이 난 거죠.
그리고 두 달뒤 서울경제에 판교사투리에 대해 인터뷰 한 게 실리면서 [판교사투리]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단어는 제가 당시에 순간적으로 지어냈던 단어였어요.
제가 전라도 사투리가 있는데, 클라이언트분들이 늘 그게 독특한 느낌을 준다고 말해주셨거든요. 판교에도 그 특유의 전문가적인 톤이 있었던 것이 흥미로워서 판교에 [사투리]라는 단어를 붙여본 거거든요.
이 글이 널리 각종 기사나 언론 보도자료에 활용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다양한 판교사투리의 다른 버전들이 등장하더라고요. 약간 결이 달랐죠.
사실 이 때 썼던 판교사투리는 [영어를 섞은 전문용어 대잔치] 에 대한 비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나누는 업무식 농담이 재미있어서 썼던 [애환을 담은 글]에 가까워지요.
나중에 써진 다양한 글들은 대부분 [병신보그체]같은 영어 전문용어 섞어쓰기를 중심으로 많이 바리에이션 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마케터나 기획, 개발, 전략에서 자주 쓰는 영단어들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느낌이었어요. 그것도 나름 재미있긴 하더라고요.
원래 계획은 성수, 강남, 공덕 사투리도 시리즈로 내려고 했었어요. 실제로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이야기들을 수집하기도 했는데... 뭐랄까. 뭔가 확 공감할만한 포인트가 잡히진 않아서 포기했습니다.
여튼, 원래 판교사투리를 썼던 마음은 특정한 말투를 비하하기 보단, 농담과 일상대화에도 업무용어가 섞여있는 우리들의 몰입과 웃픈 습관들에 키득거려보자는 의도였습니다.
말하다가 영단어 좀 섞이면 어떻고 허세가 좀 있으면 어때요.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도, 바쁘니까 그냥 익숙한 말을 쏟아내는 습관도... 모두 일하는 마음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뭐 반드시 고쳐야 할 악습도, 그렇다고 진지하게 반성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끔 댓글을 보면 이런 판교사투리를 몹시 비난하고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던데... 너무 그렇게 날을 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매일 몹시 애쓰고 있습니다. 출근, 일, 사람, 퇴근, 지하철... 집을 떠나 노동의 현장으로 가는 길에 안락함은 없습니다. 이것은 B.C 1만년전 인류가 사냥을 나서는 기분과 유사할 거에요. 당시 우리 조상의 손엔 돌칼이 들려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그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을 뿐.
날을 세울 때도 있고, 그 날이 나를 벨 때도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예리함을 간직한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우린 쉽게 피곤해지죠. 이럴 땐 참으로 웃음과 여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논리나 구분보단 두루뭉술한 [그럴 수 있지 마인드], 자조가 아닌, 공감과 위로에서 오는 웃음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5년 전 제가 썼던 넵병과 판교사투리, 디자이너 용어사전, 직장인의 50가지 유형 등에서는 날카로움이 아직 느껴집니다. 비꼼과 자학적인 메시지들이 분명 존재하죠. 나이를 조금 먹은 탓일까요. 이제 와 글을 지울 수도 없지만, 지금 쓴다면 훨씬 따뜻하고 부드러운 글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널리 퍼지지도 않았겠죠. 조회수 260정도 봅니다.
벌써 5년이나 더 된 글이지만, 판교사투리가 아직도 살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면...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최근의 고민은 그렇습니다. 이젠 40대가 되었어요. 예전처럼 불평불만이 많지도 않고, 이런 글들이 '관찰기'에 불과할 뿐 메시지가 없단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더 이상 자기복제하듯 이런 걸 양산할 수도 없죠.
이제 제 글은 조금 달라져야 한단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구조화가 필요하고 표현들이 다듬어져야 하죠. 새벽 감성과 맥주의 힘으로 쓸 수 없는 글들일 것입니다. 연습과 사유와 훈련이 필요한 글이랄까요.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쉽고 유쾌하게 써내려가려면 꽤나 많은 내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ㅎㅎ 만약 새로운 톤을 찾게된다면, 그 때 다시 판교의 아티제를 방문해보고 싶네요. 어떤 목소리와 어떤 풍경이 제 눈에 보이게 될지 또 사뭇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