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아, 공기관 컬처덱은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갓오브스탠다드임
2024년 2월, 아직 추운 날이었어요. 포천이라는 곳은 저에게 한탄강 트래킹 이외엔 별다른 접점이 없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포천시청에서 컬처덱을 만들고 싶다는 의뢰가 왔어요. 솔직히 말하면, '공공기관의 컬처덱'이라는 말에 쓰읍...흐음 고민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예요. 딱 그런 뭔가 스테레오타입이 있잖아요. 공무원? 공공기관? 너무 형식적인 무언가가 나오거나 충주맨처럼 뭔가 자극적인 걸 찾는건가? 싶은 우려랄까.
차타고 달려가서 첫 미팅! 김세중 팀장님을 포함한 4명을 만났습니다. 팀장님의 진행 의사는 몹시도 확고했어요. 그리고 수 차례 반복해서 리더급부터 '제대로' 바꾸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여러분도 아시잖아요. 사실 공무원이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어요. 수도 없이 퇴사하고, 지원율은 떨어지고 있죠. 포천시청은 이미 꽤나 혁신적인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의 구성원들 눈에는 개선해야 할 점이 여전히 많았나봐요.
프로젝트는 두 개로 나뉘어졌습니다.
먼저 교육시키고, 그 다음 컬처덱을 만든다!
전반기에는 6회기, 각 4시간씩 팀장들의 리더십 교육을 진행했어요. 그리고 후반기에는 그 팀장들을 TF로 하여 컬처덱 제작을 진행하는 것이었죠. 총 9개월에 달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리더십 교육을 먼저 한 이유는 심플했어요. 팀장들이 조직문화와 리더십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콘텐츠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는 거였죠. 일단 이 지점에서 굉장히 참된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그러면 누가 찾아와서 2시간 내내 재밌는 썰풀고 가거나, 정보를 주거나, 혼쭐을 내거나 그런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직접 쓰고 토론하고 서로 돌아가며 피드백하는 교육은 처음이었대요. 그래서인가...
뭔가 이쯤되면 굉장히 즐기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한 조당 4~5명 정도로, 총 5개 조로 진행했습니다. 여기서 놀라웠던 건 조 배치였어요. 팀장님이 각 부서에 있는 팀장님들의 관계를 전부 다 알고 계셨거든요. 누구와 누구를 한 자리에 붙였을 때 말이 잘 나오는지, 또 누가 서로 사이가 지금 안 좋은지까지. 엄청 치밀하게 고민해서 조 배치를 만드신 거예요. 사실 워크샵을 하면서 이게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거든요.
리더십의 정의를 내리고, 지시하는 법, 피드백 하는 법, 언어를 다루는 법 등 여러 주제로 6회차를 진행했어요. 거의 매주 한 번씩 이루어졌으니까, 나중에는 네비 안 보고 눈 감고도 포천시청 찾아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죠. 그리고 진짜 감사한 건, 전 회차에서 얘기했던 부분을 바로 다음 날 팀원들과 함께 적용해보고 '진짜 해봤더니 바뀌더라고요!' 라며 기뻐해주시는 팀장님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회차가 넘어가니까 팀장님들하고 친해져서, 허울 없이 농담도 하고 안부도 묻고 그렇게 지내게 되었어요. 이게 장기 프로젝트가 가지는 큰 장점인 것 같아요. 결국 사람이 사람 말을 듣는 건 그 말이 논리적으로 맞아서라기보다는, 이 사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관계적인 위치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24시간 이상 팀장님들이 고생했던 내용을, 그냥 '고생하셨습니다' 라고 끝낼 순 없었어요. 그래서 히스토리 북을 만들었습니다. 매거진처럼 두꺼운 책자로 만들어서, 개인 소장 내지는 아카이빙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했죠.
봄, 여름이 다 지나고 날씨가 시원해지는 가을이 될 무렵이었어요. 그때부터는 팀장님들과 다시 모여서 3회에 걸쳐 컬처덱 제작 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이때는 이미 한 번 라포가 형성되어 있었고, 6회차에 걸쳐 쌓인 지식도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훨씬 속도가 빠른 거예요. 디테일도 엄청나게 높아지고요.
물론 그때쯤 되니까 팀장님들이 좀 지치긴 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간식을 공급해 드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컬처덱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 뭐냐? 라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간식'이라고 할 겁니다. 엄마손파이, 몽쉘 이런거 말고 좀 [우와!] 할 수 있는 그뤼에르 치즈케익이나, 무화과크럼블스콘이라거나...
컨셉은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게 해준다"였어요. 이 영감을 어디서 얻었냐면, 포천시청 1층 로비에 각 부서나 화장실 위치가 나와있는 안내도가 있었거든요. 그 안내도를 보고 사람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찾아갈 수 있잖아요. 그 안내도를 컨셉으로 만든 거예요.
먼저 처음 인트로 부분은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지 설명했습니다. 시장님 인터뷰를 따서 웅장하게 앞에 넣었죠.
챕터 1엔 정체성과 문화의 구조를 넣었어요. 왜 이게 존재하는지,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풀어냈어요.
챕터 2부분에는 혼자 일할 때 vs 함께 일할 때를 나누어 각 4개씩 행동원칙을 잡았답니다. 이건 공무원들의 업무 특성을 되게 많이 반영한 부분이에요. 협업이 굉장히 많지만, 혼자 해내야 할 일도 같은 빈도로 많거든요.
대부분 협업은 부서 간 또는 부처 간 하는 협업이 많고, 대부분의 업무는 혼자서 서류든 미팅이든 자체적으로 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혼자 일할 때와 함께 일할 때로 완전히 구분했습니다.
일반적인 스타트업들은 협업에 대한 내용들을 많이 얘기하고, 치열함이나 목표 같은 걸 강조하잖아요. 근데 이곳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성과를 달성하고 엄청난 퀀텀점프를 만들어야 하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이죠.
여기서 중요했던 것은 관점을 바꾸고, 우선순위를 잡고,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들이 컬처덱에 쭉 담겼어요.
전반적으로는 매거진처럼 만들려고 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는 내가 지켜야 할 문장과 그에 대한 설명이 주된 것이었어요. 여기에 더해 내 직장 상사와 얘기를 해야 할 부분들이 있잖아요. 지금 이 부분이 왜 안 지켜지고 있는지, 나한테는 이게 쉬운지 어려운지를 대화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때 대화의 주제가 될 만한 아젠다를 각 문장별로 두 개씩 배치했습니다. 이게 또 하나의 특징이에요.
마지막에는 팀장님들이 고생해서 만들었던 수많은 내용들을 이미지로 잘 넣어서, 갤러리처럼 구성했어요.
완성 후, 내부에서 엄청나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들었어요.
[대충 팀장님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라고 하면 팀원들이 싫어할 것 같잖아요. 근데 팀원들도 이 내용을 보고 [뭔가 내가 어떻게 일해야 할지를 알 것 같다]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었고요. 시장님도 굉장히 흡족해하셨대요. 무엇보다 팀장님들 사이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은 분들조차도 [굉장히 잘 나왔다]고 얘기할 정도로 좋은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공공기관 컬처덱을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사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실제로 이걸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잘해서가 아닙니다. 진실로다가 주무관님과 팀장님이 진짜 몸과 영혼을 갈아 넣었다고 생각해요. 워크샵 조 배치하는 것부터,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 장소를 섭외하고,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 독려하고 리마인드하고. 이 모든 과정을 정말 섬세하게 같이 해주셨어요. 진짜 같은 팀원이나 동업자를 넘어설만큼 쫀쫀하게 함께 해주셨달까요. 믿고 맡길 부분은 확실하게, 챙겨주실 부분은 대단하게 챙겨주셨죠.
한 가지를 더 말하자면, 저는 컬처덱 프로젝트를 할 때 항상 그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담당자들의 애티튜드가 곧 그 조직의 문화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 작업할 때 수정 사항이 정말 많이 오고 갔어요. 텍스트가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많다 보니까, 크로스 체크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탈자가 나오는 거예요. 띄어쓰기, 따옴표 같은 것들이요.
공공기관이고 오픈되는 정보다 보니까 이런 거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했고, 써서는 안 되는 표현들도 꽤 많았거든요. 이 정도로 수정이 오가면 서로 피곤하고 짜증날 법도 한데요. 이태림 주무관님이 그 중간에 저한테 메일을 이렇게 써주신 거예요.
대표님과 교육한 여러 시간 동안 대표님을 뵈면서 말씀하시는 부분이나,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 등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게 수정할 부분이 생기나봐요.
와....오탈자 수정을 요청하면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메일받고 진짜 꽝... 했답니다. 이것이 F의 힘인가... 지난 6년간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렇게 심쿵한 메시지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공공기관의 여러 특성에 대해 정말 깊숙히 알게 된 프로젝트였어요. 그리고 업무 방식이나 고충의 결, 구성원들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죠. 이전에 화성시청과 과천시청과도 인연이 있었는데 그 때는 '리더급', 즉 시장님 자체와 함께 일했었어요. 포천시청 프로젝트에선 그 안에서 일을 움직이는 구성원들의 애씀에 빠져들었죠. 얼마 전 배우자님과 함께 강의차 포천에 다시 다녀오는데, 포천시청을 지나며 꽤나 아련해졌답니다. 뭔가 일이 끝나고 그리워지는 기분이 들긴 처음이었어요.
조직문화를 선언하고 컬처덱을 만들고 싶은 공공기관이 있다면 주무관님들 짐싸들고 포천시청 컬처덱 감상하고 오세요. 가면서 한탄강도 들리고, 아트밸리도 가시고, 산정호수가서 막걸리도 드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