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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혜 Aug 19. 2016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누추한 청춘의 도전&성숙 일기 (2)

원래 하기로 했던 것(나의 여행기)을 해야지 생각하며 가볍게 다시 시작을 한다.

해외에서의 생각을 끄적인 것은 여담으로 두고, 과정을 시간순으로 해서 넘버링부터 해보았다.

기억을 더듬더듬 차근차근 시작.


내가 왜 떠나려고 했었지?

일단 생각부터 해보니, 나는 늘 영어권에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

언젠가 영어와 나의 히스토리에 풀어놓은 것처럼 미드를 보다 영어가 좋아졌고, 마인드는 언제나 한국인과는 다르단 소리를 어릴 때부터 들어서인가 나의 아메리칸 마인드 제대로 풀어놔보자는 생각에 언제나 영어권에서의 삶은 내 마음 구석 작은 소망이었다.

그런데 다들 살아보아 알다시피 적지 않은 나이에 생업을 놓고 꼬박 1년을 투자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용기는 쉽게 장착되지도 않고, 섣불리 엄두가 안나는 일이다.

게다가 짧은 해외 출장 두 번을 제외하곤 혼자서 장거리 해외 체류는 해본 적이 없는지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나의 다리를 잡는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쉽게 꺼지지 않는 소망은 갈망으로 자랐고, 어느새 열망으로 내 마음을 쉬지 못하게 했다.


2014년 2월이었던 것 같다.

지인들과 '신이 보낸 사람'을 보러 갔었다. 울기도 많이 울고 나왔지만, 왜 나는 거기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떠나야 되지 않니?'라는 메시지를 들었을까...

지금 아니면 못할 거라는 생각, 빨리 하지 않으면 늦을 거라는 생각, 이제는 정말 가야 할 것 같은 그런 조급함이 마구 밀려왔다.

나는 크리스천이라 먼저 기도를 했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경우의 수와 예상되는 두려움과 걱정들을 낱낱이 기도로 하나님께 토로했다. 

흙수저라서 모든 것은 혼자 감당해야 했고, 그 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삶이라 전재산은 자취방 보증금이 전부이고, 나이는 말했다시피 마흔이 코앞이고, 직장도 으리으리한 곳이 아니라 다녀와서 나의 미래는 그야말로 '불투명'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남편이 있길 하나, 그냥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 무모하기도 세상 최고 무모했다.

나는 하나님께 그런 다가오지 않는 미래에 뻔히 예상되는 문제들을 핑계로 대었다.

내가 가고 싶은 것이었나, 주님이 등 떠미시는 것인가... 헷갈릴 정도로.


갈망이 문제였다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있던 그 소망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땐 주님의 뜻인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소망이 더 컸다.

내가 원하면서도 선뜻 행동하지 못하니 '떠나라'는 것은 주님의 뜻인 것 같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으로 버티는 것은 내 생각 같고, 미적미적 망설이는 것은 불순종같이 여겨지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떠나야 한다는 것. 왠지 분명히 나의 여정을 통해 꼭 하실 일이 있으실 것 같은 직감.

나중에는 "일단 가자!"고까지 하시는 듯해 아니 뭐가 일단 가냐고, 지금 제 상황은 알고 그러시는 거냐고 따졌지만, 주님은 언제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기대하렴."하시는 든든한 나의 아버지셨다.

이 기도와 응답들을 1년간 계속했다. (더 디테일한 것들은 더 신앙적인 것들이라 생략하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나의 기도와 응답을 통한 하나님과의 시간들은 말로 못할 정도로 놀랍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회사를 그만두도록 제대로 불을 지펴준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친구의 세계일주 소식이었다.

대학교 친구(남자)인데 아내와 함께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꿈을 이루고자 5개월이 넘는 준비를 거쳐 1년이 넘는 여정으로 한국을 떠난 것이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간간히 페이스북에 업로드했고, 그것을 보는 나는 부러움을 넘어 속상함까지 밀려왔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한참 못 미쳐도 못 미친다. 그처럼 대기업을 10년간 다니지도 못했고 (모아놓은 돈이 그만큼 많지 않다는 거다) 다녀오면 지낼 집도 없을 것이고 (그는 집도 있었다) 함께할 동행도 없고(그는 남자고, 동행할 부인도 있고, 부인도 대기업 다니던 여자라던데...), 비교만 비교만 하다가 부러움에 지칠 지경이었다.

일요일 저녁 방에 홀로 앉아 그의 사진과 글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너무 부러워서.

당연히 그때 함께 하시던 하나님께 징징댔다. 

'저도 저렇게 살고 싶어요 주님, 저는요?'

'너도 가면 되잖아.'

'돈도 많이 없어요.'

'내가 부자잖아~'

'혼자서 어떻게 가요?'

'너는 내가 있잖니.'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내가 널 지킨 건 이때를 위함이란 걸 알잖아?'

(그건 정말 결정적인 증거였다. 내가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하는 모범생이긴 했지만, 밤늦게 돌아다니고 위험한 곳에 살고 그런 전적은 화려한데 평생 한-번도 위험했던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같은 장소를 초저녁에 다닌 동생도, 지인도 모두가 위험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기도 아닌 기도를 하면서 그냥 계속 눈물이 났다.

부러워만 하고 있다가 내 인생 그렇게 계속 흘러만 갈 것 같아서.

그처럼 풍족한 배경에서 시작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날 밤, 대표님께 긴긴 메일을 썼다.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결심이 너무 확고했던지라 그도 이제 포기를 한 듯했다. 그다음 날 긴긴 대화 끝에 일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러고도 쉽지 않았다.

난 또 반년 가까이 정말 가도 되는지 확신을 가지려고 얼마나 기도하며 응답을 구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는 얘기다.

왜? 다녀와서의 삶이 너무나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더 늙은 노처녀에, 백수에, 방 구할 보증금도 없는 알거지로 돌아와 (손가락질이나 안당하면 다행이다 싶을정도로) 다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그 암담함이 1년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결심하고도 반년을 더.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고 난 이제 어떻게 무엇을 어디서 얼마나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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