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저력
내 나이 마흔 즈음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어도 상관없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나는 이미 마흔은 넘었다. 정확히 지금 마흔둘이다. 하지만 마흔다섯이 아직 넘지 않았으니 아직은 마흔 즈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0년 전 30살이 될 때 한 친구가 말했다.
'내 나이 서른 즈음에...'
그 친구는 지금까지 살 이온 자신의 인생을 회고라도 하는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친구는 몇 년 전 미국에서 교포 출신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는지, 결국 이혼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나와 자주 만났었는데, 친구가 자신은 이미 서른이나 되었는데 해 놓은 것이 무엇인지, 결혼에 한번 실패해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저 문장을 매우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30대도 매우 젊은 나이였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이었나 싶은데 말이다. 하긴 돌이켜보면 어떤 고민이든 그리 심각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30대의 나에게도 꿈은 있었는데, 10년쯤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냥 막연한 기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구속되어 살지 말자는 내 생각처럼 대학원도 다녀보고, 해외에서 근무도 하면서, 제법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30대의 끝자락에서 운 좋게 좋은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다시 고국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찾지 못했다. 나이는 마흔인데 지금 하는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맞는지, 평생 해야 하는 일인지 언제가 의문 투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회사 부서가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일에 대해 그리 열정이 없었는지 나는 마음속으로는 쾌제를 불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느끼며, 실업급여도 꼬박꼬박 받고 퇴직금도 챙겨 받았다.
남아도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서 자유롭게 보내던 그 순간, 문뜩 10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서른 살 때 친구가 신촌에서 중얼거리던 그 모습. 그리고 나는 10년 뒤에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던 다짐이 생각났다.
'내 나이 마흔 즈음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30대에 막연한 불안 앞에 우리는 별다른 힘이 없었다. 그렇지만 10년 뒤에는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다만 수익 창출로 잘 이어지지 않아서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뜩 떠오른 저 문구는 계속 내 귓가에 맴돌았고, 마흔의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저것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수익을 창출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들고, 고객을 만나고 수입도 내봤다. 첫 달에는 아르바이트 수준의 순수익을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수익률은 오르기 시작했다. 2년 차를 맞이하자 수익률은 더욱더 좋아졌다. 성수기에는 회사를 그만둘 때 정도의 연봉과 비슷한 수입을 내고 있었다. 리스크 관리를 중심으로 관리해 온 덕분에 수익을 크게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거의 모든 일이 취소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캘린더의 일정이 모조리 취소가 되어버렸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과적으로 최고 성수기에 고정적인 일을 제외하곤 집에 틀어 박혀있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또다시 많은 시간이 나를 찾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일이 없었다. 내가 일을 찾아야만 했다.
내가 우선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써보기로 했다. 노트에 몇 가지를 적는데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데 많았다. 이십 대의 나였다면 이렇게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것, 요새 투잡 트렌드 등을 정리해서 적어봤다. 할 수 있는 게 제법 많았다. 아니 이미 시작한 것도 있었다.
한 달 동안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우선순위가 높은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브런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친구가 브런치 작가에 도전 중이라 마음 편하게 도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단, 이때 브런지 플랫폼에 대한 이해도는 상당히 부족했었다. 단지 책을 낼 수 있는 플랫폼 정도로 인식했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SNS와 블로그에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것이었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와 SNS 업데이트를 게을리해 왔었다. 특히 인스타그램은 홍보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블로그는 내수 고객을 모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일단 브러치용 원고를 쓰면서 작가의 서랍에 몇 개의 초안 원고와 목차가 쌓였다. 목차를 다시 수정하고 재 수정하는 일을 반복하고, 머리가 아파올 때는 블로그를 작성하거나, SNS를 업데이트했다. 그러던 3월에 마지막 날, 어느 공간 대여업체에서 사진 촬영 건으로 협업할 작가를 찾는다며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연락을 했다고 했다. 문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1만 명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 “아, 이제부터가 시작이구나.”싶었다.
4월을 초가 되자 일단 준비된 브런치 원고를 가지고 작가 신청을 냈다. 이때 정신이 없어서 목차를 어떻게 적었는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이때 단 한 번의 신청으로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나서 신청이 심사라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는 정말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작가 신청이 '심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저 책을 낼 수 있는 블로그 정도로만 인식했을 뿐이다. 작가가 되고 나서 구글을 검색을 해보니 심사 프로세스에서 4번이나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브런치 작가가 되자마자 블로그에 손을 댔다. 내 블로그는 모객용이기도 하지만 1차 목표로 광고를 달 수 있을 때까지 성장시키기로 정했다. 매일 1개 이상 포스팅하고 약간의 재정비를 추가했다. 촬영해 놓은 사진을 소스화 시켜서 협업 업체에서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한 달만인 5월 연휴가 끝나자마자 광고를 달수 있었다. 4월 초 내 블로그의 하루 방문객 수는 한자리 수 일 정도로 방치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꾸준히 두세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리스트를 처음 만들었을 때 내용은 5~6가지 정도나 되었다. 회사 출강, 유튜브 자막 번역, 온라인 콘텐츠 내기 등등이었다. 그런데 아직 시도도 못한 것도 많은데, 뭔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물론 코로나 사태 이전처럼 수입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 2달 사이에 새로운 인프라만 구축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여전히 집중하고 있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가능함에 너무나 감사하고 있다.
나이 마흔 즈음은 결코 나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른 즈음에는 위로 올라가기도, 정착하기에 너무 바빴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훨씬 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흔 즈음엔 어려움이 닥쳐와도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헤쳐나가는 능력이 몸에 배어있는 것 같다. '나는 마흔이나 먹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힘내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마흔은 뭐든지 잘 헤쳐나가는 지혜가 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오늘 고민하는 당신도 내일이 되면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것이 마흔의 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