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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elsilvere Apr 25. 2020

사냥의 시간

그저 그런 한국 영화

영화를 만드는 이유, 아니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게 만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2시간, 120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가만히 앉아 앞만 보게 만들려면 최소한 예상할  없는 전개로   사람의 환심을 끌어야 한다. 시대가 바뀌어 언제든 영화관보다 멋진 사운드, 화면으로 보고 싶은  5분에  번씩 채널을 돌려가며  수도 있고 다시 보고 싶으면 돌려 보면서 이해력을 높일  있기도 한다. 연애하는 청춘에겐 영화관은 영화때문이 아닌 그저 컨텐츠로 소비되고 시기 적절하게 만들어 파는 가족용 (눈물콧물 빼기 위한  엄마나 누가 죽는) 영화는 명절에 누구나 하니  역시 해야하는 것처럼 소비되곤 한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간다기 보다 영화관에 가는 행위를 위해 그것을 하는 것이다. 몇년  여행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으로 언급한  있는데 세상 대부분의 컨텐츠는 그러한 식으로 소비되고 잊혀지곤 한다.
사냥의 시간 사냥도 엉성, 시간도 5? 이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관객을 모독한다. 사실 모독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써가며  영화를 표현할 이유도 없다. 몇년  지인의 딸이 만든 졸업 작품 영화 음악 작업(?) 해주며 파수꾼을 알게 됐고  친구의 작품이 파수꾼과 비슷해 , 이런 영화가 있군. 했었는데  영화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냥의 시간? 끝도 없는 핏빛, 붉은빛 혹은 바다의 파란빛이 무한 반복으로 나오는  영화는 1/3 지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그리고 시간을 앗아가 버렸다. 너무 중요한 이유로 나름 막무가내  친구를 잡는  사람은 갑자기 친구들을 놓아주고 자칭 사냥꾼이 되어 절대 뛰지도 추격하지도 않고 그저 걷는다. 마치 싸구려 패션쇼에 처음 등장한 모델처럼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엉성한 스텝으로 남들의 시선만 잔뜩 의식한  걸으며 그들을 쫓는다. 주인공 ?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마치, 요즘 넷플릭스에서 자주 보이는 -남편은 유치하다고 틀어 놓으면 화내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장하는 넷과 다를  없다.  하나, 시점.  굳이 한국을 저렇게 만들어 놓은걸까? 미래도 과거도 아닌, 차는 그대로이지만 영어가 나오고 한화는 가치를 잃어 달러가 통용되는? 억지스러운 컨셉에 도리어 웃음이 나오는 설정이었다.
무척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65인치쯤 되는 우리집 티비에 홈파드가 양옆으로 놓여진 -서라운드 효과- 소파의 가운데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영화만을 위해 기대하며 집중했다. 마지막 장면이 나오고 -마치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는 듯한 대사. 나는 돌아간다. 나는 가야할 곳으로 간다. (어쩌라고?)- , 정말 저걸 어쩌지. 했다. 최근 시즌 3 나온 Ozark-오자크-  50분정도 되는 에피소드 하나만 봐도  영화 전체보다   카타르시스와 플롯과 힘과 멋들어짐이 느껴지는데 90 들여서 만들었다는  영화는 그런 넷플릭스 시리즈물 에피소드 하나만도 못한 수준이다. 챙피하다. 왠지 기생충의 너드한 풍경을 카피하기 위해 인위적인 가족애를 드러내는 밥상도 -같은 주인공- 엄마가 죽기 직전인데 친구에게 농담이나 하며 뒤돌아 눈물을 닦는 표정도,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컨테이너 추격신도 이젠 그만할 때가 됐다. 지겹고 챙피하다. 차라리 넷플릭스 시리즈물이 낫다. -콜롬비아 버전 나르코스가  멋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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