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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elsilvere Dec 03. 2022

글을 쓰기 시작했다.

12월 2일 2022년 첫 번째 일기 


글을 쓴다는 건 하기 싫은 운동을 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결혼하기 전에는 글을 쓰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는데 無스트레스 상태인 요 몇 년간 마음 잡고 앉아 글을 쓰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소해야 할 스트레스가 없다는 건 그만큼 삶이 만족스럽다는 뜻이겠지만 깊고 넓게 그리고 때로는 무뚝뚝하게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쓰던 내가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으니 무엇도 나다운 게 없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젠, 써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 모처럼 책상에 앉았다. 

뱃속에 있는 아가가 세상에 나올 날이 멀지 않았기에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기록을 위한 기록을 시작해 보려 한다. 


남편은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동영상 찍는 법을 찾으며 준비 중이고 나는 먼 훗날 아가에게 전해줄 일기장 아닌 일기장의 첫 장을 이제야(32주나 지난 후에야) 펼치게 된 거다. 


소음과 일상이 공존하는 삶 속에서 누구나 지나치는 과정일지도 모르는 임신은 나에게도 평범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매 순간 감격하고 감탄하는 사사로운 일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중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뱃속 구석 여기저기가 울룩불룩 튀어나오며 손인지 발인지 알 수 없는 녀석(?)이 나를 건드린다. 서너 번씩은 뱃속 아가가 딸꾹질을 하는 걸 느끼고 나도 모르게 "엄마가 미안해. 내가 빨리 움직여서 그런 거야?"라고 말하게 된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사실 아무 상관없겠지만) 괜스레 아가가 더 발버둥 치는 것 같고 달콤한 음식을 먹으면 좋아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 짓곤 한다. 


지난 9개월간의 변화를 왜 하루하루 기록하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들기도 하는 요즘이지만 가끔은 지나치고 흘려보내는 것도 기억을 음미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걸 알기에 뭐, 어때. 그게 나지. 라며 스스로를 위하기도 한다. 




호흡이 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글을 쓰지 않았던 지난 몇 년의 시간 동안 내 몸과 마음에는 어떤 단어가 쌓였을까? 

단련하지 않으면 짧은 호흡은 길어지지 않는데 왜 나는 스스로 훈련하지 않은 걸까? 


언제나 장황한 미래를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나는 해야 할 일이 없을 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요즘은 습관처럼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켜놓은 채 멍 때리는 시간을 즐기곤 한다. 바보처럼. 


자기반성의 시간은 이걸로 충분한 것 같고 이제는 세상에 태어날 아가를 위해 소소한 것 하나까지도 기록해 놓아야 한다. 엄마가 된다는 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닐 테니. 내 뱃속에 있을 때 네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다는 걸(물론 내가 죽는 그날까지도. 아니, 어쩌면 죽은 다음에도) 알려주고 싶다. 


오늘은 주절주절 주제 없이 잔소리나 하는 날이었으니 내일부터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일상에 대해 기록해 보려고 한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신비는 글로도 말로도 어떤 행위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저 인간이 인간을 품고 하나의 몸 안에서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 뒤, 세상에서 개인과 개인으로 만나 또 다른 유대가 생긴다는 것. 너무나 경이로운 일이다. 


극 초기일 때 만난 은사님은 "네가 엄마가 되는구나. 드디어 인간으로서 네가 완성이 되는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다고도 덧붙이셨다.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던 5년 전의 내가 비로소 인생을 배우게 될 거라는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시던 그분의 눈빛은 기민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가를 보며 나 역시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른의 특권이자 취약점은 바로, 시간을 멋대로 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인 것처럼 나는 9개월이 다 되도록 게으르고 수동적인 엄마였지만 오늘부터는 달라지기로 다짐했으니 이젠 정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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