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유머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 여자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지금 막 중요한 발표를 하려 한다. 친구들이 모여 있고 그녀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그리고 발표에 앞서 그녀가 하는 말.
“일어나진 않겠어, 왜냐면 귀찮으니까.”
영화 <노팅힐>의 인물인 '벨라'의 대사다. 이 유머가 고급스러운 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머는 과장되지 않고 진실하다.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직관적으로 웃게 하는 유머도 좋지만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유머를 더 좋아한다. 반어와 역설로 구성된 유머의 대상과 맥락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그 유머를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웃을 수 있다. 유머에는 흔히 정상과 비정상, 논리와 비논리가 부조화를 이룬다. 이 부조화가 유머로써 조화를 이룰 때 그 절묘함이 나를 웃게 한다. 또 어떤 유머는 단순히 웃긴 걸 넘어 깊은 인상과 여운을 주는 데 벨라의 유머가 내게 그랬다. 그녀는 약점이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자신의 상태를 유머의 대상으로 삼았다.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를 개의치 않아 함으로써 그것이 전혀 약점이나 아픔이 아니라고 선언하듯 말이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함의 확인이다’. 작가인 로맹 가리가 쓴 문장이다.
멋진 유머를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구사하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고 내가 그런 사람이고 싶다. 웃음을 잃어가는 나날에 더욱 그렇다. 배꼽을 잡고 웃어본 적이 언제더라. 요새 들어 나를 웃게 하는 일이라곤 미운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 정도다. 뒷담화로 인한 웃음은 속 시원히 터지지 않고 께름칙한 뒷맛을 남긴다. 누구도 상처입지 않고 자신과 상황의 한계를 뒤집고 맹점을 비추는 유머가 사람들에겐 필요하다.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 앞에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게 될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날 어떤 사람에겐 침묵도 필요하다. 그들도 언제까지고 울상과 침묵만을 곁에 두진 않을 거란 걸 안다. 그럼에도 만약 내가 근사한 유머를 선물처럼 건넬 수만 있다면 그들이 조금 일찍 웃음을 찾게 될 거라고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유머를 하나 더 소개하겠다. 뉴요커(The New Yorker) 잡지의 카툰 에디터인 밥 맨코프(Bob Mankoff)가 한 강연에서 소개한 카툰(Cartoon)의 유머다. 이 카툰은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하고 뉴요커 잡지가 최초로 카툰을 싣지 않은 한 주를 보낸 후 처음으로 실은 것이다. 밥 맨코프는 이 카툰을 소개하며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웃을 수밖에 없다는 걸 나타낸다고 말했다. 숨을 쉴 수밖에 없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유머는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됐다.
“다시는 웃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당신의 재킷을 보았죠(I Thought I’d never laugh again. Then I saw your jack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