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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Oct 20. 2020

너의 꿈은 무엇이니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가끔씩 연예인 박명수가 한 말을 떠올린다. 주중에 밤낮없이 일하곤 주말에도 카페에 앉아 언뜻 여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골머리를 앓아가며 기사를 쓰는 그런 때에. 그럴 땐 그냥 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아지고 실제로 주말이면 놀기 바쁘다. 계속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이따금씩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놓지 못한 꿈의 파편이 박힌 자리에 통증이 이는 것이다. 놀고 싶긴 한데 꿈이 없진 않다. 박명수와 그의 말에 웃음이 터졌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 멀어져 버린 꿈을 떠올리면 손을 잡아줬어야 할 누군가를 놓고 온 기분이 든다. 그 누군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나. 


# 영화감독 지망생과 망나니


가장 오래된 꿈은 영화감독이다. 어려서부터 영화가 좋았다. 초등학생 때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비디오 대여점에 가 빌려볼 만한 영화가 있는지 찾았다. 새로운 비디오가 들어오는 날을 기억해두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신작을 빌려 보곤 했다. 중학생이 돼서는 인터넷으로 손쉽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영화를 봤다. 그중에 유독 재미있는 영화는 친구들에게 소개하곤 반응을 살폈다. 친구들도 나만큼 그 영화를 재미있어하면 그렇게 뿌듯했다. 나는 영화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좋았고, 내가 직접 영화를 만들어 그런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는 바람에 영화감독을 꿈꿨다.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말하기 망설여졌다. 그때까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일은 어느 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인문계 문과 학생이 된 나는 착실히 국·영·수 공부에 집중해 대학에 입학할 일만 생각했다. 정말 대학 입학까지만 생각했다. 어떤 분야를 전공해 미래에 어떤 일을 할지는 조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고등학생의 내게 대학 입학 이후는 아주 먼 미래로만 느껴졌고, 먼 미래를 그려보는 일을 나는 누구에게서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 만나는 여자 친구와 대학생이 돼서도 만날 수 있을까?’ 정돈 생각했다. 그 친구와는 대학에 들어간 지 2개월이 지나지 않아 헤어졌다. 그리고 1년을 놀았다. 문자메시지로 이별을 통보했던 그녀도 금세 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술을 많이 마셨다. 처음으로 필름이 끊겼던 날, 내가 주차돼 있던 차량 위에 올라갔다고 친구들이 말해줬다. 다른 친구들은 내가 길을 가다 부딪친 전봇대와 싸웠다고 말해줬다. 침도 좀 뱉었다지. 


“그때 너는 참 망나니 같았지.” 


지금도 대학 친구들은 당시의 나를 추억하며 혀를 내두른다. 그때의 나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다.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 하고 싶은 게 없고 놀고만 싶었다. 그랬던 망나니도 군대를 다녀오고 나선 얌전해졌다. 또 제법 진지하게 꿈을 얘기할 수 있게 돼서 친구들에게 선언하듯 말하기도 했다. 


“나, 이제 글을 좀 써보려고.”



#짝사랑의 책과 나와 닮은 타인


내게 군대는 나와 타인을 알게 한 곳이다. 그곳에선 개인의 자유나 개성이란 가치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다. 바로 그 점이 나를 나라는 개인과 책임을 동반한 자유, 타인과 구분되는 개성을 고민하게 했다. 고민할수록 나와 타인이 아주 다르다는 걸 알아갔다. 그곳의 사람들은 종종 짐승처럼 굴었다. 강자는 약자를 때렸다. 두들겨 맞은 약자는 4층 창문에서 뛰어내릴 자리를 살폈다. 그에게 사람들은 잠이나 자라고 말했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점점 더 타인을 알 수 없게 됐다. 나는 타인을 미워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책이 보였다. 


어느 날 동기가 폴 오스터의 ‘괴물’을 읽고 있는 걸 봤다. 책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던 내가 그 책은 한눈에 알아봤다. 한때 짝사랑했던 여자가 지하철에서 읽던 책이었다. 그녀의 눈이 어떤 문장을 훑고 갔는지 궁금해 그 책을 읽었다. 재밌었다. 폴 오스터의 다른 책도 구해 읽었다. 그녀도 이 책을 읽었을지 궁금해하면서. 머지않아 나는 이야기와 인물 자체에 빠져들어 책을 찾게 됐다. 책에는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소설 속의 세계와 인물은 가상이었다. 그런데도 책에는 나의 삶과 이야기를 대변해 주는 듯한 문장이 있었다. 나와 닮은 인물도 있었다. 그들이 표현하는 아픔과 슬픔은 아직 입 밖으로 소리 낸 적 없는 나만의 아픔과 슬픔을 꼭 닮아 있었다. 그들이 책 속에서 언뜻 내비치거나 속삭이고 마는 비밀마저 나의 비밀과 같았다. 나의 비밀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됐을 때, 나는 홀가분해졌고 위로받았다. 그들은 자꾸만 내게 말해줬다. 넌 혼자가 아니야. 타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살을 맞대고 지내는 사람들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갈 때, 책은 나와 타인이 다르지 않음을 계속해서 알려줬다. 그 괴리가 나를 읽고 쓰게 했다. 제대할 때까지 나는 게걸스럽게 책을 읽고 매일 일기를 썼다. 제대 후 1년간 대학을 쉬면서 단편 소설을 썼다. 밤새 글을 쓰는 나날을 보냈다. 이후 대학생활 틈틈이 글을 쓰니 졸업 즈음엔 책 한 권의 분량이 나왔다. 그렇게 나만의 책 한 권을 소장하게 됐다. 나의 꿈은 작가가 되었다. 



# 기자님, 글 계속 쓰시죠?


2019년 10월 9일의 나는 기자다. 글을 쓰던 경험을 살릴 요량으로 2년여 전 이 직업을 택했다. 그런데 이 직업, 예상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내가 이제껏 써온 어떤 글과도 기사는 다르다. 핵심이 되는 사실을 두괄식으로 무미건조하게 써야 한다. 주관적 견해가 들어가선 안 된다. 재미를 붙이기 힘든 글이다. 게다가 쓰는 건 빠르고 정확해야 한단다. 신속과 정확은 서로 양립하기 힘든 가치인데도 말이다. 


또 기사는 칼을 다루듯 조심해서 써야 한다. 사실이 아닌 것이나 앞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사실만을 전달하면 사회나 개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어서다. 그렇게 조심하지만 가끔씩은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기사를 쓸 때가 있다. 정의와 공익을 위해 위법사항을 지적하는 기사가 그렇다. 그런 기사를 쓰면 위법을 한 당사자는 처벌을 받거나 밥줄이 끊길 수 있다. 그러니 악에 받쳐 내게 전화를 걸 만 하다. 


“이 새끼야, 너 이거 누구한테 정보 얻었어. 너 돈 받고 썼지?”


“제보받고 취재했습니다. 욕하지 마십시오.”


“넌 위법이라고 기사에 썼는데 나는 법을 피한 거지 위반한 게 아니야. 헛소리 지껄인 걸로 내가 너 고소할 거야. 절대 가만 안 둬.”


“○○씨가 ○○법상에 명시돼 있는 수입절차 거치지 않은 거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반말하지 마십시오.”


“너 대학 어디 나왔는지나 말해 새끼야. 네 아이큐 좀 알아야겠어.” 


“전화 끊는다. 할 말 있음 메일 보내.” 


악에 받친 전화에 주눅 들지 않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끔씩은 나도 독기가 올라 수화기에 대고 언성을 높인다. 그런 날은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일에 어떤 확신을 갖고 있나. 무슨 일을 하든 글은 쓸 수 있지만,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은 점점 덜하게 되는 거 같은데. 


“꿈이 작가라고요? 그러면 계속 쓰셔야겠네.” 


친하게 지내는 출입처 사람에게 꿈과 고민을 좀 털어놨더니 이렇게 답했다. 계속 쓰세요. 그 방법밖에 없죠. 나의 꿈을 들은 후로 그는 만날 때면 곧잘 요즘도 글을 쓰냐고 묻는다. 그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요샌 모임 다니면서 한 달에 한 두 편 정도 글을 써요. 저번엔 단편 소설 짧게 썼어요.”


글을 쓴 날이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반년 동안은 모임에 나가지도 않고 따로 글을 쓰지도 않았다. 일이 너무 힘들어 글을 쓸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었다. 그런 차에 술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는 어김없이 물었다. 


“기자님, 글 계속 쓰시죠?” 


“아뇨 요샌 한동안 못썼어요. 일이 바빠서.” 


“끝났구먼.”


“끝났다니?”


“꿈이 끝났다고요. 그렇게 안 쓰다 보면 진짜 끝나는 거예요.”


꿈의 끝을 고하는 그의 말을 듣자 입에서 쓴 맛이 핑 돌았다. 평소엔 써서 잘 마시지도 않는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 싶을 정도로. 나는 물을 마시듯 소주 한 잔을 탁 털어내곤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도 글 안 썼으면 내가 술 살게요 진짜."



# 꿈을 곁에 두는 삶 


이 글을 쓰며 그때의 다짐을 지킨다. 곧 모임에 제출하는 글 말고도 일관된 주제로 여러 에세이를 써보려 한다. 단편 소설은 공부가 필요한 데 아직 선뜻 나서지 못하겠다. 금방 그만두게 될까 봐 조금 겁이 난다. 다만 한편으론 앞으로는 마음을 달리해야지 싶다. 일이 힘들 땐 편한 마음으로 글 쓰는 일을 쉬어야지. 꿈보다 나를 챙기는 게 우선이다. 작가라는 타이틀 없이도 글은 계속 쓸 수 있으니 꾸준히 쓰기만 하자. 무엇보다 꿈을 당도해야 할 목적지로 여기고 그곳에 이르지 못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자. 그보다는 꿈을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으로 다루는 게 현명하지 싶다. 영화감독이란 꿈은 내게 영화감독이 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줬을 것이다. 내가 그 꿈을 지레 포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니 내가 슬퍼해야 하는 건 영화감독이 되지 못한 내가 아니라 꿈을 놓아버린 나다. 반면 주중에 밤낮없이 일하곤 주말에도 카페에 앉아 언뜻 여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골머리를 앓아가며 기사를 쓸 때도 내가 아직 꿈을 그린다면, 그건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까. 곁에 항상 꿈을 두고 살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러려면 어린 영화감독 지망생과 갈 곳을 잃은 망나니를 잊지 않고, 짝사랑의 책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꿈의 끝을 고하는 이를 경계하며 계속 글을 써야겠지. 그러다 언젠가 문득 멈춰 서게 됐을 때, 길고 긴 꿈의 여로가 적힌 책 한 권이 내 손에 선물처럼 들려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다. 


#에필로그


햇빛이 드는 대학교 휴게실에서 택배 상자를 뜯었다. 책 한 권을 꺼내 들었을 때 마침 옆을 지나치던 선배 한 명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을 올바르게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선배의 손에 그것을 넘겼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손에 내 작은 꿈이 들려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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