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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Oct 30. 2020

특별할 것 없는 고민

  선배에게 밥을 사달라고 했다. 안 하던 부탁을 하니 선배는 조금 겁을 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는 말에 고민이 많다고만 답했다. 그 정도만 말해도 짐작하겠지 싶었다.


  3년 전 입사 면접에서 편집국장이 물었다. 직업을 구하는 건지, 직장을 구하는 건지. 기자라는 직업을 구한다고 말했다. 기사로 사람들과 소통하길 원합니다. 기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과 공감해야 할 것,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리고 싶습니다. 직장은 제게 기사를 쓸 기회를 주는 곳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이 제게 그 기회를 주길 바랍니다. 그건 헛소리였다. 그땐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몰랐다. 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적도 없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돈이 필요했다.

 

 기자로서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편했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고 궁금한 건 뭐든 물었다. 때때로 그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랑이나 푸념, 걱정이나 문제의식, 회사 동료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취미 얘기도 눈을 빛내면서 말하면 듣기에 좋았다. 그들과 같이 밥을 먹었다. 언젠가 동행했던 취재인이 함께 밥을 먹다 식구(食口)의 의미를 새삼 설명했다. 같이 밥을 먹으면 관계가 특별해진다면서. 그리고 계속 기사를 썼다. 기사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바뀌길 기대해봅시다. 가끔씩 그런 말을 들었다. 어떤 건 정말로 바뀌었다. 법령에 짧은 한 문장이 더해지거나 없어지는 일로 누군가는 더 안전해지고, 정당한 대가를 받고, 조금 더 수월하게 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곱지 않은 말도 들었다. 욕 좀 먹었다. 나를 고소하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 몇 된다. 그중에 유달리 부지런한 사람은 자주 내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몰래 녹음하거나 특정한 대답을 유도했다. 사무실로 찾아와 성을 내던 사람에게 나도 똑같이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하고 있자니 한 선배가 뒤에서 나를 번쩍 안아 올려 밖으로 내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대로 회사 건너편 맥줏집으로 가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곤 곧 그가 나올 출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낡은 폴리에스테르 원단의 회색 코트를 걸친 채 길가로 나와 담배를 피우던 그. 그의 말보다 더 오랫동안 잊지 못할 말은 따로 있었다. 기사에서 위법행위를 지적당한 다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산에 올라갔다고 했었다. 그러나 결단을 앞둔 순간 두 아이가 눈에 보여 집으로 돌아왔다. 당신 때문에, 그가 말했다. 사무실에선 한 선배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너는 노력을 안 하는 거 같아. 너는 노력을 안 해. 기사가 전혀 나아지지 않잖아. 새벽까지 기사를 쓰고 새벽에 일어나는 나날을 보내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력해도 욕먹고 노력하지 않아도 욕먹는다면, 굳이 노력해야 할 이유가 뭘까?


  선배가 미리 알아봐 둔 회사 근처의 라멘집으로 향한다. 할 말을 생각하는데 선배가 먼저 말한다.

  "네가 힘들 거란 거 알아. 사람 때문에 힘들겠지. 내가 볼 땐 너는 일은 재밌어하는 거 같아. 그렇지? 고민할 시기야."

  "사람 때문에 힘들기도 한데요, 그건 일부입니다."

  "또 뭐, 급여? 급여가 짜긴 하지. 근데 그건 차차 나아져. 다들 여기서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잖아."

  "그것도 일부이긴 한데."

  "내가 볼 땐 너는 사람 때문에 힘든 게 제일 큰 거 같아. 다 알아, 네가 팀원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그것도 그런데, 그것 말고도…"

  라멘집이 있던 자리엔 분식집이 들어서 있다. 선배는 분식집 앞을 계속 서성인다. 그러면 분식집이 다시 라멘집으로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근처에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태국 음식점에 들어간다.

  "아무튼 지금 고민이 많을 시기인 건 분명해. 나도 그랬으니까. 지금까지 너무 나만 말했지. 나도 너와 똑같은 걸 겪어서… 얘, 저거 봐."

  옆자리 손님이 볶음면을 받아 들고 있다. 선배가 그들에게 말을 건다.

  "이게 뭐예요? 볶음면 추천해요? 너무 맛있어 보인다."

  곧 우리 몫의 볶음면과 쌀국수가 나온다. 선배가 먼저 맛을 보곤 여긴 맛집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앞접시에 볶음면을 수북이 담고선 내게 건넨다. 쌀국수의 소고기도 건져 준다.

  "선배, 여기선 먹는 데 집중하고 이따 커피나 마시면서 더 얘기해요.”

  “지금 얘기해도 돼. 이제 진짜 들을게.”

  “저도 이게 입맛에 맞아서요. 지금은 빨리 먹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렇지? 그럴까, 그럼.”

  그렇게 국수를 먹고 있자니 우리 바로 등 뒤에 있는 좁은 통로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줄을 섰다. 우린 금방 식사를 마쳤다. 선배는 아직 식사를 하고 있는 옆자리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오며 말한다.

  “저분들이 학생이었으면 내가 대신 결제라도 해줬을 텐데.”


  익숙한 맛의 커피를 사이에 두고 고민을 나눈다. 팀원 간 갈등이 있다. 많이 일하는 사람과 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인정받는 사람과 덜 인정받는 사람이 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일을 하고 싶기도 하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도 분명히 있는데.

  “선배는 왜 그만두지 않았어요?”

  어느새 털어놓고 있는 그녀의 힘들었던 옛 시절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보기보다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야.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는데, 결단을 내리지 못했어. 일이 재밌기도 했어. 그게 컸지. 내 기사로 인해 무언가가 바뀌고 사람들이 반응하는 게 너무 좋았어. 아이가 생긴 후로는 많이 달라졌어. 지금은 가족 때문에 일하는 게 커.”

  다 마시지 못한 커피를 두고 카페에서 나온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선배는 나름 아껴뒀을 말을 꺼낸다.

  "근데 너도 마냥 좋은 후배는 아니야. 너 표정에서 싫은 티 다 드러나. 선배 입장에선 얘가 나 무시하나 싶다니까."

  "일부러 그럴 때도 있어요."

  “봐봐, 너도 이상해."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마음이 좀 가벼워졌습니다.”

  그건 진심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솔직하고 객관적인 얘기들을 많이 해줬다. 나 혼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관점에서의 얘기였다. 한 후배가 선배는 왜 그만두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분명 이유가 있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선배와 회사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도 그간 정답 없는 고민으로 지새웠던 수많은 불면의 밤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웃음이 나온다. 미소로 번진 웃음은 그러나 비웃음으로, 자조 섞인 헛웃음으로 바뀌다 사그라든다.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한 거네요, 선배. 떠나고 싶지만 기대고 있군요. 저도 떠나고 싶어요. 다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더 늦어지면 안 될 거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이 도망의 다른 이름은 아닐지.


  퇴근하는 길에 크리스피 오리지널 도넛 반 박스를 샀다. 내일은 주말이다. 집에서 도넛 두 개를 집어 먹곤 씻고 TV를 틀었다. 늦게 들어온 동생과 넷플릭스로 기묘한 이야기를 봤다. 이제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한다. 잠깐 오늘은 꼭 사려했던 문제집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자는 동안엔 많은 것을 외면할 수 있단 사실에 안도하면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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