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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Nov 07. 2023

일기장 한 권을 채우다.

마침내, 20년 만이군


매년 이맘때면 서점에 일기장이 깔리고 나는 자주 유혹에 빠지곤 했다. 연말연초의 분위기에 이끌려 호기롭게 한 일기 쓰기의 다짐은 새봄이 오기도 전에 시들해졌고, 쓰다 만 일기장들은 짐 정리를 할 때마다 애매하게 버려졌다. 일기 검사를 하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는 한 번도 한 권을 다 채워본 적이 없다. 결국 어느새부턴가 서점 문구 코너를 기웃거리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다 올해 처음으로 일기장 한 권을 다 썼다. (20년 만이네!) 빼먹은 날도 있지만 내 글씨로 마지막 장까지 가득 찬 노트를 보니 이만하면 새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비법(?)이라면 하루의 마지막이 아니라 일어나자마자 쓰는 것이다. 새벽 시간은 저녁보다 지키기 수월한 것은 물론 정신 상태도 가장 맑다. 이른 아침에 뭔가를 읽거나, 공부하는 등 새로운 인풋을 넣는 건 많이 실패했는데 일기 쓰기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저널링은 지난 하와이 여행에 가서도 챙길 정도로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와이에서의 아침 일기장. 여행용 개완 세트와 함께


쓰는 시간이 바뀌면서 쓰는 내용도 달라졌다. 돌이켜 보면 예전에 억지로 일기를 쓰려 노력했을 땐 흘러가는 하루가 아까워 그날 있었던 일을 최대한 자세히 기억하고 싶은 동기가 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쳇바퀴 돌 듯 비슷한 학교, 직장 생활에서 적을 만한 별다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오늘 뭘 먹었는지가 일기의 주된 내용이 되곤 했다.  


반면 아침 일기의 내용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것이다. 일기를 쓰는 시점, 눈 뜨자마자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적는다. 어디선가 '머리로 생각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이 이끄는 대로 쓴다'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꼭 맞는 말이다. 말 그대로 아무 꾸밈이 없는 글이다. 누군가 볼 수도 있는, 보여주기 위해 적은 SNS의 글과는 다르다. 논리도 없고 문장 구조도 엉망이며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때도 있지만 여과 없이 적어 내려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날것의 나와 마주하게 된다.


꿈을 자주 기억하는 편이라 방금 전까지 경험했던 꿈으로 시작하기도 하고, 전날 있었던 일 중 흘려보내지 못한 채 남아있는 일을 자연스레 적기도 한다. 유리컵에 막 담은 흙탕물처럼 부유하던 생각들, 혹은 나도 모르게 꽁꽁 숨어있던 감정들이 쓰는 행위를 통해 또렷해진다. 활자로서 실체를 갖게 되고 나면 조금 가벼워진다. 가끔 몰랐던 나의 진심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기 쓰기는 명상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기를 다시 쓰기로 마음먹었던 건 연말에 봤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덕분이다. 심리치료사인 필 스터츠는 삶의 원동력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나의 몸 - 사람들 - 나 자신과의 관계를 순서대로 정비할 것을 제안하는데 그중 마지막 단계인 자신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법으로 일기 쓰기를 추천한다. 다시 찾아본 그의 말. 일기장 한 권을 채우고 나니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글을 쓰면 나 자신과의 관계가 좋아져요. 대체 뭘 쓰냐고 묻는 분들도 있죠. 자긴 재미도 없고 작가도 아니래요. 다 상관없어요. 글쓰기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요.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죠. 일기 형식의 글을 쓰다 보면 본인도 몰랐던 것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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