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에이를 사로잡은 쿠바 이민자 가족의 '할머니 레시피'
신당동에 떡볶이 좀 하시는 '마복림할머니', 장충동에서 보쌈하시는 '뚱뚱이할머니', 황학동 곱창골목의 '안경할머니'가 계시듯… 엘에이에도 요리왕 할머님들이 여럿 계신다. 간판에 Grandma's Deli(할머니 델리)라고 쓰여있고, 메뉴판에 Grandma's recipe(할머니의 레시피)라고 쓰여있는 걸 보며 남편이 여기 분들도 할머니 참 좋아하신다고 허허 웃을 정도.
한국 음식은 양념맛이 중요한데, 이곳의 요리는 재료의 조합으로 승부하다보니 같은 맛을 내려면 레시피를 정확히 따라야 한다. 그래서 미국에는 어려서 먹고 자란 집밥의 맛을 재현하기 위해 레시피를 대대손손 간직하는 문화가 있다. 엘에이 사람들 또한 음식을 설명할 때 할머니 레시피를 자주 언급한다. 마케터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나는 이걸 할머니 브랜딩이라고 부른다. 똑같은 타말레도 할머니 레시피로 만들었다고 하면 더 맛있을 것 같고, 똑같은 빵도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구워냈다고 하면 더 손이 가니 말이다.
엘에이를 대표하는 유명한 베이커리 체인 PORTO'S(포르토스) 역시 이 할머니 레시피로 대박 친 가게다. 포르토스의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로사 할머니의 빵이 입소문을 타며 빵집까지 차리게 된 것. 로사 할머니의 성 포르토스를 딴 에코파크(Echo Park)의 작은 베이커리는 지금은 엘에이 지역에 6개 매장을 둔 랜드마크 체인으로 성장했다. LA타임스가 꼽은 '남캘리포니아 최고의 베이커리' 타이틀에 이어, Yelp(미국 맛집 정보 대표 사이트)에서 '미국에서 먹어봐야 할 Top 100 레스토랑'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한 전국구 맛집. 할머니 레시피로 삼대가 먹고 사는 셈이다.
오래된 만큼 버터냄새가 켜켜이 밴 낡은 매장을 예상한다면 반전이 있다. 현대식 인테리어의 넓은 공간이 한국 백화점 푸드코트 못지않다. 매장 내에 교차하는 테마는 old and new. 진열장의 유리는 번쩍이지만 벽에는 포르토 가족의 오래된 가족사진들이 걸려있다. 소박했던 이민 1세대 가족이 세워낸 패밀리 베이커리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아침 6시 반 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는 포르토스 매장에 가면 맛도 맛이지만 가격경쟁력에 한번 더 놀라게 된다. 커피 한 잔 7불에 20% 팁을 받는 엘에이에서, 매장에서 먹는데도 팁을 받지 않는 건 충격이었다. 전통과 맛,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는 점에서 한국의 성심당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한다. 엘에이 로컬 중 포르토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에는 미국 타주에서 놀러온 친구에게 엘에이 어땠냐고 물었더니 포르토스 먹었다는 답변이 오기도 했다. 기분좋게 쓰고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데 안 올 이유가 없다.
베스트셀러인 치즈롤(Cheese roll)은 고소한 치즈 필링의 손바닥만한 패스츄리인데 단짠의 조합이 귀신같아서 두 세 입이면 사라진다. 줄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여러 개 사서 싸 가게 된다. 새콤달콤한 구아바 잼과 망고 같은 열대과일을 사용한 베이커리도 이곳의 스페셜티다. 매장 한쪽에서는 식사메뉴도 제공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훌륭한 쿠바 가정식을 먹을 수 있다. 아침으로는 타말레를 추천한다. 남편이 좋아하는 큐반 샌드위치는 매콤한 킥에 짭쪼롬함 베이컨 맛이 더해져 김치볶음밥같은 맛이 난다. 나는 브렉퍼스트 샌드위치, 그 중에서도 아보카도와 계란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계란과 치즈, 아보카도, 그리고 버터리한 크루아상으로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할머니 집에 가면 꼭 집에 가는 길에 김치며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셔서 들고 올라오곤 했다. 포르토스를 나오는 사람들 역시 양손 가득 커다란 노란 박스를 들고 나온다. 엘에이 사람들이 딱 보고 거기 박스! 라고 하는 이 노란 박스는 포르토스의 상징. 커다란 박스에 빵을 가득 포장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가 챙겨주시던 명절음식 생각이 난다.
모든 가족들이 할머니 레시피를 가지고 있진 않다. 한국에 계신 나의 할머니만 해도 레시피 같은 건 절대로 적어놓지 않으시는 데다 옆에서 좀 가르쳐달라고 하면 꼭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셔서 나를 아리송하게 하신다.
'국에 들어갈 무는 이렇게 숭덩숭덩 썰어야 맛나' (이렇게 써는 게 어떤 건지..?)
'나물은 너무 슴슴하면 맛이 없어!' (그럼 어느정도로 간을 해야 하는지..?)
그런데 신기하다. 레시피는 없지만 할머니 음식을 먹으면 느낄 수 있다. 자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 열 명의 할머니가 만든 음식은 열 가족의 역사다. 할머니 레시피, 혹은 손맛, 아니 할머니의 사랑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네 할머니들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