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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chard B Nov 21. 2024

16_자존감 회복일지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춥고 어둡다는 말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춥고 어둡다'라는 말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그 가장 춥고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걸어와야하는 고독함과 그 쓰라림에 장시간 노출되어야했던 지난 날의 삶과 그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저 볕 잘드는 정오시간 즈음을, 새 생명이 싹트는 완연한 봄이라던가 초록이 동색임을 만인에게 알리는 뜨거운 여름을 지독하리만큼 갈망한다. 


한껏 낮아져있는 자존감을 회복하기위한 사투를 십 수년째 해오고있다.

나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한다거나 괜한, 쓸모짝에 없는 소리로 스스로를 낮추는 일을 일삼아오던, 자기학대와 혐오가 짙게 깔린 일상은 나의 일부가 되어 퍽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 중 하나가 되었으며 스스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거나 당연히 남들보다 못난 구석을 굳이 발견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성미를 가진 내 모습을 또 하나의 자아로 받아들여야만하는 고통스러운 번민을 벗어내고자 끊임없는 사투를 벌여오던 지난 날들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간혐오에 걸려 온갖 인간 군상에 치를 떨다가도 어디하나 나보다 잘난 구석을 갖춘 누군가를 구태여 찾아내 그를 동경하고 그 모습을 열망하며 또 다시 나를 아프게 하는 생각들로 잠에 빠져드는 것이 매일밤이었던 시리고 아픈 삶, 이 축축하고 차갑게 나를 감싼 멍에가 언제나 벗어질런지 그 저 손가락 세아림으로만 헤아려온 밤들을 벗삼아 자의적 쓸쓸함에 절어있던 나의모습을 조금씩 내던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종의 이유로 걸려버린 인간혐오는 스스로를 가둔 어떠한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한 꽤나 좋은 수단이었다.


한 사람이있다. 어쩌다 알게된.


첫 인상부터 내가 원하는 외적인 조건을 고루갖춘 그를 보며 참 부럽다 생각하며 저런 겉 껍데기를 갖춘 저 이는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 느낌으로 하루 하루를 지낼지 상상하며 그러한 우월한 유전자라거나 고루 갖추어진 삶의 조건을 내 육신과 삶에 전해주지 못한 나의 유전자의 발원지를 지독히 원망했던 적이 있더랬다.


저 오똑하고 잘 선 코로 들이쉬는 공기는 더욱 청정할 것 이며, 별이 박힌 듯 총총하며 또렷하게 각인된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더욱 밝을 것 같았다. 위로 뻗은 듯 큰 키로 맞이하는 '위쪽 세상'의 온도는 더욱 따뜻할 것 만 같았으며 태가나는 몸매는 거적을 둘러도 멋들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한 대상이 나의 일상생활의 반경에 들어와 매일을 함께 맞닥뜨리게되며 언젠가부터 나의 인간혐오증의 대상 중 하나가되어 그를 뒤틀린 시각과 촉각으로 마주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생각보다 이기적인 모습, 예상보다 허점투성이인 성격 그리고 그저그런 지구 상에 붙어사는 수 억의 삼십 대 남성 중 하나. 환상을 깨는 이런저런 모습들을 마주하며 오히려 내가 더 나은점을 찾게되었고 그러면서 겉 껍데기가 주는 그의 우월한 모습을 한 낯 허상에 불과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나는 자기 번민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신의 존재라던가 그의 인간사 개입에 대한 의문과 반감을 지독히 품고있다가 이러한 이유로 신의 존재 그리고 그의 공평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신은 공평하다.' 그가 존재한다면 꽤나 공평한 것 같다.


나의 낮은 자존감을 남의 부족한 부분들을 거울삼아 회복하는 것이 치졸하고 지저분한 짓 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모자란 생각을 의식적으로 이어하면서 나 까짓 생명체에도 대상과 비교해 뭐 하나 쯤은 우월함이 있음을 사소하게 발견하기 시작했다.



다소 슬프고 억울하기까지 한 자존감 회복일지의 첫 시작이다.

나를 나로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귀히여기지 못함이 슬프다. 왜 하필 내 일상의 반경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인물을 뒤틀린 시각으로 바라보며 나의 모자람을 채우려고 하는지 그 더러운 욕구에 욕지기까지 잘 지경이다.


그러나 또 한 번 내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는 내가 이런 생각과 그를 향한 뒤틀린 시각으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을 모를진데 나의 차가운 우주를 덥히기 위해 그 뒤틀린 시각을 올바르게 고치려는 노력조차 거두었다.


나의 음흉한 시선과 그의 부족함을 캐내려는 나의 지저분한 관음증은 나의 자존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그는 알까. 


몰라야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미안함이 들어 필요이상으로 상냥하게 대해준다거나 더욱 따뜻하고 섬세한 말 마디를 건넨다. 


또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나의 자존감이 어느정도 회복이 된다면 이런 치졸한 짓은 그만두고 나 스스로를 존재 자체로서 귀히여기자, 이런 도움닫기는 그만 멈추어보자. 


그래, 내가 나를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봐줄 수 있을 때 그와 다른 주변인들을 진정으로 귀하게 여길 수 있을테니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도라 생각하며 잠시만 그를 이용하자.


언젠간 정말로 완벽에 가까운 인류를 마주한다면 그 마저도 시큰둥하게 바라보며 콧웃음을 칠 수 있을 그 날을 떠올려본다.


'신은 공평해,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우리 모두 한 번 살고 죽는 인생이야.'

이러한 시니컬함을 언젠간 자유자재로 내뿜길 기도하며 약간의 자존감 회복에 대한 일지를 다시금 써내려가본다. 더불어 나의 자존감 회복과 축축하고 암울한 멍에를 던져버리는데 다른 희생양이 포착되지 않길 기도해본다. 


가련한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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