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길을 걷다 발을 헛디뎠거나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넘어지면, 통상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재빠르게 벌떡 일어나서 가던 길 가는 사람과, 주위 사람들 다 듣게 "아이고오~" 소리를 내면서 민망함을 헛웃음으로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나는 후자다. 오늘은 자빠진것만큼이나 민망했던 일이 있었어서 잊기 전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자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집에 왔다. 동네 사람들, 나 오늘 너무 창피했다우.
오늘 초등~중등학생들 대상으로 기사와 취재에 대해서 간단히 강의할 일이 있었다. 보통 강의 요청을 받으면 20대 중반, 특히 기자 지망생 대상인 경우가 많았는데 초등~중등생은 처음이었다. 검색할 일이 있으면 네이버가 아닌 유튜브부터 켠다는 세대. 신문이 뭔지, 본적은 있을까? 기자가 뭐하는 사람인줄은 알까? 마치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쳐줘야 할 것처럼 막연했다. 평소 쓰던 강의 PPT에서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간단하게 개비했다. 취재 사례 같은것도 디테일하게 풀기는 어려울테니 학창시절에 어떻게 공부했는지 경험담 쪽에 좀 더 포커싱을 맞춰서 썰이나 풀고 오려고 했다. 여러분 책 많이 읽으시라, 배경지식을 다양하게 쌓으시라, 지금 여러분의 학습 능력은 스펀지와 같아서 나중에 고등학교 대학교 공부 할 때 두고 두고 도움이 될 것이다.. 같은 말들을 틈틈이 연습했었다. 현우진 선생님 말투를 흉내내면서 약간의 잘난척을 가미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강당에 도착했는데 대부분 학생들 옆에 학부모님들이 앉아계셨다. 어허라. 이러면 너무 가볍게만 하면 안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잘난척을 가미한 농담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혼자서 연습했던 것의 절반 정도가 그건데, 그걸 빼면 뭘로 채우지??? 머릿속이 난리가 났다. PPT가 겨우 세 번째 장, 그것도 내 소개를 하는 수준이었는데도 이미 땀이 뻘뻘 나고 목소리가 염소소리처럼 떨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안면마비 후유증으로 아직 어색한 얼굴을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던 게 문제였을까? 산소 공급이 좀 덜 되어서? 대중앞에 너무 오랜만에 서서? 아마도 이 모든게 합쳐져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씩 뒤로 가면서 염소소리가 덜 났는데 (옷이 흠뻑 젖도록 땀은 계속 흘렸다) 어찌됐건 준비했던 내용들을 풀어놓으면서 스스로도 편안해진 것 같다.
학생들이 너무 따분한 얼굴로 앉아있을까봐 질문을 유도하려고 번역서 '여자전쟁'을 3권 들고 갔었다. 질문 주시는 분들 선착순으로 드린다고 사전에 공지를 했어서 그랬는지, 다행히 열심히 손을 들어줘서 그것도 고마웠다. 운전하고 돌아오면서 '아 이렇게 답변했어야 하는데' '요런 부분을 더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지 5시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경청해주셨던 분들의 눈빛이, 끄덕거리던 얼굴이 계속 떠오른다. 대중 강연을 할 때마다 '나는 정말 소질이 없구나. 다음에는 절대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요청을 받으면 고새 까먹고 '이번엔 저번보다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합리화를 하며 자꾸 응하게 되는 것도 이런 흥분감때문인가보다. 혹시 다른 기회가 또 온다면 진짜 잘해야지. 문장 중간 중간 쉬는 템포까지 달달 연습해서 가야지.
ㅋㅋㅋ 오늘 강연의 주제는 '기승전결'이었는데.. 전혀 기승전결이 없는 글을 적게 되었다. 뭐, 이건 기사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