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산다> 한혜진의 ‘디지털 런웨이’를 보며
코로나19가 준 물음, “네가 뭔데?”
코로나19 사태가 이렇게 나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2020년은 벌써 절반의 타임라인을 향해 달려가는데 여전히 곳곳에서는 눈물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잡힐 듯 말 듯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는 확진자의 숫자는 모두의 마음을 애태우며 쉽사리 진화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나 역시 개인적인 마음고생을 했다. 근무하는 카페에서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줄였다. 당연히 손에 쥐어지는 월급 또한 터무니없는 액수로 곤두박질쳤다. 애초에 버는 것도 얼마 없었지만 그마저도 사라지니 숨이 헐떡인다.
사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곳을 나와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미 게을러진 몸뚱이는 현실을 외면해왔다. 코로나 19는 이렇게 안주하는 자아의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그래, 죽을 만큼 힘들어서 빠져나왔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괜찮아졌을 거야. 다시 해보자, 기자 일! 돈도 벌어야지, 이 인간아!’
이런 내 속을 어떻게 알았는지 고맙게도 일자리 제안들이 들어왔다. 심란해진 마음을 모른 체하고 답을 했다. “나 면접 볼래!” 하지만 그 며칠 사이 회사들은 코로나 사태로 상황이 어지러워 채용 자체를 보류하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그렇게 돈도, 일자리도 모두 놓치고 있었다. 이놈의 병이 뭔데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건지 분하고 속상했다.
한혜진의 고독한 프로젝트, ‘디지털 런웨이’
최근 방송한 MBC <나 혼자 산다> 속 한혜진의 에피소드는 이런 나의 생각을 뒤바꿨다. 한혜진은 F/W 컬렉션이 취소된 상황 속 100개의 룩을 입고 워킹을 하는 ‘디지털 런웨이’를 펼쳤다. 컬렉션이 취소되면 디자이너들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주된 경로가 막힌다. 바이어들은 디자이너의 옷을 살 수 없어 일을 잃는다. 비단 두 직종을 제외하고도 패션과 관련된 수많은 직업군이 눈물을 흘리게 됐으리라. 한혜진은 이렇게 침체된 패션계에 조금이라도 활력을 주고자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혜진은 디자이너들에게 보낼 공문을 직접 작성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소속사를 설득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판을 벌였지만 녹록지 않은 과정들은 아직 남아있었다. 입어야 할 룩은 300피스인데 제한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아무리 옷을 갈아입어도 남은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마음만 애탔다. 다리는 쥐가 나 휘청댔다. 심지어 한혜진은 고된 일정에 자신이 쓰러져 특정 디자이너의 옷은 선보이지 못하게 될까봐 디자이너당 하나의 룩씩 돌아가며 보여주는 구성을 짰을 정도로 이 일이 힘들 거란 걸 예상했지만, 현실은 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욱 극한이었다. ‘괜히 했다’ ‘포기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프로젝트.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주변은 그를 말렸다. 즉 오롯이 한혜진의 소신으로 추진된 일이다. 이런 일들은 대개 외롭다. 정말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동시에 고독한 싸움이기도 하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밑전이다. 포기하거나 생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것 봐라, 안될 거라고 했지?’라는 예언가들이 주변에 그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탓할 수 없다. 후회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메워도 나를 붙들어줄 사람이 없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까. 내가 주변 사람들까지 동원해 판을 벌렸으니까.
더욱 미칠 노릇인 건 또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도움 하나하나가 간절해져 주변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책임감은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온다. 먹는 것부터 시작해 일에 필요한 장비 등까지 많은 것에 사비를 털어야 하며, 혹여 이 일이 잘못됐을 때 나로 인해 모두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코로나19 사태’ 뒤집은 순수한 열정
그런데도 한혜진은 이 모든 수고로움을 감수했다. 쓰러져가는 정신력을 붙잡고 또 붙들어 매 결국 100가지 룩의 디지털 런웨이를 완성했다. 눈물이 났다. 힘든 난관을 이겨냈다는 스토리가 주는 감동이 아니라 한혜진의 순수한 열정이 마음을 건드렸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멋있다’라는 표현이 그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게 속상할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대단했다.
무언가를 얻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하고 싶어서, 재미있어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들은 단순한 성취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누가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믿고 해 보겠다는 무모함이,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함을 지닌 자신감이 그 가치를 만든다. 데뷔 20주년을 지낸 베테랑 모델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시작했다. 선명한 것이라고는 하려는 일의 의미뿐. 한혜진은 이 하나를 믿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쏟아부었다. 이번 프로젝트가 패션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몸 담은 업계에 위기가 닥쳤을 때 발 벗고 나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안다. 시도 자체만으로도 큰 움직임이 되어 긍정적인 파장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아, ‘경력’이라는 재능의 두께는 이렇게 쓰여야 빛이 나는구나. 어떻게 보면 젊은 시절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이유는 이런 고독한 프로젝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정작 그것을 내 욕심만큼 구현해낼 수 있는 건 이상뿐인 생각이 아니라 현실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애증은 한혜진의 순수한 열정을 만들어냈고, 이를 뒷받침한 건 다름 아닌 한혜진의 업적과 실력이다.
현실은 생각과 다른 것임을 또 한 번 깨닫지만,
그럼에도 드는 생각은 내가 자기 전에 누워서 하는 생각이 현실이 되려면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과
결과물로 가는 과정에서 궤도가 약간 수정돼도 본래의 취지만 훼손되지 않는다면
일의 마무리를 꼭 한 번 지어보는 것이 좋겠다.
- 한혜진이 소속사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보낸 문자
“네가 뭔데?”라는 질문의 답, ‘내가 뭔데’
우스갯소리랍시고 모든 게 코로나 19 탓이라고 처지를 투덜댔던 이 어리석은 나 자신아.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회를 잃었을지언정 결국 일을 하고 선택을 하고 의미 있는 발걸음을 만들 수 있는 주체는 결국 나인데, 나는 대체 어디에 나의 미래를 떠맡겼던가. <나 혼자 산다>에서 한혜진은 소속사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네가 뭔데’라고 했던 발언이 논란을 야기하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고자 했던 일에 스스로 합당한 명분을 찾고 그 힘을 원동력으로 추진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20년을 함께 일한 가족 같은 회사라 ‘네가 왜, 왜 그렇게 힘든 일을 자처해’라고 충분히 걱정할 수 있다”
아, 정말 끝까지 멋진 사람. 프로젝트가 지닌 의도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아 생긴 오해에 대해 한혜진은 이토록 본질을 꿰뚫는 단단한 생각을 내놨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 다른 결과를 낼 수 있게 만드는 연속적인 점이 되어야 한다. 이 무수한 점들은 ‘나의 일’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쓰는 데 에너지를 할애하는 대신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더 집중하는 자세를 이끈다. 할 수 있다는 확신보다 해야만 한다는 소신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선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만들어주는 도전정신의 한 획이 된다.
한혜진은 ‘디지털 런웨이’를 기획하게 된 배경에 대해 “겉모습으로 일하는 직업이라 남들한테 도움을 줄 수 없어 속상했는데 이번에 뭘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부단한 노력을 해 최고가 되었기에 지금의 프로젝트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미 자신뿐만이 아닌 타인을 위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던 셈이다.
나 역시 순수한 열정으로 ‘나의 일’을 하며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단 코로나19 사태에 국한된 바람만은 아니다.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해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나아갈지 또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제일 힘들겠지만 그만큼 제일 중요한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이들에 감사한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흔들리지 않는 ‘나의 일’이란 무엇인가 되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