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 릴리스
셀린 시아마의 데뷔작 '워터 릴리스'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들로부터 내 세계를 구축한다는 감독의 확고한 영화적 감수성을 보여준다. 감독은 15살 소녀 세명을 구심점으로 삼고 그 안에 싱크로나이즈라는 역동적인 메타포를 넣음으로써 영화 안팎의 야성 어린 시선을 차낸다. 그러니 여기엔 어른과 남자의 세계가 철저히 생략되어 있다. 성장기에 맞이하는 모든 처음에서 오는 불안함을 수면 아래의 고통스러운 발장구로 그려낸 '워터 릴리스'는 10대 소녀에 대한 관습적인 예술적 소비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게 셀린 시아마는 10대 소녀에게 씌워진 환상과 신비의 장막을 거두고 그들의 원초적인 욕망과 사랑의 발흥에 앵글을 맞춤으로써 관객의 공감과 투영을 이끌어냈다. 그러니 그녀의 데뷔작 '워터 릴리스'는 불씨이다. 되짚어보니, 타오르고 있다.
파리 외곽의 시골. 이제 막 15살이 된 마리(폴린 아카르)는 싱크로나이즈 대회를 관람한다. 수중 발레부 부장 플로리안느(아델 에넬)에게 매료된 마리는 수중발레부에 들어가 플로리안느와 함께 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마리의 친구 안느(루이제 블랑쉐르)는 수영복 탈의실에서 자신의 알몸을 본 수영부 남학생 프랑스와와 첫 섹스를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프랑스와는 성숙하고 자유로운 매력의 플로리안느와의 섹스를 고대하며 안느의 구애를 외면한다. 한편 마리와 플로리안느는 서로의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가까워지고 플로리안느를 향한 마리의 첫사랑이 시작된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플로리안느는 마리에게 자신은 한 번도 섹스를 해본 적이 없다며 프랑스와와의 관계 전에 자신의 첫경험을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다. 내 것이기에 정형화될 수 없는 모든 처음 앞에서 이 물비린내 나는 청춘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워터 릴리스'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데뷔작인 동시에 플로리안느역의 아델 에넬을 제외한 두 주인공들의 데뷔작이자 첫 연기이다. 영화의 결에 맞는 순수함과 서툰 감성을 가진 신인 배우를 원한 감독은 실제 그 나이 때의 소녀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파리의 공원에서 놀고 있는 폴린 아카르를 발견한 셀린 시아마는 그녀를 성장이 느리고 수줍은 마리 역에 캐스팅했다. 루이제 블랑쉐르는 잡지에 난 배역 광고에 서신을 보내 또래와는 다른 외모와 독특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안느 역에 발탁되었다. 이처럼 첫경험은 '워터 릴리스'의 안팎에서 중심축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상징적 시도가 그러하듯, 셀린 시아마는 세련된 기술이나 원숙함이 아닌 원초적인 창의력과 열정으로 인물과 주제에 관한 디테일을 정면으로 거론한다. 그러니 '워터 릴리스'의 첫경험은 고통이나 환상의 실현이 아닌, 그 순간을 관통하는 실존적 문제이다.
셀린 시아마의 청소년기는 감성적 갈망과 성적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마리가 싱크로나이즈에 매료된 것은 그것의 메타포가 수면 위의 고결한 백조 무리, 즉 또래집단에 끼고자 하는 갈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느가 자신의 수중발레팀으로부터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그곳에 계속 머무는 까닭도 그렇다. 수중발레에 대한 마리의 갈망은 그 집단의 리더 플로리안느에게 자연스럽게 번져가고 경외와 사랑의 경계에서 마리는 플로리안느가 버린 사과를 훔쳐 먹는다. 의미심장한 것은 동화와 충동이 인물 간의 대사가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마리는 사과를 훔쳐먹고, 안느는 프랑스와의 집 마당에 브래지어를 묻고, 플로리안느는 성적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렇듯 10대의 자의식은 언어보다는 상대와 나의 몸짓에 의지한다.
그러나 그 몸짓에 동성애나 첫경험만이 맴도는 것은 아니다. 셀린 시아마는 플로리안느를 통해 아름다운 여자가 맞이하는 비극을 보여준다. 플로리안느의 자의식은 성적 대상화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들은 욕망하고 여자들은 시기하거나 숭배한다. 플로리안느는 타인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는 게 최선이라고 여기며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녀에게 첫경험은 얼른 해치워버려야 하는 생기 없는 물리적인 행위지만 막상 마리가 그 부탁을 들어줬을 때는 눈물을 흘린다. 가장 내밀해야 할 기쁨마저도 타인의 기대에 맞춰야 하는 자기 상실감이 그 눈물에 일렁인다. 영화 후반부에서 플로리안느는 마리와 키스 후에 '프랑스와가 나쁘게 굴면, 날 데리러 와줄 거야?'라고 묻는다. 이 장면은 마리가 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애무하던 플로리안느를 구하러 간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플로리안느는 자신을 향한 마리의 마음을 알지만 여전히 깊은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마리를 도구화할 뿐이다. 그리고 마리를 떠나 영화 초반의 파티에서 그랬던 것처럼 관능적으로 춤을 춘다. 그러니 그녀는 언제나 내러티브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그건 이 시대가 소비하는 아름다움에 주어진 형벌일지도 모른다.
관계에 이르지 못한 것은 마리와 플로리안느만이 아니다. 플로리안느와 섹스를 하지 못한 프랑스와는 욕구를 풀기 위해 안느를 찾아간다. 안느는 그를 받아들이고 첫경험을 하지만 프랑스와는 결코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는다. 이렇듯 극이 진행될수록 관계는 어긋나고 욕망은 좌절된다. 안느와 마리의 우정 역시 무사할 수 없고 마리의 상처 받은 자존감은 안느에 대한 이기적인 무정함으로 표출된다. 영화의 끝에서 마리가 텅 빈 수영장에 몸을 던진다. 마리는 추락하듯 잠기지만 이내 힘차게 수면 위로 올라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안느와 마주친다. 이렇듯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허무에 젖은 관성이 아니라 상처 위를 부유할 수 있는 힘이다. 아무 말 없이 물 위를 부유하는 두 소녀와 파티에서 춤을 추는 플로리안느가 오버랩된다. 가슴 아프게도, 누군가의 초상은 공허한 회귀를 반복한다. 틴에이져 무비의 산뜻한 청춘이나 첫사랑은 이 곳에 없다. 고통스러운 자의식과 좌절된 욕망이 난폭하게 마음을 쑤시는 '워터 릴리스'에서는 물비린내가 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도 아니고, 성장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반추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그 순간에 선 불안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다.
'워터 릴리스'는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영화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신인 감독의 치열한 고민을 보여준다. 헐벗고, 다 쏟아낼 기세로 욕망에 몰두하는 10대 소녀들을 화면에 담는 것은 프랑스 영화의 클래식 아래에서도 도발적이다. 그러나 셀린 시아마는 그 대상을 어설프게 숨기거나 좁은 틈 사이로 훔쳐보지 않는다. 오히려 정공으로 부딪히되 앵글 안으로 어떤 해석도 가미하지 않는다. 좁은 탈의실 안의 벗은 소녀들은 때로는 서로를 의식하며 어색해하고,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래 여자애들에게 포착되는 현실이기에 외설적인 관음이 아니다. 또한 정형화되지 않은 인물들의 진실함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들추거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에로틱한 감상은 사라지고 관객은 세 소녀들에게서 자신을 목격하게 된다. 셀린 시아마의 첫 번째 족적은 이렇듯 필사적인 진실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셀린 시아마는 자신도 15살 때 싱크로나이즈에 압도됐었고 그 순간의 감정을 '워터 릴리스'에 녹아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 속 마리도, 셀린 시아마 본인도 수중발레 선수라는 이상향에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러니 싱크로나이즈는 내가 되고 싶었던 것, 혹은 내가 사랑했던 대상의 상징으로 결국 우리 모두의 10대에 각기 다른 형태로 존재했던 열망이다. 10대의 세계는 욕망하는 마음에 지배되기에 이 메타포의 심연은 보다 더 깊다. 싱크로나이즈 팀은 하나의 공동체로 그곳에 소속되어 같은 유니폼과 화장을 공유하는 것은 10대에게 심리적 안전지대로 작용한다. 또한 셀린 시아마는 수면 위와 아래를 구분하여 누구도 볼 수 없었던 수면 아래의 세계에 주목한다. 물 위의 수중발레 선수들은 화려한 화장과 미소로 품위를 유지해야 하지만 물아래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리가 목격한 수중발레 선수들의 발장구가 수중 위의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물 위의 소녀들은 공동체에 소속되기 위해, 그리고 이 사회가 기대하는 '소녀'의 품위를 지켜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너무도 다른 세 주인공들이 싱크로나이즈라는 공통분모 아래에 묶이는 것은 누구도 그 은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비춘다.
이는 '워터 릴리스'의 타이틀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영화의 프랑스 원제는 'Naissance des pieuvres'로 직역하면 문어의 탄생이다. 두 타이틀이 상당히 다른 어조임에도 의미의 결은 다르지 않다. 문어의 생물학적 의미는 수면 아래 고군분투하는 여덟 소녀들의 다리와 수면 위의 능숙한 위장술로 대치된다. 여기서 탄생이란 이제 막 욕망과 안정적인 생존에 눈을 뜬 10대 소녀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은유는 연못 위의 수련과 다르지 않다. 수련의 꽃잎은 물 위의 소녀들처럼 아름답지만 수중의 뿌리는 얽히고 설켜 오직 생존만을 위해 애쓴다. '워터 릴리스'의 미묘하고 문학적인 메타포는 이렇게 시각적인 실마리를 더한다.
'워터 릴리스'의 잔물결은 이미 완료된 기억 속 혹은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뒤흔든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그 시기의 가슴 아픈 자의식을 파고들면서 셀린 시아마는 어떤 해답도 내놓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늘 그랬다. 어떤 것도 풀리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변했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때로는 답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 세 소녀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라면 그 뒤에 다음이 따른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워터 릴리스'의 엔딩은 다음 여정의 오프닝 시퀀스이다. 그러니 마리와 안느, 플로리안느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