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 디자인 박물관
코펜하겐은 웬만한 곳은 다 도보로 해결할 수 있을만큼 귀여운 도시다. 굵직한 스팟을 찍고 이동하는 길에 들를 예정이었던 디자인 박물관. 그 곳으로 향하는 몇 번의 어긋남, 여러 번 헛걸음을 통해 코펜하겐에서의 여정을 만들었다. 그 어긋남이 선물한 기회들을 기록한다.
야심찬 발걸음을 앞세운 방문 첫 날은 임시 리모델링을 위해 휴관 중이었다. 일부러 굽이굽이 동선을 맞추어 돌아왔는데, 성난 다리를 두드리며 내일을 기약했다. 그 와중에 눈에 띄었던 첫 인상응 현재 진행중인 기획전의 주제 <Learning from Japan>이다. 영어 말하기 수업에서 반 고흐 관련 스피치를 준비할 때 처음 알았던 자포니즘, 우끼요에가 쭉 한가닥 해오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의 디자인은 여전히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속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었다.
예정된 일정이 수포로 돌아가자, 거리의 귀여운 것을 볼 여유가 늘었다. 도시 구석구석에 귀여운 것들이 이렇게나 가득 들어차있을 줄이야. 알록달록한 색채와 모양, 질감이 생활을 물들인 모습. 덕분에 코펜하겐의 귀여움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 플라잉타이거 코펜하겐
# 로얄코펜하겐
# 레고(LEGO)
이른 아침을 먹고 두 번째로 방문하는 날에는 개관시간을 잘못 알고 헛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렇게나 입성이 어려울 일인가 싶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로젠보그성에 들르게 된 것은 꽤 럭키한 차선책이었다. 성 앞의 정원에서 하늘과 호수가 데칼코마니처럼 마주한 풍경 속에 서 있었을 때 이게 지금 과연 현실인지 황당할 노릇이었다. 이 풍경에 감동하지 않을자 그 누구인가.
마알간 호수에 복사 붙여넣기 해버린 듯한, 이상하리만큼 쨍한 하늘의 색채가 노필터(no filter)라는 점은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서 지내다 온 나에게는 대단한 감동의 포인트였다. 민낯의 하늘이 항상 이렇게 시리다보니 좀처럼 위를 잘 올려다보지 않는 나도 심심하면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겨버릴 정도랄까. 로젠버그성 속의 아름다운 유물들은 한 점 한 점 뜯어봐도 질릴 틈이 없어 충만한 시간을 채웠다.
세 번째로 문을 두드린 날에서야 비로소 박물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관람 전에 기념품샵과 카페테리아에 들를 수 있었는데, 괜한 허기와 피로감에 우선 식사를 하기로 한다. 전반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테리아 에서는 다양한 drink와 샐러드, 오픈 샌드위치류를 팔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테이블에 놓인 꽃병, 커틀러리의 조화가 참 예뻤다. 혼자 식사하는 이도 매우 많고, 노부부가 천처언히 대화하며 낮맥하는 모습이 흔한 곳이다.
'Dagens Ratt'(오늘의 점심식사) 메뉴로서 요리를 시키고 칼스버그를 마시면서 디자인 잡지나 좀 볼까했더니 일본잡지가 꽤 많았다. 당연히 글자를 읽을 수 없으니 그림책을 훑듯 넘겨다보았다. 한편 여백의 미가 가득한(?) 오늘의 디쉬는 양이 아쉽지만 맛은 좋았다. 맥주를 조금 더 마시면 되지, 뭐.
중반부의 전시관에서 맞닥뜨린 북유럽 가구 군단은 내가 좋아하는 혜화역의 가구 갤러리 겸 카페인 <b2 Project>를 연상케했다. 거실의 패브릭 소파, 침실의 철제 독서 의자로 놓고 싶은 비주얼이 한가득이다. 단순히 디자인샵에서 노트나 만년필을 사고 싶어했던 니즈가 집을 채우는 가구의 영역으로 커버리지를 확장하기 시작했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붉은 조명과 자유로운 형태와 색이 인상적인 한 전시관에서는 미국에서 온 듯한 팀에게 한 남자가 열정적인 가이드를 펼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꽤 많은 작품이 있었는데에도 하나하나 다 설명하느라 꽤 길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도 슬쩍 도강하며 전시 공간을 누볐다.
전시의 마지막 즈음에 위치했던 공간에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제공한다.
"What do you hope to see in the field of design in the coming years?"
다양한 리플들이 포스트잇으로 빼곡히 들어차있고, 한국어로 적힌 귀여운 기념멘트도 많았다. 내가 적어 남기기에는 망설여졌으나 한번쯤 대답을 씹어삼키는 것만으로 정리가 된다. 낱장마다 적힌 위트넘치거나 심오한 답변들을 구경하는 것도 흥미롭다. (기억에 남는 대답 중 하나는 무려 "nothing")
나의 경우에도 한 가지 대답을 적는다. "Connecting the dots"
이제는 좀 진부하다지만, 꾸준히 새기는 메시지다. 점을 이으면 아무도 몰랐던 도형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세 번의 발걸음을 잇고 나니 꽤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물받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