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17코스 광령 - 제주원도심 올레
여행은 사실 특별한 행사는 아니다. 가고자 하는 열망, 목적지, 경비, 그리고 조금의 여유 시간만 갖추어지면 가능한 일이다(물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지만...).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까지가 많이 망설여지는 단계이긴 하나, 결심이 서고 나면 의외로 일은 쉽게 풀릴 수가 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뭔가에 홀리 듯 일사천리로 준비를 하고 가방을 싸고 출발하는 것이다. 여유롭게 쉬고 오는 여행이라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고 서두름이나 조급함도 덜 할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또 다른 목적성을 가지는 순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를 꼭 다 돌아보고야 말겠다는 조급함이 생기면 그때, 여행은 휴식이 아닌 목표가 되고 전투가 되기도 한다.
첫날에 들뜬 마음으로 마친 18코스(제주 원도심 - 조천 올레)와 둘째 날의 한라산 백록담 등반까지 마친 직후라 마지막 셋째 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끌어안고 눈을 뜬다. 걷는다는 행위가 목적이었지만 걷는다는 행위의 목적이 코스를 마치겠다는 목표가 되어 버린 거다. 지친 육체와 정신에 다시금 회초리를 휘두를 수밖에 없다. 하나의 목표가 고귀한 목적을 압도하는 순간, 조금의 망설임조차 가차 없이 내쳐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그러했듯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올레길 17코스(광령 - 제주원도심)는 16코스의 끝 지점(광령1리 사무소)에서 시작한다. 제주 올레의 상징이기도 한 간세(조랑말 이름) 표지를 보는 것도 이제 낯설지가 않다. 방금 세운듯한 깨끗한 간세도 낡을 대로 낡아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간세도 다 같은 하나의 상징으로 그만한 가치를 지닌다. 시작과 끝의 표식이면서 여행자의 지침 표식이기도 하다.
시작점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광경은 광령교를 따라 펼쳐진 깊고 웅장해 보이는 무수천의 장관이다. 무수천 상공을 나르는 새떼가 저만치 낮게 날고 있다는 것만 봐도 이쪽에서 저쪽 사이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비가 한참 오지 않아서 인지 천(川)이라고 하기엔 옹색할 정도로 물이 말라 있어 흡사 웅덩이인 것처럼 보인다.
내륙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첫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유난히 많은 비행기들이 낮게 깔려 비행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17코스 시작 부근이 제주 국제공항 활주로의 왼쪽을 끼고 북쪽 해안으로 뻗어있기 때문이다. 도착하는 다양한 비행기들의 무수한 배면을 보는 행운(?)은 덤이다. 다만, 이 지역 주민들은 비행기 소음으로 고통받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된다.
산과 들을 끼고 내륙의 자연을 감상하며 걷는 기분도 훌륭하지만 그 끝에 탁 트인 바다를 맞이하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륙을 걷는 장점이, 시야에 보이는 자연을 눈에 담으며, 진중한 무거움을 간직하는 느낌이라면, 바다를 마주두며 걸을 때 느끼는 강점은 내 안에 가뒀던 체증과 막힘을 확 풀어버릴 수 있는 통괘함 같은 게 있다. 가슴속에 무얼 그리 많이 담아두었는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직은 바다의 광활한 청량감이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7킬로 정도의 내륙을 거치고 나와 맞이하는 곳은 이우테우 해변이다. 쌀쌀한(이른 봄) 날씨에 드문드문 해변가를 걷는 사람들과 모래장난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 저 멀리 보이는 빨간색, 하얀색 등대. 폐부로 깊숙이 밀려오는 바다 냄새와 차분하면서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소리. 모든 것이 한 폭의 수채화와 음악이 깔린 전시회에 온 듯한 착각에 도취되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본다.
이우테우 해변을 지나 도두항을 향해 가는 길에서 잠시 추억의 시간을 만난다. 도두 추억애 거리. 그중에서 말뚝박기 조형물은 전혀 낯설지가 않은 추억의 한 자락이다. 지금도 동네 아이들은 이 놀이들을 하며 놀까. 오징어, 비석치기, 구슬치기, 딱지, 술래잡기, 말뚝박기 등... 잠시나마 주마등처럼 옛 추억들이 밀려왔다 사라진다. 학교 운동장, 골목마다 친구들은 저녁해가 저문 줄도 모르고 신나게 뛰어놀던 그때가 아련해진다. 같이 놀던 동무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들을 품고 도두항 끝자락에 위치한 도두봉(도돌 오름)으로 발길을 돌린다
도두봉(도돌 오름)에 오르면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은 비행기가 내리고 오르는 제주공항 활주로를 볼 수 있다. 떠나는 사람과 도착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 제주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다시 돌아갈 곳을 가기 위한 종착역을 향해가야 한다. 시작의 설렘은 어느새 끝의 아쉬움을 남겨야 할 곳으로 걸어가는 느낌이다.
도두봉을 넘어서 해안을 끼고도는 곳이 서해안로다. 좌측은 해안을 우측은 제주공항을 끼고 나아가는 길이다.
어느새 중간지점(어영소공원)까지 와버렸다. 중간지점이라지만 거리상으로는 3분의 2에 다다란 지점이다. 드넓은 바다를 끼고 해변을 걷는 동안 차가운 바닷바람에 옷깃을 여미기도 했지만 여민 속을 부여잡고 따사로운 정경들도 많이 담을 수 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쳐다보며 그네들이 가진 여유와 너그러움을 보았고, 공원 놀이기구에서 조잘대며 노는 아이들과 그걸 지켜보는 부모들의 시선에서 애정과 보살핌을 보았다. 그리고, 거친 바다를 맞으며 바위 위에서 낚싯대 하나 들이대고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들의 도전과 여유로움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치열한 경쟁에서 존재를 드러내고자 조급해하고 분개하곤 했던 사악함과 나약함을 반성해 보기도 하고 떨쳐버려야겠다 다짐도 해본다. 조금만 벗어나 보면 다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을 그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할 것처럼 왜 그렇게 옹졸하게 살아왔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이 주는 시간은 그렇게 내 생(生)의, 내 삶의 궤적을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져다준다.
용두암은 유명한 관광 포인트다. 초등시절 사회나 지리과목이었던가, 아마 그때 잠깐 본 기억이 드는 낯익은 장소다. 그리고 이후 실물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언제나 그랬지만 사진으로 접한 상징물들은 실물에서의 이질감으로 조금 실망을 한다. 사진에서 본 용머리의 웅장함을 기대했었기 때문이었지 않나 싶다. 그냥 웅장함보다는 자연이 빚어놓은 굴곡과 형태의 디테일함을 감상하는 정도로 만족한다. 한 무리의 여행객들은 연신 들썩이며 카메라에 풍경을 담아내기에 바쁘다. 흔적을 남기는 일이 눈으로 보는 일보다 더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두배나 더 힘이 든다. 마지막 길이라는 아쉬움에 발걸음이 더 무거워진다. 걸음을 시작하며 더 조급해지진 않았는지, 더 옹졸해지진 않았는지, 남겨놓은 곳의 미련에 후회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마음을 열고자 한 초심이 흔들리진 않았는지. 많은 아쉬움과 후회, 회환이 밀려온다. 조그만 신발 속 돌멩이에 신경이 쓰이고 작은 통증에 온 정신이 흐트러지며, 작은 것을 취하다 큰 걸 잃어버린 나날의 회상들이 정신없이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싸움의 과정이다. 걸을 수 있는 건강한 두 다리가 있어 다행이지만, 넓은 마음을 담아내지 못한 건 아닌지 다시금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여행은 그런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물음과 대답을 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2017.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