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부모
첫 아이를 만나고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돌아보면 쉽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두 젊은이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각각의 염색체를 나눠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낸다. 모든 게 생소하고 낯설고 서툴렀다. 탄생의 축복과 환희도 잠시 뿐, 먹이고 치우고 씻기고 재우고의 반복된 시간이다. 금방이라도 일어서고 뛰어다니고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얘기한다. 태어나면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을 때고, 걷기 시작하면 누워있을 때가 좋을 때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 말 못 할 때가 좋을 때라고. 부모의 역할은 그저 이전 때가 좋을 때라며, 결국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역설을 들으며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30여 년을 사랑만 받고 나 위주의 삶, 나만을 위한 세상을 살아오다 한 생명체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육아는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늦은 야근 후에 쌓여있던 집안일을 쳐다보면 한숨만 나왔고 새벽마다 울어대는 갓난 아이를 안고 비몽사몽 이방 저방을 전전하다 보면 정신 이탈이 올 것만 같았다. 육아의 부담은 의례 엄마의 몫이 상당 부분이라는 오만함만 있었다. 가부장제도 아래에서 자란 세대가 거쳐온 부작용이다. 그로 인한 전쟁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육아에 지친 엄마는 아빠만 기다리고, 직장일에 지친 아빠는 엄마가 알아서 잘 해주길 바란다. 생각의 차이와 가치관의 차이는 늘 부딪치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육체적 고단함과 정신적 스트레스는 상대를 위협하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고, 언쟁은 끊이질 않고, 감정은 날이 갈수록 대립 일변도로 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 내 아이가 배고파서 울고 있고, 내 아이가 눈앞에서 웃고 있으니까. 서로 다른 가치관, 인생관으로 수십 년을 따로 살아오다 함께 하면 마찰은 당연하단 걸 이해할려고도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눈 앞에 내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고 희비가 오락가락한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 돌파구를 찾는 내가 있고, 변화는 남을 통해서가 아닌 나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깨달아 간다. 그건 나이 먹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 듯하다.
아이는 정확히 부모의 반반을 닮아가진 않는다. 묘하게 섞여 오묘하게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그 과정에서 나와 닮아 있는 부분을 찾게 된다. 비슷하게 자리 잡은 점들을 찾고 손발의 형태를 비교하거나, 두텁게 자리 잡아갈 쌍꺼풀의 흔적을 찾는 등의 신체적 유사점을 찾으며 동질감을 확인한다. 작은 소리에 잘 놀라는 예민함과 목이 안 좋아 늘 마른기침을 해대는 모습, 때때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오버스러운 모습과 뭔가에 집중할 때의 집중력을 보며 성격과 기질상의 동질감도 확인해 간다.
아이를 키우면서 주위의 조언을 듣고 참 많은 육아서들을 들춰 본다. 수많은 육아 이론, 아이 심리학, 육아 지침서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고 때론 육아서대로 잘 들어맞지도 않는다. 이렇게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봤다가 혼란만 가중되고 갈팡질팡 할 뿐이다. 기본적인 육아법은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잘 지켜나간다. 주변 도움도 받고 상담도 받아서 어찌어찌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서는 그 어떤 육아 방법도 효과가 없다. 왜냐하면 내 아이만을 위한 육아법은 딱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육아를 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은 내 아이가 나의 요구에 잘 따라주고 잘 웃고 애교도 잘 부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때다. 그럴 때면 그렇게 행복하고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육아는 그런 행복한 순간이 전부는 아니다. 화가 날 때도 있다. 몇 번을 주의를 줘도 계속 말을 듣지 않거나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고 고함을 지르거나 집안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 때 말이다. 좋을 때야 한없이 사랑스럽고 아껴주고 싶지만 미울 때는 분노가 치민다. 화를 참아야 하지만 때론 화를 내야 한다. 잘 내야 한다. 그래서 시중에 상당 부분의 육아서가 화를 잘 다스리는 법이나 버릇을 잘 들이는 법이다.
아이의 가장 큰 장점은 감정의 기복이 심한 만큼 이전 일을 잘 잊는다는 거다. 아니면 기억의 메모리가 짧아서 잘 잊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화를 크게 한번 내고 나면 아이도 주눅이 들지만 부모도 화를 내고 난 후, 후회로 밤잠을 설치곤 한다. 어떻게 풀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답을 푸는 쪽은 언제나 어른이 아닌 아이의 몫이었다. 어른의 세계는 감정의 잔존이 아이에 비해 참 오래간다. 한번 삐치면 그 감정의 골이 풀릴 때까지 몇 날 며칠 걸리기 마련이지만 아이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한참 울다가도 배가 고파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면 금세 웃음꽃이 핀다. 잘 자고 나도 그렇고 잘 놀고 난 후도 그렇다. 화를 푸는 방법은 빨리 잊어버리는 거다. 단순하지만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안다. 기억력이 짧아서가 아니다. 아이는 화를 담고 있는 방식보다 웃고 떠들고 놀면서 잊어버리는 방식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기고 뒤집고 일어선 후, 말을 막 시작하기까지의 육아는 Feeding이라는 먹이는 과정과 Observing이라는 관찰의 과정을 거친다. 배고프면 먹여주고 부족하면 채워주고 위험하면 제거해주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보살펴주는 과정이다. 그리고 내 아이에서 발견하는 육체적 특징들에서 유사점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닮은 곳이 어딜까 살펴보고 어떤 건 닮지 않았다고 부정도 한다. 부모 자신의 유아적 기억은 없을지라도 자신의 2세에게서 자신만이 가진 유전적 형질을 비교, 분석, 관찰하는 과정에서 경이로움과 생명의 오묘함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이 시기이다.
간단한 의사 표현을 하고 물음이 시작되는 시기가 되면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된다. 보통 미운 4살이라는 시점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시기이다. Feeding과 Observing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적절한 제재와 훈육이 병행된다. 온전한 인간이라 하긴 힘들지만 사람 꼴(?)을 하고 사람대 사람으로 돌보는 시기이다. 또한, 쉴 새 없는 조잘거림과 질문의 연속과정에서 간혹 부모를 멘붕에 빠트리게도 한다. 아내에게서 늘 듣는 소리가 하나 있다. "제는 애다. 그걸 알아듣냐고!". 하지 말아야 할 걸 설명하는 방식이 어른들만의 언어로 들이댄다고 핀잔을 받는다. 아이의 언어와 아이의 눈높이에서 훈육을 하지 못하고 어른의 언어와 감정을 전달하려니 아이가 이해를 못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가 갖고 싶을 걸 가지겠다고 떼를 쓰면, 아빠는 단호하다. "안돼! 이게 왜 필요해" "돈 없어! 그냥 가 담에 사줄게" "집에 있잖아! 왜 욕심부려" 등등 전부 어른의 언어다. 떼를 쓰는 아이는 당장 눈에 보이는 걸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인데 이런저런 제재가 먹힐 리가 없다. 그러니 더 떼를 쓰고 급기야 드러누워서 통곡을 하는 것이다. 차근히 말을 들어주고 달래 보다가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고 후회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로만 설득할 게 아니라 아이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바꿨어야 했다. 기다림과 이해가 부족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뱃돈을 받으면 그 돈으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는 경제관념이 들어서는 초등학생이 되면, 훈육보다는 Coaching이라는 교육법이 시작된다. 말귀도 알아듣고 어떤 걸 하면 혼나고 어떤 걸 하면 칭찬을 받는지 잘 안다. 아빠, 엄마가 하는 일도 곧잘 따라 하려 하고 도우려고 까지 한다. 자기 주관성과 더불어 이타적인 배려도 생기는 시기이다. '안돼!'라고 감정적으로 제재하는 방법도 한계에 다다른다. 어떨 땐 부모보다 더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때면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아이가 가장 미울 때가 있다. 그건 부모 자신이 해왔던 행동과 말을 그대로 답습해 가는 것을 볼 때다. 앞 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일을 저지를 때나 해서는 안될 일에 고집을 피울 때, 조그마한 기복에 극한 감정을 드러내며 울음을 터트릴 때. 밉고 못나 보이는 아이의 행동은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던 나의 자화상을 보기 때문에 더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그 못난 행동을 고치지 못하고 반복했던 내가, 그 모난 부분을 다듬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내 아이를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되면 심적 난관을 떠나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부모로서 내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게 늘 부족하고 서투룰 수밖에 없는 건, 지금도 애를 먹고 있는 나 자신을 제어하고 다스려야 하는 게 나와 닮아있는 내 아이를 통해서란 걸 부모가 되어서야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부모도 나를 키우며 같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 거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하곤 한다.
스칼렛 요한슨, 최민식 주연의 '루시(Lucy)'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박사 역할을 한 모건 프리먼이 한 대사가 생각난다. "생명(세포)의 존재 목적은 영원히 죽지 않거나, 번식을 하는 것. 인간은 후자 쪽이다. 다음 세대를 낳고 좋은 DNA를 물려주는 것이다." 부모의 존재 이유가 그렇다. 내 아이를 낳아 좋은 환경과 행복한 삶을 물려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부모라는 인간 종(種)은 내가 건들지 못했던 내 안의 자아상을 내 아이를 통해 들여다 보고 관찰하고 반응해 주는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부모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뛰어놀고 자라고 길러진다. 날 때부터 잘못된 아이란 없다. 날 때부터 문제아도 없다. 모든 아이의 행동은 부모의 거울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하늘에 떠 있는 해이고 별이며 따라야 할 세상 모든 것이라고 여기고 자란다.
육아에 대한 내 나름의 정의는 육아는 내 아이를 가르치는 과정이라기보다 나의 반(아니 그 이상)을 닮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보살피고 가르치고 다듬으며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답은 없지만 육아 책을 보고 아이와 부딪치며 배운 걸 연습하고 실천해 나가는 나와의 싸움 같은 것이다.
아이는 양육의 대상일 뿐 아니라 나에게 배움을 가르치는 존재이고, 나를 다듬어 가는 여정 속에 또 다른 자아이다. 그리고 육아(育兒)는 두번째의 내 인생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