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간 주말을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운 것은 한국 드라마 '마인' 때문이었다.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진짜 내 것을 찾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캐치프레이즈 때문에 보기 시작했는데 중도에 하차할 뻔하다가 김서형 배우 때문에 끝까지 본 드라마다. 초반에는 정말 뻔한 재벌 드라마인줄 알았다. 거주 공간을 카덴차니 루바토니 부르는 모습, 효원 그룹의 왕자 한수혁과 메이드 김유연과의 개연성 없는 로맨스와 키스씬은 '어쩌라고'라는 생각만 들게 했다. 여기에 더해 김정화 배우 남편의 호모포빅 및 흡사 드라마 스포일러처럼 보인 발언도 드라마에 대한 실망감을 한껏 키웠다. 하지만 이야기가 무르익으면서 이 드라마는 기존 우당탕탕 왁자지껄 막장 재벌 스토리가 아니라 오히려 재벌로 포장된 퀴어, 대안 가족 드라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주말 안방 극장을 채운 '퀴어'
마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드라마 주 시청층인 중장년에게 퀴어 요소에 대한 거부감을 없앤 것이 아닐까 싶다. 김서형은 초반부터 잊지 못하는 여성을 그리워하는 캐릭터로 등장했고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받아들인 인물이다. 물론 초반에는 이를 사회에 꺼내지 못한 벽장 레즈비언이지만 시청자들에게 호응은 최고였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훤칠한 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김서형이 레즈비언으로 나오니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에게도 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재벌 그룹의 뒤를 이을 강력한 후보라는 점도 큰 매력 포인트다. 특별히 김서형의 성소수자 설정 때문에 대중의 부정적인 시선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몇몇 기독교는 빼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김서형과 김정화 간의 찐한 로맨스 씬이 없어서 아쉬웠다. 중요도도 떨어지고 개연성도 부족한 아들과 메이드 간의 연애는 키스씬까지 넣었으면서 더 깊은 사랑을 공유해온 김서형의 이야기에는 고작 포옹씬이 전부라는 게 참... 제작진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런 씬을 더 넣어서 동성애에 대한 방통위 심의에 저항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은 내 작은 소망...
그래도 일단은 한 발 나아간 것이 아닐까 싶다. 10년 전만 해도 드라마에서 게이 커플 나왔다고 해서 방송사에 각종 항의를 하던 시청자들이 주류였다.
정상 가족 프레임의 균열과 대안 가족
또 다른 주요 키워드는 대안 가족. 일단 혈통을 부순다. 효원 그룹의 유력 승계자인 한지용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른바 '주워온 자식'이다. 그의 아들인 하준도 진골도 못되는 계층에 불과하게 된다. 실제로 이 때문에 효원 그룹 한석철 회장은 한지용을 항상 승계에서 배제시켰지만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뒤 그를 더 사랑해주지 못했던 스스로를 자책하고 지금이라도 사랑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걸핏하면 소리 지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양순혜도 나중에는 남의 자식이라고 해도 잘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수혁은 정통 혈족일 수 있지만 스스로 메이드와의 사랑을 택해 혈통을 잇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뭐 여기까지는 재벌을 주제로 해 만들 수 있는 뻔한 이야기. 드라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성애 가족의 정상성 환상도 부순다. 이 드라마의 가장 인상적인 씬 중 하나는 정서현이 남편인 한진호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모습. 정서현의 커밍아웃보다는 이를 받아들이는 한진호의 모습이 퀴어하다. 다른 드라마 같았으면 아무리 사랑 없는 사이라고 해도 남편이 난리를 치거나 협박을 하거나 더 심한 모습으로 그려졌을텐데 여기서는 그저 '그렇구나'식으로 받아들이고 말 뿐이다. 원한다면 이혼을 해주겠다는 정서현의 이야기에도 한진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도를 하지 않은 것에 '나보다 낫네'라며 스테이크를 썰 뿐이다.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두 여성이 가족을 일구는 모습이다. 아들을 차지하려고 싸우던 강자경과 서희수는 마침내 상대가 가진 욕망을 이해하고 이를 지켜낼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한다. 하준의 손을 잡고 두 여성이 함께 공항을 나서는 장면은 동성 커플의 가족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제작진의 의도라고 해석한다.
결국 재벌 이야기로 시작을 하지만 끝에는 대안 가족을 다루고 있다. 이성애로 결합한 가족만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 '정상 가족'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비정상 가족'의 정상성을 보여준다. 한국 혼인 비율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언제까지고 가부장적 이성애 가족 프레임만 정상의 범주에 둘 수 없게 될 것이다.
드라마를 다 본 뒤 뭐라도 글적여놔야 마음에 편하겠다 싶어서 아일랜드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뷰를 남긴다. 글을 오랜만에 써서 만족할 정도로 잘 써지지가 않는다. 한국 드라마를 안 본 지 꽤 됐는데 오랜만에 주말 넷플릭스에서 한드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다. 사이다 한 병 들이마신 것처럼 깔끔한 드라마였다. 앞으로도 다양한 소재를 다룬 한드를 기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