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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l May 30. 2023

축구 이상의 즐거움, 마요르카 축구 대회


Un, dos, tres (하나, 둘, 셋)

Un pasito pa'lante María (마리아에게 한 걸음 다가가)

Un, dos, tres (하나, 둘, 셋)

Un pasito pa' atrás (한 걸음 뒤로)


리키 마틴의 Maria를 부르며 마요르카 섬의 단연 주인공이었던 나의 Las Marias 여자 축구 팀. 아일랜드를 대표해서 왔지만 팀 내 국적은 10개에 달하는 우리 팀. 아일랜드 코크에 살면서 Las Marias에 한 걸음 다가간 내 선택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했는지를 알려준 마요르카 축구 대회.




벌써 마요르카에 다녀온 지 2주가 지났다. 아마추어 축구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다녀온 마요르카는 1년 전 처음 다녀왔을 때보다 훨씬 덥고 즐거웠다. 마요르카 축구대회는 올 상반기 일어나는 이벤트 중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갈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 여자 5-aside 축구모임에서 작년 말쯤 모임의 리더격인 그레이시가 가자고 모두에게 제안을 했고 나는 한 달 정도 고민했다. 처음엔 갈 생각이 없었는데 모임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 데다 혼자 아시안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아마추어 축구대회를 나가겠나, 가서 친해지자라는 생각에 덥썩 나도 참석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비행기표도 그날 바로 사버렸다.


대회 참가 약 두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축구 연습에 들어갔던 거 같다. 축구 코칭 경력이 조금 있는 시모네의 도움을 받아 첫 30분 간은 연습을 하고 남은 시간 동안은 실전처럼 축구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해 온 것이 아니라서 실력이 단기간에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즐겁게 놀고 사람들이랑 친해지자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코로나 규제 없는 대회, 참가 인원 2000명 넘어 역대 최대


대회는 마요르카 섬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팔마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산타 폰자(Santa Ponsa)라는 해안가 동네에서 치러졌다. 관광지로 유명한 해수욕장이다. 주변에 멋들어진 가옥들도 즐비했고 호텔과 레스토랑, 술집, 클럽들이 가득했다. 동네 가운데에 큰 축구장이 두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경기를 진행했다. 한쪽에서는 술과 간단한 음식을 팔았고 사람들은 뒤섞여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 규제가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열린 것이라 모두에게 더 특별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2년 간 열리지 못했다가 작년에 다시 대회를 시작했지만 작년과 다른 점은 아무래도 코로나 제약에 대한 모든 정부 규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래선지 올해 대회에는 참가 인원이 2000명이 넘어 역대 최대라고 했다.


개막식도 그럴듯하게 진행했다. 올림픽처럼 출전 국가별로 나오면서 대회장을 한바퀴 돌았다. 덕분에 아일랜드에서 온 다른 팀들과도 만나고 인사했다. 남성팀은 더블린 버스 운전기사들이었고, 여성팀은 가르다 공무원들이었다. 가르다는 아이리시로 경찰. 이들은 5 aside로 출전한 데다 공무원 대회로 출전했기 때문에 우리와 맞붙을 일은 없었다. 대신 경기 구경을 종종 하곤 했는데 가르다 언니들 축구를 정말 잘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유럽 내 모든 국가에서 거진 최소 한 팀은 출전한 것 같았다. 유럽뿐 아니라 오만, 모로코 등 유럽 근방의 국가에서도 출전을 했고 캐나다와 미국에서도 마요르카까지 날아왔다. 하지만 국가별 다양성을 따지자면 우리 팀만한 곳도 없다. 스페인, 이탈리아, 브라질, 네덜란드, 프랑스, 칠레, 에콰도르, 한국, 아일랜드, 미국. 아일랜드를 대표해서 왔는데 정작 아이리시는 한 명 뿐인 우리 팀. 아일랜드가 언제부터 이렇게 다국적 국가였던가.



대회 결과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세미파이널에 진출하진 못했다. 큰 성적은 아니다. 5 aside 말고 7 aside로 출전했는데 출전팀은 7개에 불과했다. 5 aside는 여성팀만으로도 20개 팀이 참석한 것과 대조된다. 첫 날 경기에서는 리그전 형식으로 모든 팀이 상대 팀과 한 번씩 맞붙은 뒤 점수에 따라 순위를 매겼다. 이는 다음날 치러질 토너먼트 대진표를 위한 경기. 참가 팀이 훨씬 많았다면 리그전에서 탈락해서 쿼터 파이널에 진출하지 못하는 팀도 있었을 텐데 7팀 밖에 안 됐기 때문에 1등으로 부전승한 팀을 빼고는 모두 쿼터 파이널은 플레이하게 됐다.


쿼터 파이널의 첫 경기에서 우리는 리그전 점수가 가장 낮은 팀과 맞붙었다. 예선 경기에서 우리가 이겼던 팀이라서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초반에 어이 없게 한 골을 내주면서 끌려가다가 막판에 만회골을 넣으면서 극적으로 패널티킥까지 이어 갔지만 아쉽게 지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게임이 굉장히 치열했고 경쟁적인 팀도 많아서 2진 수준인 나는 플레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한 2분 뛰었나... 그게 좀 아쉽지만 오히려 축구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불을 지펴줬다.



상반신 나체의 해변 수영 그리고 라틴 음악



사실 가장 좋았던 것은 다수의 안전한 여성들과 다니면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산타 폰자의 해변가에서 라틴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고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 수영을 즐기고 아무 생각 없이 뜨거운 햇살에 몸을 맡기는 거 사실 제대로 해본 적 없었다. 아니,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라틴, 아프리카 음악이 이렇게 흥겨운지 이번에 알았고 속옷 혹은 비키니만 입고 밖에서 수영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동아시아 부치 유교걸 습성에 따라 예전 같으면 무조건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입수했을텐데. 한 번은 수영복 안 입고 와서 그냥 옷만 훌렁 벗고 속옷 차림으로 물에 뛰어들었는데 기분이 좋았다.


이 언니들은 더 과감했다. 해변에서 상반신은 거의 나체로 있었는데 난 그렇게까지는 아직 못하겠더라. 다른 이는 상반신을 벗은 채 수영도 했는데 남자들만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게 너무 괘씸하다고 하더라. 나도 언젠가는 도전해보고 싶은데 이번에는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개인 차이가 있겠지만 이 언니들은 어떻게 이렇게 과감할 수 있는지 부러웠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사회에서 안전하다는 시그널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이나 일본 같았으면 몰카 찍힐까 걱정할텐데. 아니 풍기문란으로 경찰서행인가? 왜 풍기문란...?


산타 폰자의 일몰.

새벽에 신나게 술 먹고 춤추다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옷 다 벗고 밤바다에 입수하기 일쑤였다. 난 그건 정말 죽어도 못하겠더라. 아무리 스페인이어도 5월 밤에는 쌀쌀한데 저것들 정말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마음만 들었다. 그런데 그게 또 부러운 나는 나중에 도전할지도 모르겠다.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나체의 자유, 그 느낌 왜 남자만 아냐고!


클럽 파티는 항상 즐거웠다. 라틴 음악에 맞춰 춤추는 기본적인 방법도 배웠고 내가 춤 추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처음 알았다. 마요르카에 다녀온 뒤 계속 찾아듣는 아프리카 음악은 나를 자연스럽게 비트에 맞춰 어디서나 춤추게 만들고 있다.



서로를 더 알게 된 시간


사람들과도 더 알게 돼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살다가 여자친구가 있는 독일로 간 더치 로미와, 리투아니아에서 아일랜드로 이주해온, 아나의 여자친구인 가비 이렇게 셋이 해변가 돌아다니면서 맥주 마시고 또 맥주 마시고 펍 들어가서 또 맥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꽤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의 이야기도 하면서 여자들의 우정을 다졌다. 로미 말처럼 스페인의 어느 길 한 가운데서 더치와 리투아니안과 코리안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이 광경이 얼마나 쉽게 이뤄지겠느냔 말이다.


팀 리더인 그레이시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도대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여기저기 뛰어 다니고 소리치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주변 사람 챙겨주는 모습이 좋았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그레이시. 미국에서 온 말로리는 스페인에서 5년 거주해 스패니시를 잘하는데 다들 스패니시로 대화해서 내가 잘 못 끼고 있으면 영어로 말하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었고, 떠나는 날 나 혼자 외곽으로 여행갈 때 내 짐도 대신 맡겨줬다. 한 번은 바닥에 떨어진 벌을 발견하곤 조심스레 들어 꽃 근처로 옮겨주더라. 중간에 벌이 갑자기 사라져서 혹시 바닥에 또 떨어졌나 계속 찾아보기도 하고. 그런 섬세한 마음들이 좋은 친구들이었다.


무엇보다 이 언니들이 내 이름을 드디어 제대로 발음하게 됐다. 일주일 동안 같이 붙어있었는데 정말 여러 차례 내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재차 물었다. 조금 짜증도 났지만 계속된 반복 학습으로 그들 만큼은 이제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름 발음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에겐 어려우니까. 내가 그들의 문화를 어려워하고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들도 모르고 어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까 어려우면 계속 물어야 한다. 그게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고 예의다. 4년 가까이 지낸 회사 동료들 중에도 내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는 애들이 수두룩한데.


앞으로 축구 생활이 더 즐거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벌써 우리는 내년 마요르카 대회 참가를 예정하고 있다. 새로운 팀명도 정했다. 사실 아일랜드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마음을 항상 두고 사는데 이 언니들이랑 정 들어버리면 여기 뜨는 게 너무 어려워질 거 같다. 어쨌든 같이 있을 동안은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지. 4년 아일랜드 생활 중 가장 잘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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