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의 대화 - 침묵의 장막

우리는 왜 몸의 목소리를 잃었는가?

by HAN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몸에게 말을 겁니다.

“일어나”, “조금만 더”, “괜찮아.”
그러나 이 짧은 말들 속에서 몸은 주로 ‘명령’을 듣습니다. 하루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몸을 단지 명령을 따르는 도구처럼 다루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몸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습니다.
미세한 두근거림, 어깨의 묵직한 긴장, 설명되지 않는 피로감.
몸은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 신호를 듣지 못하거나 듣지 않기로 선택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그 목소리를 놓치게 되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 외부 지향적인 가치, 자연과의 분리, 전문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문화 등 여러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몸과 마음 사이의 대화가 끊긴 이유를 뇌와 신체의 상호작용 약화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풀어보고자 합니다.


뇌의 과도한 필터링과 감각 순응

현대인의 뇌는 매일 수천 개의 자극을 처리해야 합니다.

시각, 청각, 촉각 등 오감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 뇌는 효율적인 필터링 기능을 작동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몸이 보내는 미세한 신호들은 종종 ‘배경음’으로 처리되어 의식적으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이를 감각 순응(sensory adaptation)이라 부릅니다.
처음엔 분명하게 느껴졌던 자극도, 반복되면 점차 의식에서 밀려나게 되는 현상입니다.

이는 작은 불편함이나 긴장 상태조차 ‘인식 대상’에서 배제되는 결과로 이어지며, 몸과 마음 사이의 감각적 연결이 서서히 약해집니다.


스트레스와 교감신경계의 과활성화

성과와 경쟁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은 신체의 스트레스 반응계를 지나치게 자극합니다.
그 결과 교감신경계가 과활성화되며, 몸은 ‘전투 혹은 도피’ 상태로 유지됩니다.
어깨는 긴장되고, 위장은 조여들며, 심장은 쉴 틈 없이 뛰게 됩니다.

문제는 이 반응들이 이제 ‘비정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조차 그저 스트레스로 취급되거나 무시되기 쉬운 환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감정 억제와 내장 감각의 둔화
몸과 마음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지만, 현대인의 삶은 이 연결을 점점 약화시킵니다.

불안,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은 내장 감각(interoception)—몸 내부의 반응을 감지하는 능력—을 둔화시킵니다.
심장 박동, 폐의 확장, 장의 긴장 같은 감각들은 감정의 상태와 직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불편함으로 취급하거나 무시하곤 합니다.


마음이 감정을 ‘침묵시키도록’ 훈련되면, 결국 몸은 그 언어를 들을 수 없게 되고, 대화는 단절됩니다.


침묵 속의 신호, 작은 토닥임
하지만 생명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몸은 여전히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통증, 피로, 불편함은 몸이 건네는 ‘작은 토닥임’입니다.
이 신호들은 단순히 불쾌한 감각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귀 기울이기를 바라는 생명의 마지막 언어일 수 있습니다.

"지금 괜찮은가요?"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몸은 우리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그 언어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뇌가 필터링한 신호를, 마음이 새롭게 들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시작은 특별하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잠시, 몸의 상태에 집중해 보는 것.
그 작고 단순한 실천이, 침묵의 장막을 걷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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