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02
암컷은 수컷에게 버려져 자식을 혼자 키우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다.
첫 번째 전략은 다른 수컷을 속여서 그에게 자기 자식을 친자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직 어미 뱃속에 있을 때라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전략이다. 물론 이 자식은 어미의 유전자를 50% 가지고 있지만, 속아 넘어간 계부의 유전자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자연선택은 이처럼 쉽게 속는 수컷에게 불리하다.
그래서, 친할머니보단 외할머니, 고모보단 이모, 아빠보단 엄마가 아이랑 더 친화력이 높은 상황이 발생한다. 수컷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파트너가 가진 아이가 자기의 친자일 가능성은 존재하시만 확실성의 관점에서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친할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에 대한 확실성은 있으나, 며느리가 낳은 손주에 대한 확실성은 낮다. 외할머니의 경우 딸도 자신이 낳았고, 그 딸이 손주를 낳은 것도 확실하므로 정확히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 분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을 수컷이 그냥 당하고 있지 않는다. 일명 브루스 효과 Bruce effect라고 불리는 것인데, 수컷이 분비하는 어떤 화학물질에 의해 다른 수컷이 수태시킨 태아를 유산시키는 현상이 쥐들에게 존재한다. 또한 사자의 경우에도 새로 들어온 수사자는 무리에 있는 새끼 사자를 모두 죽여버리는 경우가 있다.
또한 수컷은 암컷과의 교미에 앞서 구애 기간을 늘려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고 암컷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방법으로 수컷은 암컷이 뱃속에 의붓자식을 배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만일 그렇다면 암컷을 버린다.
암컷이 수컷에게 버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두 번째 전략은 바로 교미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암컷이 크고 영양소가 풍부한 난자라는 지참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교미에 성공한 수컷은 자식을 위한 귀중한 영양 공급원을 얻는다. 교미 전의 암컷이라면 잠재적으로 유리한 흥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일단 교미가 끝나면 흥정은 끝난다.
따라서 암컷은 수컷의 접촉을 오랫동안 거부하고 수줍어하는 행동을 한다. 암컷이 최종적으로 교미에 동의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수컷은 성실한 남편이 될 가망이 없다. 긴 약혼 기간을 강요함으로써 암컷은 변덕스러운 수컷을 솎아 내고 성실함과 인내를 인정받은 수컷과만 최종적으로 교미한다.
긴 구애 행동 또는 약혼 기간은 암컷에게도 유리하지만, 수컷이 속아서 다른 수컷의 자식을 양육하게 될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수컷에게도 유리한 것이다.
암컷은 교미를 허락하기 전에 수컷에게 자식에 많은 투자를 하도록 하여 교미 후에 수컷이 처자를 버리고 새로운 암컷을 찾는데 필요한 기회비용을 증가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러한 경우 수컷은 다른 암컷과의 교미 기회를 포기하게 된다. 다른 암컷들도 교미에 앞서 이와 같은 지연전술을 쓸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수컷은 이 암컷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략이 가정의 행복을 우선으로 하는 수컷을 고르는 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제가 있어야 한다. 즉, 모든 암컷이 같은 전략을 구사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개체군에 암컷을 버린 수컷을 언제라도 환영하는 허술한 암컷이 있다면, 비록 새끼에 대해 아무리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해도 수컷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로운 암컷을 찾아가는 것이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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