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명교 Jan 05. 2022

택배기사가 짜증을 낸 까닭은

얼마 전 부모님은 포방터길로 이사했다. 움푹 들어간 북한산 자락을 따라 주택가가 형성된 동네라서 가파르고 좁은 골목을 꼬불꼬불 올라야 한다. 길바닥이 얼어붙은 겨울날, 일흔을 앞둔 엄마는 산책 도중 넘어졌다. 수술을 거친 엄마는 한 달 넘게 깁스 신세다. 


퇴원한 엄마를 찾아 포방터로 향했다. 엄마는 산지직송 방어를 주문했고, 우리 가족은 ‘방어 대파티’를 열기로 했다. 한데 방어가 오지 않았다. 택배기사는 엄마에게 5시 전엔 온다고 장담했는데 깜깜무소식이었다. 여섯시반, 엄마는 더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성격 급한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다른 물건이라면 내일이나 모레 와도 무관했지만, 오늘 저녁 메뉴가 아닌가.


기사님, 포방터길에서 방어 택배 받아야 하는 사람인데요. 혹시 어디쯤이신가요? 직접 가지러 갈게요! 놀랍게도 택배기사는 아직도 안 갔냐고 되물었다. 물량이 많아 다른 업체 기사한테 넘겼다는 거다. 그리곤 덜컹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당황스럽지만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뉴스에서 본 택배기사 과로사의 원인은 하루 14시간 300건이 넘는 택배 물건을 배달해야 하는 현실에 있다.


방어의 행방은 미궁에 빠졌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물건을 맡긴 다른 업체 기사님께 확인해주실 수 있….”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택배기사는 더럭 짜증을 냈다. “아니 XX 바빠죽겠는데 왜 자꾸 전화하고 그래요? 확인해보면 될 거 아녜요!” 뚝. 억울했지만 기다렸다. 택배기사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지만, 돌이켜 보니 울분 섞인 하소연도 배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문제다. 기다려도 되고, 방어 따위 오늘 안 먹어도 그만인데, 자식놈 때문에 주문한 방어를 애타게 기다리는 엄마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바쁜 그가 말허리를 자르지 못하게 하고자 1.5배속으로 말했다. “잠시만요! 기사님 바쁘시죠? 그 방어 넘긴 다른 기사님 연락처만 알려주세요. 제가 직접 연락해서 찾아오려고요!” 군 전역 이후 이렇게 말을 빨리한 건 처음일 거다.


다행히 다른 기사의 연락처를 받았다. 추운 겨울, 배터리가 나가버려 포방터 꼭대기에서 한참 멈춰있었다고 했다. 가파른 골목을 뛰어올라 택배차량을 찾았다. 탑차 겉에는 “사회적 합의 이행하라!”, “XXXX 규탄한다!” 등 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하나같이 과도한 업무에 따른 과로사, 업체의 수수료 독식을 비판하고 있었다. 택배기사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죄송하다고 했다. “아녜요, 기사님. 그럴 수 있죠.” 스티로폼박스에 담긴 방어를 받고 돌아서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투쟁 승리하시길 바랄께요!” 그가 휘둥그레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탑차 안엔 아직도 물건이 한가득 남아있었다. 자정까진 일해야 끝날 것 같았다.


지난해 택배 노동자들은 엄혹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뭉쳤고, 분류작업 떠맡기기 중단과 주간 60시간 이내 근무 등 합의를 이뤘다. 한데 CJ대한통운이 인상분 170원을 기사들에게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노동자들은 다시 싸움에 나섰다. 하루 14시간씩 일해야 그날 일을 마칠 수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은 상상하기 어렵다. 다른 기사에게 방어를 넘긴 그의 심경도 이와 같지 않을까? 고객에게 “진짜 죽겠다고요!”라고 소리친 그의 짜증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덜 녹은 방어를 먹으며 생각했다. 재촉해서 미안하다고 메시지 보낼까? ‘미안해요, 기사님.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머뭇거리다 그러지 못했다. 택배기사의 짜증은 과로에 지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원인은 이윤밖에 모르는 물류 자본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