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과 데스브루크의 사선 논쟁
인스타그램을 넘기다가 문득 데스 부르크와 몬드리안 사이에 일어났던 '사선 논쟁'이 떠올랐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선 논쟁'은 사선의 도입을 주장한 와 이를 데스 부르크거부한 몬드리안 사이의 예술관에 대한 입장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두스뷔르흐는 데 스테일(De Stijl) 운동의 중심인물로, 회화와 건축 사이의 장르 통합을 통해 자신만의 추상 아방가르드 건축 모델을 창출하려 시도했던 화가 출신의 건축가였다.
반면, 화가로서 평생 회화에 전념했던 몬드리안은 데 스테일의 본질 요소에서 사선을 제외시켰다. 사선이 조형적 순도를 떨어뜨리는 불순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비한 지식을 추구하는 교파의 일원이기도 했던 몬드리안은 긴장과 균형 사이에서 오는 역동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음-양, 수평-수직 같이 본질적 요소들만이 세계를 완벽하게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으로 발전했다.
반대로 데스 부르크가 사선의 도입을 주장한 것은 회화의 범위를 벗어나, 실제 사람이 거주해야하는 특징을 가지는 건축적 입장에서 본질 요소를 정의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회화는 정역학만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건축은 동역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두스뷔르흐는 이상주의자 몬드리안과 결별하고(1925년 몬드리안은 데 스테일을 탈퇴했다.) 기능주의자 오우트와 함께 1920년대 네덜란드 기능주의 건축의 기초를 마련한다.
결국, 데스 부르크의 눈에는 몬드리안의 구성 시리즈가 전통적인 고전질서 안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를 대신해 데스 부르크는 새로운 시대의 기계문명의 산물로서 추상, 사선,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몬드리안과 다른 의미에서의 역동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몬드리안과 벌인 사선 논쟁은 회화와 건축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이 논쟁은 두 분야를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촉발되었지만, 실패로 끝남으로써 결과적으로 데 스테일 전체의 실패를 초래했다. 이는 건축과 회화의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1920년대 추상 아방가르드 이상을 완성시킨 르 코르뷔지에와 대비되기도 한다.
다시 인스타그램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 역시도 배울때는 당연히 두스뷔르흐에 200%공감하며 공부했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 내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보면 수직-수평선이 정확하게 지켜진 사진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오늘 버스에서 찍은 사선구도의 한강 사진을 올렸는데, 못내 그 사진이 불편하다.다른 사람이 힙하게, 아무렇게나 찍은 듯 올린 사진들을 보면 해방감을 느끼다가도, 막상 내 계정에서는 잘 계산된 사선구도의 사진만을 고집하는 나를 보며, 나도 참 어떤 면에서는 몬드리안 같이 고루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