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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pr 01. 2018

11. 화과산의 손오공 - 1

11. 화과산의 손오공


 이안은 햇빛이 비치는 울창한 숲을 헤치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산 정상에 오르자 작은 나지막한 평지가 나타났다. 그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뽕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하늘과 사방을 향해 가지들이 쭉쭉 뻗어나가며 달린 무성한 잎 때문에 주위의 평지 대부분은 나무 그늘에 파묻힐 정도였다.

 

‘이상하네. 왜 저 나무가 낯설지 않은 거지?’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뽕나무 둥지를 타기 시작했다. 보통 때 같으면 뱀파이어의 능력으로 손쉽게 오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능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둥지를 얼싸안고서 있는 힘껏 올라타야 했다. 그런데 점점 위로 오를수록 머리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수북한 뽕잎에 가려져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나무 둥지의 중간쯤 오르자 머리카락이 탈 것만 같이 무척 뜨거워졌다. 


 잠시 쉬었다가 조금씩, 또 조금씩 올라탔다. 둥지의 2/3쯤 도착했을 때 그가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모자 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열기는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끈하였다. 그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더니 순식간에 얼굴로 확 번져왔다. 공포에 휩싸인 그는 크게 비명을 지르고 팔을 휘두르다가 잡고 있던 둥지를 놓치고 말았다. 미끄러지며 아래로 추락하는 가운데 그의 팔과 다리가 허공에서 마구 허우적거렸다.

     

“으악, 안 돼!”


 그는 잠꼬대를 하며 벌떡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는데 젖은 옷과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물가 옆 뭍이었다. 그는 제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젖은 머리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석탄재로 얼룩진 옷을 훑어보며 혹시 불에 데었거나 이상한 데는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다행히 모두 정상이었다. 


‘꿈이었구나. 그런데 이렇게 생생하다니.’


 그는 고개를 들어 어두컴컴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초가 흐르고 나서야, 그와 수진이 광산에서 추락해 지하수맥에 휩쓸렸다는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여기는 잔잔한 지하 호수 같았다.


‘수진은 어디 있지?’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아보았다. 열 걸음 너머로 그녀가 물 위에 등을 대고 얼굴은 천장을 향한 채 둥둥 떠 있었다. 그는 헤엄쳐 다가가 그녀의 목을 손으로 감았다. 그리고 뭍으로 끌고 나왔다. 다행히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안심을 하며 그가 그녀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그의 눈앞이 말 그대로 컴컴해졌다.

 

‘이제 어떡한담. 마스쿠나 수색대가 구조하러 올까? 안 오면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계속 궁리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충동에 그의 몸과 마음이 강하게 휩싸였다. 때마침 불빛이 켜진 안전모 하나가 물 위에 둥둥 뜬 채 저 앞에 나타났다. 그는 잽싸게 다가가 그것을 낚아채었다. 그와 그녀의 것 중 하나이리라. 


 그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천천히 눈을 뜨며 일어나 앉은 그녀는 아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잔뜩 겁을 집어먹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이제 어떡해, 이대로... 죽는 거야? 이안?”


“우선 여기서 나가야 해.”


“기다리면 아마 구조하러 올 거야. 그냥 헤드라이트 켠 채 여기 그대로 있자. 응?”


 그녀는 안전모를 자신의 머리에 바짝 쓰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반대했다.


“수맥을 따라 너무 멀리 떠밀려 온 거 같아. 게다가 우리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어. 이 넓은 지하에서 우리를 찾기가 그리 쉽겠어? 기운이 있을 때 출구를 찾아봐야 해.”


“여긴 지하 호수야. 물과 우리가 있는 이 조그만 섬 밖에 아무것도 없다고. 혹시 지금 마법지팡이를 갖고 있니? 그럼 플라잉 뭐라는 주문이라도 외워서 우리 좀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해봐, 응? 어서.”


“탈출이나 순간이동은 그 주문만 갖고는 불가능해. 예전에 히든벅이 내뱉은 여의주가 있음 모를까.”


"그럼 너도 어서 뱉어봐!"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엄청난 내공과 수련을 거친 자만이 뱉을 수 있는 거란 말이야. 난 당연히 할 수 없지!"


“그럼 어떡해?”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렸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불현듯 반짝거렸다. 한 가닥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혹시 지금 파란총알 갖고 있어?”


“핸드백 안 갖고 왔어. 하필 이럴 때 없다니.”


 그녀는 매우 안타까운 어조로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섬 꼭대기 위에 서서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가 흥분한 목소리로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수진, 저쪽 좀 자세히 비춰줘 봐! 호수 맞은편 왼쪽 제일 끝에 말이야.”  


 안전모를 쓴 그녀의 얼굴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섰다. 그러나 호수가 너무 넓어 라이트 불빛이 끝까지 다 전달되지 않았다. 그녀 눈에 뭔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암튼 너무 작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확신하는 말투였다.


“저기 바위에 돌계단이 나 있어. 그 앞 물가에 배가 묶여있고. 분명 누군가가 저기 있다는 증거야. 가보자.”


“이런 곳에 누가 있다는 거야? 잘못 본거 아니야?”


“내 눈엔 보인단 말이야. 그만 징징대고 어서 가자. 어서, 수진.”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물속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녀는 예전 인당수 일이 불쑥 떠올랐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또 다짜고짜 들어가려 하다니. 그녀는 짜증이 격하게 몰려와 무섭게 그를 쏘아붙였다. 


“마법지팡이는 폼으로 들고 다니니? 이럴 때 그 잘난 마법으로 배 좀 이리로 오게 해 봐. 타고 가면 될 거 아니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서 지팡이를 꺼내 저 멀리 바위 쪽을 향해 마법을 걸었다.


“플라잉이글드래곤, 배는 이리로 와라!”

 

 처음엔 그것이 꿈틀대었다. 그러나 바로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가 두 번, 세 번 계속 외쳐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배는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그가 상황을 전해주자 그녀는 다시 울상이 되어 심하게 불평했다.


“지팡이가 병난 것 아니야? 왜 잘되던 마법이 갑자기 안 돼?"


"배가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아. 더 이상은 못 오네."


"그럼 어떡해, 저기까지 어떻게 가냐고?”


“그만 좀 징징대. 재고의 여지가 없어. 헤엄쳐 가는 수밖에.”


 그들이 있는 섬에서 배가 있는 곳까지는 아주 멀었다. 그만큼 호수가 크고 방대하여 마치 바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정말로 다른 대안이 없자 그녀는 모자를 벗고 물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번쩍 번개가 치며 지나갔다.


“이안, 이 안전모 좀 확대시켜봐. 예전 대나무 바구니 생각나지? 그때처럼 확대해서 타고 가자!"


"잘 되려나?"


"빨리 해보기나 해!"


"플라잉이글드래곤, 우리가 탈 정도로 커져라!"


 그는 그것을 전해 받아 거꾸로 물에 띄운 후 지팡이로 마법을 걸었다. 둘이 탈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모자는 양쪽으로 좀 기우뚱했지만 헤엄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방법 같았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커다란 노로 변신시켰다. 그들이 안에 탄 후 그는 뒤에서 힘차게 노를 저었다. 


 잔잔한 수면 위로 거꾸러진 놋대야 모양의 안전모가 서서히 나아갔다. 그것의 앞에서 강한 헤드라이트가 뿜어져 나왔다. 움푹 파인 대야의 몸통 부분 주위로 작은 물결이 일렁이었다. 철렁철렁 부딪치는 물결소리만이 주변에서 들려오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절반쯤 왔을 때였다. 배의 뒤편이 살짝 들리더니 여러 번 핑 도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수진은 노가 휘젓는 물살에 휩쓸려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이안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는 호수 밑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아마도 뱀파이어의 발달된 오감 능력 때문이리라. 그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뭔가 번쩍거렸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미끄럽고 매끈한 피부의 머리통이 저 뒤 어두운 물결 위로 서서히 떠오르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두 눈까지만 수면 위로 드러낼 뿐 더 이상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의 머리통이 거의 그들이 탄 배만 했다. 파충류처럼 일자로 생긴, 번쩍이는 두 눈동자가 그들을 노려보며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겁을 집어먹은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는 일부러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행히 헤드라이트가 켜진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저것이 도발만 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안전하게 도착한다면.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가까이 도착하자 그녀의 눈에도 바위에 난 계단과 나룻배 한 척이 명확히 들어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까 그 괴물은 이미 수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그는 계단이 있는 곳까지 조용히, 아주 조심스럽게 노를 저었다.      


 나룻배는 낡았지만 물이 새지 않고 나무판자가 튼튼하여 둘이 타도 그런대로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물이끼가 끼어 푸르죽죽하게 변색된 밧줄이 매어 있었다. 그는 마법으로 노의 너비를 조금 더 확대하여 나룻배 머리 부분과 계단 사이에 얹어 임시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건넌 후 노를 다시 마법지팡이로 변신시키고 안전모 역시 원래 크기로 축소시켰다. 그녀의 머리에 씌어주기 전, 그는 안전모의 대부분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불빛이 사방을 비추게 하였다.

 

 바위를 파서 만든 계단은 경사가 너무 심해 두 손을 발처럼 이용하여 기어올라야 했다. 군데군데 푸른 이끼가 덥수룩 끼어있어 미끄러웠다.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물에 빠지면 안 돼.”


 그는 그녀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었는데 아까 뒤따라오던 그 정체불명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대충 백 개는 넘을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인위적으로 만든 동굴이 나타났다. 그러나 주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이나 동물이 사는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앞장서고 그녀는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천장은 높아지고 너비는 점차 넓어졌다. 하지만 살아있는 존재가 남길 수밖에 없는, 생명체가 흘린 그 어떤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 가도 되나?’


 그녀는 마음속으로 걱정이 일었지만 여기서 징징대어 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꾹 참았다. 자신이 이렇게 겁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직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낯부끄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상황이 위태로워지고 목숨이 달리면 체면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 울든가 징징대든가 자지러지든가, 사실 그게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인간의 본성인 '겁'을 드러내는 가장 솔직한 표현들이지 않은가? 


 얼마 동안이나 갔을까? 그는 불현듯 멈춰 섰다. 그녀는 그만 그의 등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왜 멈춰서는 거야?”


“쉿, 조용히 해봐.” 


 그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그대로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그녀도 덩달아 뛰었다. 얼마 안가 평범한 인간인 그녀의 귀에도 누군가의 애절한 외침이 뻐끔뻐끔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나 좀 여기서 빼줘! 누구 없어요? 제발 나 좀 구해줘!”      


 외침은 동굴 끝에 달린 쇠창살 문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수진의 엄지손가락만 한 두께의 쇠창살이 스무 개정도 박혀있는 사이로 실내가 들여다보였다. 거대한 석상들이 양쪽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세워진 회랑이 문 뒤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 끝에 정자가 하나 있었다. 외침 소리는 그 안에서 들려왔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소리의 주인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사람의 말을 내지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적잖이 안심이 되는 그들이었다.


 그녀가 닫힌 문을 앞으로 밀어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도 나서 같이 밀어보았지만 약간 밀리는 소리가 날뿐 전혀 열리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문 밑으로 주먹 크기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가 순수한 뱀파이어의 힘으로 그것을 깨부수려 여러 번 시도했다. 다 실패하자 마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는 사이, 그녀는 옆으로 비켜서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우연히 가장자리에 놓인 돌을 앞으로 살짝 찼는데, 아니 바로 그 밑에 열쇠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것을 주워 자물쇠 구멍에 넣고 돌리었다. 찰칵하더니 문이 열렸다. 그러자 정자 안에서 나던 외침 소리가 한층 더 커지고 요란스러워졌다. 


"문을 열었네? 빨랑 오지 않고 뭐해! 나 좀 구하라고. 여긴 너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어서 빨랑 와!"



 걸어 들어가는 회랑의 양쪽으로 거대한 동물 석상들이 그들을 향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순으로 같은 동물들끼리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동물들 사이사이에는 불꽃이 켜진 등잔을 대나무 죽도 끝에 얹어놓은 승려상들이 서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지나가려니 그들의 마음은 이상스레 불편하고 불안해졌다.


 회랑이 끝나자 오나시아에서나 주로 볼 수 있는 오각형 모양의 정자 앞에 도착했다. 깊디깊은 지하에 이런 곳이 다 있다니, 그들은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서도 매우 신기해했다. 지붕을 이루고 있는 남색 기왓장 겉면에는 하얀 먹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대 한자들이 잔뜩 적혀있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두꺼운 나무 기둥들에도 검은 먹으로 쓴 고대 한자들이 세로로 길게 쓰여 있었다. 이안은 한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소름 끼치고 음흉한 느낌이 나는 것으로 보아 고대 오나시아에서 행했던 흑마법주문이지 않을까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경악시킨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정자 안에서 팔팔 뛰어다니며 퍽퍽 소리를 지르는 커다란 회색 원숭이였다. 그들이 들었던 외침은 바로 이것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인 줄로 기대했다가 짐승인 것으로 밝혀지자 그들의 얼굴에는 뚜렷한 실망감이 드러났다. 사람을 만나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물어보려 했던 계획이 증발하면서 장차 어떡해야 할지 그들의 눈앞이 문자 그대로 컴컴해졌다. 

 

 게다가 원숭이는 쉬지도 않고 정신없이 날뛰는 것으로 보아 정신도 온전치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몸 전체에 난 회색 털과 달리, 허연 털이 복실 거리는 가슴 부분을 훤히 드러낸 노란색 상의와 나풀거리는 노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호랑이 가죽을 둘렀다. 원숭이가 급히 달려와 수진의 앞 난간 위로 덥석 올라서서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소란을 피웠다.


“친구, 어서 나 좀 구해줘. 난 정자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이렇게 살아있는 생물을 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지나가는 개미조차 없었는데 드디어 사람이, 그것도 둘씩이나 나를 구하러 와줬구나. 드디어 됐어. 내 기도가 통한 거야. 제발 나 좀 여기서 꺼내 줘. 제발, 제발!”


 다짜고짜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구해달라고 두 손으로 빌었다가, 불현듯 혼자 무섭게 화를 내며 정자 안을 마구 뛰어다녔다가, 아무리 봐도 미쳐 맛이 간 원숭이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정자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도 안에서 그들을 따라 같이 돌았다. 원숭이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더니 정말로 불쌍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털이 난 뺨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수진이 먼저 물었다.


“너는 누구니? 여기 왜 있는 거야?”


“난 손오공이야. 이래 봐도 화과산의 신비스러운 돌 안에서 하늘과 땅의 힘, 해와 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지. 신비스러운 태생으로 인해 원숭이들의 왕이 되었지. 아주 오래전에,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거리는데, 오나시아에 있는 반도원의 복숭아를 훔친 죄로 여기에 갇히게 되었어. 쳇, 복숭아 몇 개 훔쳐 먹었을 뿐인데.”


“얼마 동안 갇혀 있었는데?”


“잠깐만, 내가 표시해 둔 데가 있어. 하나, 둘, 셋, 넷….”


 이안의 물음에 손오공은 정자 맞은편으로 재빠르게 달려가더니 나무 난간 위에 손톱으로 긁어 만든 선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수가 당최 끝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30분 넘게 걸려서야 드디어 셈이 끝났다.


“.....998년.....................................................................................................................................................................................................................................................................................................................................999년..................................................................................................................................................................................................................................................................1,000년.......1,000년 1,2,3....8,  정확히 1,000년 하고 8개월이야.”


“뭐? 그렇게나 오래 있었단 말이야?”


 그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손오공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는 다시 울상이 되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해진 그녀는 안쓰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1,000년 이상 갇혀 지내면서 구해달라고 계속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던 거야?”


“사실을 말하자면,, 허허, 이거 말해도 되나 몰라. 에잇, 이미 다 어긋난 일인데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야. 자, 내 말 좀 들어봐. 복숭아를 훔쳐 먹은 죄로 난 1,000년 8개월 전 이곳으로 보내졌지. 이 앞에 도착하니 정자 안에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구미호가 있지 않았겠어? 나를 끌고 온 오나시아 군인이 말하길, 그녀도 나처럼 큰 대역죄를 짓고 이리로 끌려왔는데 이제 그녀는 사면되고 내가 대신 갇혀야 한다는 거야. 얌전히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면 1,000년 후에 그녀처럼 풀어줄 거라고.

 그래서 난 훔쳐 먹은 죄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이 안에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어. 저기, 저 커다란 거울 보이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정자 한가운데 바닥에는 커다란 거울이 산산조각 난 채 부서져 있었다. 거울을 뒤에서 지탱해주던 기다란 청동 받침대는 뒤로 넘어가 바닥에 미끄러져 놓여있고 그 주위로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다가가 마치 예전의 온전한 거울을 바라보던 시늉을 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예전엔 여기 이렇게 멀쩡히 놓여있었어. 이것은 보통 거울이 아니야.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지하 얼음 속에 갇힌 마왕 블랙수트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블랙수트, 너희도 알지? 

 난 매일 매시 매분 매초 이것을 쳐다보며 그를 감시했어. 처음엔 좀 꺼림칙하기도 했었지. 마왕이 눈을 부릅뜬 채 봉인되어서 오히려 거울을 통해 날 항상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 뭐, 몇 달이 지나자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어. 


 그런데 한 8개월 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터져버렸어. 그날도 여느 때처럼 거울을 통해 마왕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 다시 생각하기도 싫어. 하지만 너희에게는 설명을 해줘야겠지. 


 그의 머리를 덮고 있는 얼음 위로 갑자기 빨간색 액체가 떨어져 흘러내리는 거야. 얼음이 녹기 시작했어. 완전히 녹아내리고, 아 끔찍해. 잠시 후 마왕의 부릅뜬 두 눈이 스르륵 감겼지. 그리고 눈을 번쩍 뜨며 앉은 자세에서 천천히 일어났어. 브라잇동맹사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이때 난 너무 놀라서 거의 졸도할 뻔했다고. 정말이야! 혹시 꿈을 꾸고 있나 싶어 눈을 세게 비비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지. 


 아뿔싸, 그는 없었어, 사라진 거야. 내 인생에서 그때만큼 소름 끼친 적은 없었어. 당황한 나는 거울의 각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구석구석 비춰보았는데 아무 데도 없는 거야. 계속 뚫어져라 찾는데, 찾고 있는데 앗, 갑자기 그의 얼굴이 거울 전체에 확 비춰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야. 그는 윙크까지 했어. 

"아아악!"

 공포에 질린 나는 비명을 지르며 얼른 몸을 뒤로 내뺐지. 그러자 거울에 스르륵 금이 가더니 이렇게 산산조각 나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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