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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pr 26. 2018

11. 화과산의 손오공 - 2


 그는 블랙수트가 봉인에서 풀려나오는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했던 것이었다. 이안과 수진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특히 이안은 8개월 전에 마왕이 봉인에서 풀려났다는 것, 그리고 풀려나자마자 바로 힘을 사용하였다는 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들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해진 가운데 손오공이 말을 이어갔다.


“그를 감시하기로 약속한 기간이 훨씬 넘어버렸는데 아무도 구하러 와주지 않았어. 아무도. 그러니 그가 이미 탈출한 마당에 나를 풀어주겠다고 한 약속이 유효하기나 하겠냐고? 그를 감시하려고 만든 이곳의 목적도 이제 무의미해진 거나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난, 이미 죗값을 다 치렀어. 근데 여기서 풀어줄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으라고? 흥, 만약 아무도 나를 기억하고 있지 못하면? 에이씨, 난 탈출해야겠어. 너희가 도와주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콱 죽어버릴래.”


 그는 깨진 거울 조각 중 날카로운 끝을 가진 것을 집어 들어 손목의 동맥 위로 갖다 대었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수진이 비명이 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지 마, 제발. 우리가 도와줄게.”


“정말이지? 정말 내가 탈출하도록 도와줄 거지?”


“그럼, 그러니까 어서 그걸 치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뒤쪽으로 던졌고 그것은 난간기둥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의기양양해진 그가 이안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너도 날 도와줄 거지?” 


“글쎄. 근데 마왕이 봉인에서 풀려나서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알아?”


“내가 점쟁이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손오공은 인내심이 거의 바닥에 달했는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곧 인지하고 그들 앞 난간에 매달려 다시 애원했다.


“제발 날 좀 풀어줘. 좋아, 내가 먼저 제안을 하지. 만약 탈출을 도와준다면 너희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어.”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가운데 손가락 두 개를 펴 그의 앞에서 흔들어대며 대꾸했다.


“우리는 두 명이니까 소원 두 가지는 들어줘야 해. 각자 하나씩 말이지. 안 그럼 절대 안 도와줄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두 가지 다 들어줄게. 제발 날 두고 떠나지만 마.”


“그럼 첫 번째 소원은 너랑 나랑 생각이 같은 거지?”


 이안이 그녀를 쳐다보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녀는 손오공에게 첫 번째 소원을 말했다.


“딥언더니아로 돌아가야 돼.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줘.”


“딥언더니아라, 근데 한눈에도 너희들은 전혀 딥언더니아인이 아닌데? 뭐, 어쨌든 알았어. 너희들을 그곳으로 데려다 주지. 자, 그럼 이제 나 좀 도와줘.”


“우리가 어떡하면 되는지 알려줘.”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정자에는 마법이 걸려있어. 지붕 좀 봐봐. 남색 기왓장들에 하얀 글씨가 잔뜩 적혀있지? 바로 여기에 갇힌 자가 꼼짝 못하게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주문이야. 그래서 지붕 아래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 나무기둥들에도 다 주문이 적혀있어. 그러니까 밖에서 이들 중 하나를 깨뜨리면 되는 거야. 내가 보긴 기둥보다 기왓장 한 장을 깨뜨리는 게 가장 안전하고 좋을 것 같은데. 글씨 하나만 깨져도 여기 전체에 걸린 마법이 풀릴 거야.”     


 수진은 회랑을 달려 쇠창살문 밖으로 나가 작은 돌 여러 개를 주워왔다. 그리고 기왓장을 향해 그것들을 힘껏 내던졌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기왓장 표면에 아주 작은 흠집만 파였을 뿐 금도 가지 않았다. 안달을 내며 펄쩍 뛰던 손오공은 그녀의 시도가 계속 실패하자 절망스러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를 막아섰다.


“마법이 생각보다 강해. 더 센 도구로 해야겠는데.”


 이안은 품에서 마법지팡이를 꺼내 앞으로 똑바로 들고 주문을 외웠다.


“플라잉이글드래곤, 쇠망치로 변해라!” 


 지팡이 앞부분이 점점 부풀어지더니 쇠망치 머리와 손잡이로 변했다. 쇠망치를 든 그가 멋진 점프력을 선보이며 정자의 지붕 위로 살짝 내려앉자, 손오공은 좋아라 하며 박수를 쳤다. 쇠망치가 기왓장 글씨 위를 힘껏 내려쳤다. 그런데 이럴 수가, 망치가 기왓장에 닿기 일보직전에 갑자기 "펑" 하는 불꽃이 일면서 그가 저 멀리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쥐 석상에 몸을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진이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다가서기 전, 다행히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오공은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지만 시도가 또다시 실패했다는 사실에 비통해하며 아우성을 쳤다. 


“아이고, 난 이제 여기서 갇힌 채로 죽겠구나. 마법지팡이도 소용없으니 이를 어쩌누? 아무리 복숭아 몇 개를 훔쳐 먹었기로서니 이렇게 가혹한 벌을 주다니. 이제 어쩌누, 어쩌누?”


 그의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점점 흐느낌이 심해졌다. 나중엔 아예 주저앉아 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그런 그를 아이들은 그저 안타깝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도 이곳에서 나갈 길이 소원해진 것만 같았다. 이안은 안타까운 미안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담담히 그에게 물어보았다.


“정말로 미안한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아. 우린 딥언더니아로 가야 하는데 혹시 여기서 나가는 길을 알아?”


 손오공은 이미 모든 걸 다 체념한 상태라 말을 이을 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겨우 입을 열었다.


“나가는 길은... 나도 몰라. 여기 올 때 자루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길을 보지 못했거든. 어차피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근두운()을 타고 날아오르려 했을 뿐... 정확한 길은... 나도 몰라.”


 그들은 손오공처럼 그만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이대로 이곳에서 소리 소문 없이 죽어야 하나? 그녀는 순간 너무 겁이나 이안의 손을 붙잡고 아무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달래던 그의 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왓장 가루가 마법처럼 들어왔다. 그의 눈앞으로 번개가 번쩍 치고 지나갔다. 그는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아까 네가 돌을 던지니까 기왓장 표면에 흠집이 생겼었지?”


“응. 근데 깨지지는 않았잖아. 우리도 여기서 죽는 거야, 이안?”


“아니야. 우린 나갈 수 있을 거야. 해결방법이 방금 떠올랐거든. 혹시 내 생각이 맞다면.”


 이안은 근처에 있는 조그만 돌을 주워 기왓장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것이 돌에 맞아 아주 조금 살짝 파였는데 주문이 써진 하얀 글씨 바로 옆이었다. 그는 이제 됐다며 손오공을 불렀다. 그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세상만사 다 귀찮다는 듯이 살짝 뜬 눈으로 이안을 향하여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너를 빼낼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어.”


“그게 뭐야? 뭐냐고?”


 그는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안이 있는 난간 쪽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의 얼굴 털은 눈물 콧물이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내 지팡이가 기왓장을 때리니까 불꽃이 일면서 펑하고 터졌잖아. 그 말인즉슨, 기왓장의 마법주문을 마법지팡이로 깨트리려 하니까 서로 낯선 힘들이 부딪쳐 폭발한 거야. 그래서 지팡이는 아예 기왓장에 손을 댈 수조차 없었던 거지. 하지만 아무 마법력이 없는 돌로 때리니까 흠집이 났다고. 즉, 저 기왓장은 마법력이 없는 물건으로 때려 부셔야 한다는 말씀이야. 손오공, 혹시 그 안에 마법이 깃들지 않은 뾰족한 도구 같은 건 없어?”


 그는 눈을 크게 부라린 채 정자 안을 이리저리 돌면서 적당한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울을 받치던 청동 막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주워 이안이 있는 쪽으로 힘껏 내던졌다. 막대기를 잡아 둘러보던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괜찮을까? 마왕을 비추던 거울 받침대인데.”


“상관없을 거야. 안 되면 다른 것으로 시도해 보자고. 어서 빨랑 해봐. 어서!”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그를 뒤로 한 채 이안은 냉큼 지붕으로 점프해 올라갔다. 그리고 기왓장의 글씨를 겨냥해 막대기 끝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힘껏 내리찍었다.


“뿌지직.” 


 글씨 한쪽에 조금 금이 갔다. 효과가 있었다. 그가 다시 있는 힘껏 내리 찍자 글씨의 한 획이 완전히 부스러졌다. 그는 다급히 지붕 아래로 내려왔다.


 별안간 사방에서 정자로 바람이 불어왔다. 기왓장들에 적힌 수천 자의 하얀 글씨가 연기로 바뀌더니 허공에 떠올라 무서운 속도로 지붕 위를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난간 기둥들에 적힌 검은 한자들도 그곳에서 튀어나와 소용돌이에 합쳐졌다. 


“펑” 


 소용돌이가 터지자 거센 바람이 회랑과 동물 석상들, 그리고 승려상들을 스치며 퍼져나갔다. 죽도 끝의 등잔불이 모두 화다닥 꺼졌다. 이안과 수진은 날아가지 않으려고 정자의 난간을 꽉 붙잡으며 버티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해졌다. 등잔의 불들이 마술처럼 동시에 확 켜지며 밝아졌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주위는 고요했다. 그들은 난간에서 벗어나 정자를 바라보았다. 기왓장과 기둥의 글씨가 다 사라진 후였다.  


 손오공이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난간 밖으로 살짝 내밀어보았다. 전에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나갈 수가 없었는데 아무 제지 없이 내밀어지자 그는 너무나도 기뻐했다. 그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정자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씩 웃으며 허리에 두른 호랑이 가죽에 손을 여러 번 문지른 후 그들을 향해 먼저 악수를 청하였다.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자, 내가 너희 소원을 들어줄 차례야. 소원......”     


 손오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요란스레 요동쳤다. 그녀가 재빨리 뒤돌아 아까 들어왔던 회랑과 쇠창살문을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저 앞에 있는 돼지 석상의 코가 벌름벌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잘못 봤나 싶어 급히 소매로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이번엔 돼지 눈알이 한 바퀴 핑 도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닥에 붙었던 그것의 네다리가 서서히 움직이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동물들 역시 긴 잠에서 깨어나는 듯 기지개를 켜거나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다. 바닥이 흔들린 것도 바로 이것들의 발돋움에서 나오는 진동이었던 것이다.

 

“석상들이... 움직여, 움직인다고!”


 그녀의 말에 석상 전부가 일제히 눈알을 돌려, 정자 앞에 굳은 채 서있는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경악하는 이안과 수진 옆에서 손오공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것들은 또 뭐야? 정자 마법이 풀리니까 이젠 다른 것이 난리 치네.”     


 이안이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더니 회랑을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석상들은 몸집이 크고 무거웠지만 의외로 행동이 민첩하고 유연했다. 그들은 옆으로 덮치려는 돼지의 발을 겨우 피하였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킁킁대던 개의 코에 부딪치고 말았다. 개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로 한 입 물려고 하자, 이안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개의 콧등으로 점프해 이마를 타고 올라갔다.

 개 등 위를 달리던 그들에게 돼지가 자신의 육중한 몸을 내던졌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개 등에서 뛰어내린 그들 뒤로 돼지와 개가 서로 충돌해 등짝들이 으스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다리가 붙어있어 그것들은 깨진 등짝을 단 채 그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오른쪽을 조심해!” 


 그녀의 외침에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려졌다. 양의 등짝에 자신의 꼬리를 건 채 등에 거꾸로 매달린 원숭이가 두 손바닥을 아래로 쫙 펼친 채 바닥을 훑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이 높게 점프해 그것의 손바닥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미처 뒤쪽의 그녀를 챙기지 못하였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그녀는 원숭이 손안에 가둬진 후였다. 

 

 그녀를 구하러 가기 위해 발을 내미는데 그의 머리 위로 뭔가가 푹 떨어졌다. 말의 발굽이었다. 무거운 말 석상에 짓눌린 그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에 갇혀버렸다. 뱀파이어였으니 망정이지 사람이었으면 벌써 으깨져 죽었을 것이다. 석상들이 하나둘씩 말과 원숭이 주위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가소로운 미소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들의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이놈! 동족이라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감히 내 친구를 잡았겠다. 여의봉은 아니지만 이 거울 받침대 맛 좀 봐라!”     


 손오공이 원숭이 석상의 머리 위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까 이안이 쓰던 청동 막대기의 뾰족한 부분으로 그것의 두 눈알을 찌르자 바로 으깨지며 떨어져 나갔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원숭이는 두 손을 펼쳐 자신의 눈을 감쌌고, 손오공은 추락하는 수진을 재빨리 구해냈다. 그는 그녀를 회랑 구석에 데려다주며 말했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네 친구를 구하고 올게.”


 그는 석상들의 난장판으로 다시 달려 나갔다. 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손오공은 말의 눈알도 뽑아버려 그것이 난리 치는 틈을 이용해 이안도 구해냈다. 그러나 그가 빠져나오자마자 어느새 달려온 토끼의 뒷다리 킥에 손오공이 차이고 말았다. 토끼는 기다란 귀 한쪽으로 기절한 그를 꽁꽁 말아 가둬버렸다. 겨우 기운을 차린 이안은 손오공이 떨어뜨린 청동 막대기를 옷과 등 사이로 쑥 집어넣은 후, 옆으로 다가온 쥐의 커다란 앞니에 손으로 매달렸다. 쥐는 쏜살같이 회랑 여기저기를 달리면서 그를 떨쳐내기 위해 연신 고개를 흔들어댔지만 그는 용케 잘 버텼다. 


 달리던 쥐 옆으로 토끼가 깡충 접근하자 그는 있는 힘껏 토끼의 머리 위로 점프해 올라탔다. 그러나 매끄러운 돌 표면 때문에 등선을 따라 그는 주르륵 미끄러졌다. 다행히 토끼의 볼록 튀어나온 꼬리에 발이 걸렸다. 그는 재빨리 등에서 청동 막대기를 꺼내 그것의 등짝을 탁탁 찍어 깨부수며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손오공이 말려있는 귀 아래를 그것으로 힘껏 내리쳤다. 떨어진 귀가 붕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완전히 부서졌다. 그 충격으로 다시 의식을 차린 손오공이 그에게 손을 흔들어 감사인사를 전하였다. 

 그때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외쳤다. 


“손오공, 어서 수진을 구해줘!”


 손오공이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등잔들은 바닥에 어수선히 떨어진 채 여전히 타고 있었다. 그런데 승려상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죽도를 든 그것들이 어느새 수진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이놈들, 니들은 삼장법사도 모르는 것이더냐?”


 손오공이 우렁찬 목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그는 자신의 털을 몇 개 뽑아 입안에서 잘게 씹은 후, 훅 내뱉으며 외쳤다. 


“키크라카로카커쿠라쿠쿠라쿵쿵, 망치를 든 나의 분신으로 변해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털 하나하나가 그의 가짜 분신으로 변하더니 진짜인 그와 함께 수진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망치로 그것들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그녀 옆으로 우연히 죽도 한 자루가 떨어지자 그녀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덮치려는 승려의 옆구리를 힘껏 가격했다. 그런데 옆구리가 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바로 몸을 돌려 그녀의 머리 위로 죽도를 확 들어 올렸고, 진짜 손오공이 달려와 그것의 손목을 깨부수지 않았다면 크게 다칠 뻔하였다. 그녀를 구해낸 후 그는 쇠창살문을 향해 달려가며 이안에게 소리쳤다.


“어서 문으로!”


 그들은 있는 힘껏 달리는데 떡 하니 문가를 가로막은 것이 있었다. 뱀 석상이었다. 뱀이 긴 혀를 날름거리며 굵은 몸통을 이리저리 말고 있었다. 뱀의 독니에서 끈적거리는 독이 뚝뚝 떨어져 내리자 돌바닥이 부식해 들어갔다. 그들은 잔뜩 긴장했다. 독이 살짝 묻기만 해도 큰일이었다. 어떻게 넘을지 결정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던 뱀이 가장 약해 보이는 수진을 뚫어져라 응시하였고, 이어 그녀를 향해 입을 쫙 벌리며 달려들었다. 이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왼편으로 내달리자 뱀도 잽싸게 뒤따라왔다. 


 손오공이 그들을 구하려고 달려 나가려던 찰나, 뭔가가 그의 등을 탁 쳤다. 뒤돌아보니 승려였다. 양손에 죽도와 가짜 손오공이 쓰던 망치가 들려있었다. 가짜 손오공들은 이미 다 당하여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들은 곧 연기로 증발해 사라졌다. 대신 손오공의 털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승려가 들었던 망치도 사라지고 그것은 죽도로 손오공을 패대기 시작하는데 아주 훌륭한 무예 솜씨였다. 손오공은 털로 가짜 무기를 만들고 싶었으나 그럴 짬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연신 제대로 얻어맞았다.


 그렇게 양쪽에서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뒤에 머물던 동물들이 그들에게 점차 다가왔다. 왼편으로 뱀이, 오른편으로 호랑이에게 막힌 이안과 수진은 구석으로 내몰렸다. 뱀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독니가 드러난 입을 크게 벌렸고, 호랑이 역시 으르렁거리며 공격 자세로 몸을 움츠렸다.


 이안이 마법지팡이를 꺼내기 위해 품속에 손을 넣었는데 이런, 비어 있었다. 아마 싸울 때 어디선가 떨어트렸나 보다. 당황한 그와 그녀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점점 뒤로 물러섰고 곧 차가운 벽에 막혀 멈추었다. 그녀의 등으로 뭔가 울퉁불퉁한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등으로 밀자 그것은 안으로 쑥 들어갔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커다란 굉음이 우레처럼 내리치더니 천장에서 바위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 뱀의 머리를 깨뜨렸다. 호랑이 역시 허리가 바위에 깔려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그 사이를 틈타 그들은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손오공, 어서 문으로.”


 이안의 외침에 손오공이 승려를 활짝 뛰어넘은 후 전속력으로 돌진해왔다. 그가 쇠창살문을 나오자마자 아슬아슬하게 커다란 바위가 뒤로 떨어져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어둠 속에서 수진의 안전모가 주위를 비추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건네며 다치지 않고 무사히 탈출했음을 감사했다. 손오공이 바지 뒤춤에서 뭔가를 꺼내어 이안에게 쑥 내밀었다. 그의 마법지팡이였다. 진심으로 손오공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그는 그것을 품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들은 나룻배가 떠있는 지하 호수로 나왔다. 이안이 뱃머리에서 그녀가 타도록 돕고 있는데 손오공이 계단 위에서 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 그건 아무 소용도 없어. 아마 날 여기에 가둔 주인의 말만 들을 걸. 주인의 허락 없이 탔다가는 배에 물이 차서 호수 중앙도 못가 쭈르르 가라앉을 거야.”


“그럼 여기서 어떻게 나가?”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오공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잔털 난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싹 지어지더니 문득 손뼉을 힘차게 세 번 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구부려 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키크라카로카커쿠라쿠쿠라쿵쿵, 근두운 대령하라!” 


 호수에서 물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빠른 속도로 휙휙 돌기 시작했다. 곧 옅은 수증기가 공중으로 훅 내뱉어졌다. 수증기는 커다란 뭉게구름이 되어 천천히 손오공에게 날아왔다. 그는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세워 서로 딱 붙인 다음 나머지 손가락들도 서로 깍지를 끼웠다. 그리고 “야호!”를 세 번 외친 후 깍지 낀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몸을 한번 털더니 계단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자 아까 구름이 다가와 그의 발밑을 싹 받치는 것이 아닌가?

 

 구름을 탄 그가 계단 밑으로 내려와 나룻배 앞에 섰다. 그리고 그것을 적당량 떼어 내어 구름 두 개를 더 만든 후 그들에게 근두운 타는 법을 알려주었다. 방법은 꽤나 간단했다.


1) 양쪽 엄지손가락을 세워 서로 붙이고 나머지는 서로 깍지를 낀다.

2) 그 상태로 “야호”를 크게 세 번 외친다.

3) 깍지 낀 손에 힘을 꽉 주고 몸을 한번 털어낸 후 구름 위로 훌쩍 올라탄다.


 그들은 차례대로 실행하였다. 신기하게도 발이 구름 밑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의 발목은 마치 구름 속의 보이지 않는 딱딱한 길에 닿은 것처럼 고정되어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구름을 한번 만져보았다. 차갑고 시원한 느낌의 하얀 안개가 손을 따라 이리저리 흩어지다가 다시 뭉쳐졌다.

 

 그들을 태운 근두운은 손오공을 따라 천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직 운전이 서툰 그들과 달리 저 앞에서 그는 곡예를 하듯 자유롭게 이리저리 회전하며 빠르게 날아갔다. 전투기 조종사도 울고 지나갈 최고의 균형 감각이었다. 1,000년 동안의 감금조차 그의 능력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천장 구석진 곳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을 통과해 한참을 상승한 후 빠져나왔다. 그들 위로 수레를 타고 지나오던 트랙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길을 찾은 것이다. 


 이안과 수진의 얼굴에는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물씬 감돌았다. 트랙을 따라 달려 검은 장막이 쳐진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모자가 주변을 밝혔다. 아무도 없었다. 이안과 수진이 구름에서 내리자 손오공은 그것에 일일이 다가가 부딪쳐 구름을 합체시켰다. 한층 뚱뚱해진 근두운 위에서 그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자, 다 왔어. 이제 두 번째 소원을 말해봐.”


 그녀는 어쩔까 싶은 표정으로 이안을 쓱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지금 말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때 빌어도 될까?”


 손오공이 의아한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지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를 구해준 친구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네. 알았어. 만약 못 만나면 남은 소원은 무효인 거다!”


“만날 운명이면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근데 우린 도착했는데 넌 어디로 갈 거야? 같이 딥언더니아로 갈래?”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 이안.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나를 만났다는 사실은 꼭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어. 아무도 나의 탈출을 모르게 말이야. 다음에 우리 꼭 다시 만나자고. 수진, 고마웠고 잘 있어!”


"잘 가, 손오공. 나도 고마워."


 그들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수레 옆을 지나 동굴로 들어서기 전에 수진은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검은 장막만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문에 점점 가까이 다다르자 혹시 잠겨 있으면 어떡하나 그들은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침묵을 지키는 복도의 왼쪽 열세 번째 문은 열려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는데 아무도 없었다. 발돋움 소리가 부끄럽게 여겨질 정도로 매우 조용하였다. 


 그들은 젤리벽을 통과해 푸다크 별궁의 홀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등장을 전혀 모른 채 식탁에 모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웅성대고 있었다. 마침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카할의 눈에 그들이 발견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 크게 소리쳤다.

 

“너희들 살아 있었구나!”


 그는 냉큼 달려와 이안을 안았다. 우란은 수진을 껴안았다. 테이블에 모여 있던 자들도 다가와 그들을 빙 둘러쌌다. 버핏 위원장과 광부 마스쿠, 딥언더니아 광부들과 병사들, 고위 공직자들과 캠프 참가자들이었다. 방금 전 그들은 두 아이의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며 수색대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이렇게 제 발로 멀쩡히 살아 돌아오다니.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어서 다들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곧 그들의 무사귀환을 환영하며 자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특히 자신의 책임하에 큰 사고가 날 뻔했으나 무사히 끝난 것을 안 위원장은 마치 지옥과 천당을 두루 들렀다가 온 표정이었다. 그는 곧장 소금궁전으로 뛰어 들어가 이틀 만에 돌아온 이들의 귀환 소식을 왕에게 제일 먼저 알렸다. 그리고 다시 정신없이 달려와 식사를 하고 있는 두 아이에게 왕에게 직접 하사 받은 의사를 전달하였다. 


“내일 아침, 왕께서 너희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싶으시다는구나. 음, 그 옷은 벗어버리고 새로 제공해 줄 깨끗한 예복으로 바꿔 입고 가렴. 품위와 예의를 꼭 갖추어 왕의 비위를 잘 맞춰드려야 해. 알겠지?” 


 그들이 입고 있는 더러워진 의복을 그는 인상을 쓴 눈초리로 훑어보며 존댓말이 아닌 반말로 충고했다. 


 늦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위원장이 보낸 재단사가 나타났다. 그에게 붙잡혀 이안의 방에서 한참 동안 치수를 재느라 시달린 수진은 거의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이틀을 어떻게 보냈는지, 지하 정자와 손오공조차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피곤하여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볕이 들여오지 않아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지하 딥언더니아 왕국의 새벽녘은 언제나 조용하다. 이곳 푸다크 별궁의 홀이 어둠과 침묵에 둘리어 희미한 소리에도 아주 민감해지는 시각이었다. 가장자리 구석의 어둠 속에서 회색 쥐 한 마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희한하게도 그것은 노란색 상의와 노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탁탁" 바닥을 치는 아주 조그만 발바닥 소리가 북처럼 울리면서 복도를 달음박질하더니 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급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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