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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May 20. 2018

12. 스톰펌 왕과의 아침식사

12. 스톰펌 왕과의 아침식사


 다음날 아침, 위원장의 평가에 따르면 한껏 품위를 차린 이안과 수진은 소금궁전으로 향하였다.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이안은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수진 역시 연둣빛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드레스를 입었는데, 여태껏 입어본 옷 중 가장 레이스가 많이 달려 화려했지만 꽉 끼는 상의 때문에 숨쉬기는 좀 힘들었다. 


 궁 앞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병사가 안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는 두꺼운 철갑옷을 두르고 머리 위에 두 개의 작은 뿔이 난 투구를 쓰고 있었다. 


 소금궁전 내부의 천장과 벽은 외부와 마찬가지로 온통 하얀색이었다. 거기에는 딥언더니아의 눈부신 역사와 공적들이 세밀하고 생생하게 조각과 부조로 구현되어 있었다. 특히, 천장을 받치고 있는 높은기둥들에는 무거운 지붕을 양쪽 어깨에 짊어진 거인들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었다. 수진은 기둥 옆을 지나치면서 슬그머니 거인의 발등 부분을 만져보았다. 아주 매끄러운 것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난 바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긴 복도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은 이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이 자연을 강렬하고 다채롭게 채색한 그림들이 벽면과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화사한 색채들의 향연이었다. 태양과 푸른 하늘,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희귀한 동식물들, 강, 호수, 뾰족한 정상에 눈이 쌓여있는 만년설과 날카롭게 깎아 들어가는 산맥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지나감에 따라 그림들이 마치 따라오는 것 같은 착시현상도 느껴졌다. 지하에서 며칠을 생활하던 수진은 오랜만에 자연으로 나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안 역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딥언더니아의 놀라운 석공 기술과 예술성에 적잖이 감탄하는 중이었다. 다만 중간중간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그들을 향해 내비치는 험상궂은 표정에 좀 마음이 불편할 뿐이었다. 줄이 팽팽히 당겨진 것 같은 긴장감이 공기 중에 잔뜩 섞여있었다. 수진도 그것이 느껴졌는지 아주 작은 소리로 이안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 우리를 째려보는 거야? 우린 그저 손님인데.”


“그렇게. 어쨌든 성을 나갈 때까지 꼭 내 옆에만 붙어있어. 혼자 다니지 말고.”     


 이윽고 병사가 어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같이 들어가지 않고 밖에 남았다. 그곳은 작고 아담한 방이었다. 하얀 벽면에는 왕관을 쓰거나 갑옷을 입은 용맹스러운 딥언더니아인의 식사 장면을 그린 그림들이 배열 없이 아무 데나 붙어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둥근 식탁이 놓여있었는데 훌륭한 아침식사가 벌써 가득 차려져 있었다. 


 바삭 튀긴 베이컨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냄비, 막 구운 신선한 옥수수빵, 얇게 저며 꿀을 바른 쥐 바비큐 냄새는 그녀의 식욕을 더욱더 돋게 만들었다. 먹음직스러운 호박파이와 옥수수 버터구이, 그 외에 처음 보는 파이들과 쿠키는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장식하였다. 그녀는 여기 있는 음식만으로도 혼자 일주일은 거뜬히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안은 자신이 먹을 수 없는 것들이라 그런지 음식은 본체만체하며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그의 앞으로 붉은 액체가 가득 든 아름다운 크리스털 잔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왕이 도착하지 않았기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식탁에는 총 3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남아있는 의자가 둘이 앉은 것보다 좀 더 높고 등받이와 팔걸이가 황금으로 되어있기에 딱 보기에도 왕을 위한 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문 밖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문이 안으로 활짝 열리며 키는 작지만 우람한 근육질 체구의 스톰펌 왕이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들어왔다. 따라 들어오려는 병사를 손으로 저지하며 씩씩 거친 숨소리가 섞인 퉁명스러운 어투로 명령했다.


“식사하는데 보호는 필요 없어. 필요하면 부를 테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말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그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의 우락부락한 얼굴과 거침없는 태도에 앉아있던 그들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젯밤 위원장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배운 인사예절로, 고개를 90도로 숙여 예의를 표하자 그는 손을 마구 흔들며 사양해댔다.


“거,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얼른 앉으라고. 나도 빨리 앉을 테니. 편하게, 그냥 나처럼 편히 앉아.” 


 구부정하게 황금 의자에 앉은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벽에 부딪쳐 메아리쳐 돌아오자 그들의 귀가 다 얼얼하였다. 그들은 캠프 개막식에서 본 왕이 지금 앞에 있는 자와 동일인물인지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황금 왕관 밑으로 제멋대로 튀어나온 붉은 곱슬머리가 등 뒤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과연 빗질을 한 번이라도 하긴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마구 엉켜있었다. 오늘따라 더욱 험상궂어 보이는 그의 얼굴 한가운데 위치한 코끝이 매우 빨갛고 뭉툭했다. 입 아래 달린 붉은 수염은 느슨하게 따서 가슴 앞으로 내렸는데 그 위로 과자와 빵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아마 개막식에서는 최대한 단장을 하고 나왔나 보다.


 검은 눈동자 간간히 초록색이 감도는 두 눈을 그들에게 고정한 채 왕은 손으로 쿠키 여러 개를 집어 입 속에 다 넣었다. 다 씹어 먹고 나서야 시선을 음식으로 돌리던 그의 눈에 불현듯 벼락이 내비쳤다. 그리고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리치며 문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순간 호박파이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던 수진이 깜짝 놀라 빈손을 도로 당기었다.

 

“이놈들아, 여기 맥주가 없잖아. 맥주 없이 어떻게 밥을 먹으라는 거야?” 


 밖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온 지 단 15초 만에 하얀 거품이 싹 올려져 있는, 은으로 만든 생맥주잔 2잔이 왕 앞에 대령하였다. 그는 이제 모든 게 마음에 드는지 맥주를 입에 대고 게걸스럽게 마시는데 한 번에 잔의 3분의 1이 비워졌다. 맥주잔을 식탁 위에 탕 내려놓자 다른 음식 접시들이 살짝 허공에 떠오르다 떨어졌다. 


 왕이 식사를 시작했다. 이건 뭐 대식가도 그런 대식가가 없을 정도였다. 쓰레기처럼 시커먼 봉투를 닮은 그의 입안으로 음식들이 마구 쳐 넣어졌다. 수진은 음식을 집는 그의 손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맛있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마음 편히 먹지 못하였다. 이안 역시 고개를 내린 채 액체를 마시기도 하고 크리스털 잔을 괜히 쓰다듬기도 하는 등 딴짓을 피웠다. 그러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는데 막 옥수수 버터구이를 끝낸 손가락을 빨던 왕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순간 그의 등골로 강한 전류가 흐르는 듯 따끔했다.

  

“식사가 모자라면 더 가져오라 하지. 한잔 더 하겠나?”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은 문에 대고 피 한잔과 맥주를 더 주문했다. 들어온 맥주 두 잔까지 다 마시자 왕의 배는 엄청 튀어나와 있었다. 곧 그가 트림을 해댔는데 그 소리가 목소리만큼이나 우렁찼다. 이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아니 모르는 체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수진은 더 이상 먹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려 어서 이 방을 떠나기를 속히 바라는 중이었다. 왕은 옆에 가지런히 놓인 냅킨을 확 펼쳐 입과 수염에 붙은 음식물을 대충 닦고는 바닥으로 내던졌다. 다시 트림을 요란스레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식사를 대충 끝낸 것 같으니 이제 편안히 이야기나 나눠볼까?”


 왕은 앞으로 푹 숙였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똑바로 기대어 제법 위엄 있는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태도가 점잖게 변하자 그들은 내심 불안해졌다. 도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그 일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너희들이 추락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제 저녁 만찬을 걸렀다는 사실을 모르겠지? 내 목을 걸고 맹세하건대 정말로 쿠키 부스러기 하나 먹지 않았단다. 그래, 그 정도로 걱정을 많이 했어. 그래서 버핏에게 너희들이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도끼로 목을 후려칠 정도로 기뻤단다. 진심을 다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조상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지.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야. 그래도 거기가 그놈이 추천한 가장 안전한 광산이라고 해서 보낸 것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그놈 마스쿠도 마찬가지이고. 너희에게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 정말로 미안하다. 딥언더니아의 왕으로서 감사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아닙니다. 보다시피 저희는 괜찮으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안은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냅다 마신 후 냅킨으로 거칠게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어서 여길 뜨고 싶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런데 왕은 모르는지 아님 알고도 모른척하는지, 문을 향해 그의 잔을 다시 채워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잠시 뒤, 붉은 피가 가득 담긴 잔이 또 대령했다. 이안은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 그것에 입도 대지 않았다. 돌연 입맛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병사가 나가고 주위에 그들밖에 없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 왕은 이번엔 수진에게 몸을 숙여 나지막이 물었다.


“근데 말이야, 내가 정말로 궁금해서 그러는데. 한 가지만 알려주면 안 되겠니?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말이야. 물론 그는 뱀파이어이고 너는 오나시아 출신이니 어떤 뛰어난 능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말이다. 지하의 깊은 광산에서 추락한 후 그렇게 살아 나온다는 것이, 어허, 이런이런. 너희들이 죽었어야 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야. 암, 그렇고말고. 


 그냥 객관적으로 보기에 아무리 훌륭한 마법사조차 광산에서 길을 잃고 추락해서 살아 나온 자가 거의 드물거든. 아마 너희가 최초일 거다.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의 저 밑, 더 깊은 지하의 어둠 속에는 유미르가 만든 기괴한 뭔가가 마구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 그런 곳을 다친 데도 없이 아주 멀쩡히, 그것도 이틀 만에 살아 돌아왔으니 너무 신기하고 궁금하지 않겠니? 그러니 나에게만 몰래 이야기해주렴. 우리 사이의 비밀로 할게.”


 이안과 수진은 서로의 눈치를 살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왕은 더 은밀하고도 약간 위협적인 어조로 그들을 향해 은근히 물었다. 

    

“혹시, 누군가가 너희를 돕지 않았니?”     


 두 명의 가슴이 순간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뜨끔하였다. 그러나 손오공이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미리 부탁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빨리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안은 머리를 수십 번 굴려봤지만 적당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톰펌 왕의 눈길은 점점 더 의혹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희가 딥언더니아로 타고 왔던 마법양탄자가 있거든요. 그것의 이름은 ‘파란총알’이죠. 광산에서 추락하여 엄청난 양으로 흐르던 수맥에 빠졌어요. 둘 다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바다같이 넓은 지하 호수였죠. 때마침 제가 주머니를 뒤지니 그것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타고 날아왔어요.”

 

 그녀의 설명을 들은 이안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꽤 괜찮은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그녀의 설명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쳤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실망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검은 눈은 아이들의 표정과 눈을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마치 거짓말을 탐지하는 레이더가 그의 눈 속에 장착되어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오호, 마법의 양탄자라면 충분히 돌아올 가능성이 있지. 아주 좋은 방법이기도 해. 때마침 그것을 지니고 있었다니 준비성이 철저하군. 양탄자는 접어도 꽤 부피가 클 텐데 말이야. 여태까지 그걸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말은 내 생애에 처음 들었다. 네 옷의 주머니는 그렇게 큰가 보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의 드레스를 훑어보며 물었다. 그녀는 아차 싶어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얼떨결에 외쳤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깜빡 잊었는데 그때 핸드백을 매고 있었거든요. 방수도 되고 가벼운 빨간 핸드백이에요. 지원 아저씨께 선물로 받은 거죠. 신기하게 아무리 큰 물체도 그 안에 다 들어가요. 양탄자 정도는 거뜬히 들어...”


“잘 알겠다. 괜한 말을 꺼내서 너희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구나.”


 왕이 그녀의 말을 끊자 그녀는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잔에 남은 맥주를 한 입에 다 털어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도 그를 따라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오늘 내가 한 질문은 신경 쓰지 마렴.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으니 잘된 거지. 자, 이제 나도 일하러 가고 너희도 캠프 일정을 이어가야지. 다음번에 또 보자고. 그리고 이거.”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그들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쇠로 만들어진 반지였다. 반지 한가운데에 하얀 수정이 붙어있었다. 그들이 착용하기에 많이 커 보였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손가락에 끼우자 반지 테두리가 스스로 줄어들어 딱 맞는 사이즈로 변했다. 왕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반지의 사용법을 직접 알려주었다.


“이건 램프 반지란다. 반지의 수정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봐라, 환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지. 어둠 속에서 이것만 있으면 활동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 왼쪽으로 돌리면 꺼지고. 이건 너희한테만 주는 특별 선물이야.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지. 잘 간직했다가 요긴하게 쓰렴.”



 

 이안과 수진은 소금궁전에서 나와 푸다크 별궁을 향해 걸어갔다. 커다란 바위가 그들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듯 발걸음은 무겁고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저기 이안, 왕이 손오공의 존재를 아는 게 아닐까? 누구의 도움을 받았느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셨잖아?” 


“아마 아닐 거야. 손오공이 가둬진 이후 개미조차 보지 못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아무도 그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았다는 거지. 그러니 왕도 그의 존재를 모를 거야. 오나시아 왕국에서만 알고 있을 거 같아. 아마 그가 말한 의미는 우리가 깊은 지하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어둠의 존재들을 만났는지 묻는 것이었을 거야.”


“‘이미르’인가 ‘유미르’인가 그거?”


“응. ‘유미르’는 ‘하하호호히히’의 태초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거인이야. 그가 죽어 부패해 몸에서 구더기 같은 것들이 나와서 바위틈으로 스며들었는데 그것이 난쟁이로 되었다는 신화가 전해져 내려와. 아마, 스톰펌 왕은 그 거인이 다른 괴물들도 탄생시켜 저 깊은 지하에 몰래 풀어놓았을 거라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아. 하긴 뭐, 그런 상상은 그 만이 하는 것은 아니지. 오래전부터 내려온 브라잇 동맹의 속담 중에 이런 게 있어.


‘어둠에 다가가지 마라. 그곳엔 당신을 노리는 어둠의 자식이 우글거리고 있을 테니. 
 빛 안에서 벗어나지 말지어다.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너의 적이 더 많을 테니.’”


“그럼 우리가 그런 존재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탈출했다고 왕은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솔직히 그는 파란총알 이야기도 믿지 않는 눈치였어. 그래도 우린 계속 그렇게 주장해나가야 해. 다른 참가자들과 심지어 카할과 우란에게도 말이야.”


 그녀는 램프 반지가 끼어진 손가락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근데 이건 참 유용한 선물이긴 해. 이젠 어둠에 갇혀 불편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잖아? 이것만 있으면.”


“글쎄, 그래도 난 왠지 끼는 게 꺼림칙해. 그냥 버릴까 봐.”


“버리다니, 그럼 내게 줘. 양손에 하나씩 끼고 다니지 뭐. 하긴 넌 뱀파이어여서 굳이 이것이 필요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난 어둠 속에서 매번 절실하다고.”


 이안은 자신의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가락에서 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기분이 좀 나아진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파란총알 이야기를 꺼낼 때 굉장히 놀라웠어. 왜 내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나 싶어서. 때때로 너도 머리 회전이 빠른 것 같아.”


 반지의 수정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앞에 순간 번개가 번쩍하고 지나갔다. 그녀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뭐, 때때로 머리 회전이 빨라? 그럼 보통 땐 멍청하단 말이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뭐, 사실 상황이 위험해지면 넌 좀... 음... 아기처럼 울거나 보채잖아? 차분히 생각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녀는 시무룩해지더니 그를 제치고 앞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열 걸음 정도 가다 멈춰 섰다. 그녀는 뒤돌아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어 소리쳤다.

 

“그래, 넌 엄청 똑똑해서 좋겠다. 난 멍청해서 학교에서 공부도 잘 못하고 머리 회전이 느려. 똑똑한 너나 잘 살아보셔! 앞으로 나 아는 체도 하지 마!”      


 당황해하는 그를 남겨두고 그녀는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이안은 가끔씩 남의 기분을 생각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는지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쟤를 믿고 여기까지 온 내가 미쳤지.’


 그녀는 침대 위에 벌렁 누운 채 캠프가 끝나면 당장 롤리마을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녀의 들끓는 분노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오래가진 못하였다. 잠시 후 그녀의 방으로 사과하러 온 그가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가 보석섬에서 캔 루비 원석이었다. 물론 그의 몸에 지니고 있는 것만큼 크고 영롱하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일부러 어렵사리 사과를 받아주는 척하며 내키진 않지만 성의를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로 그것을 받았다.


 그가 방에서 나간 후 그녀는 원석이 든 상자를 재빨리 빨간 핸드백 속에 꾹꾹 집어넣었다. 3개월 안에 빨리 팔아버려 돈을 번 후 엄마와 외할머니께 선물을 사드려야지 결심했다. 변변한 보석 목걸이 하나 가지지 못한 엄마에게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리고 외할머니께는 그렇게나 좋아하시는 진주 목걸이를 사드릴 것이다.

      


 단체복으로 갈아입은 그들이 푸다크 별궁홀로 나왔다. 그러자 의자에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위원장이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는 매우 초조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왕이 너희들을 불러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좀 들려주어야겠다.”


“먼저 사과하시고 저희가 안전하게 돌아온 것에 대해 기뻐하셨어요.” 


 수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버핏은 그녀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옆의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진정으로 듣기 원하는 말을 그가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초리로 말이다.

 

“그 외에 다른 말은, 또 다른 말씀은 없었니?”


“저희 둘이 마법양탄자를 타고 지하에서 탈출한 과정을..”


“아니,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혹시 내 이름을 언급하시진 않았느냐?” 


“언급하셨어요. 위원장님이 자신에게 우리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해줬다고 딱 한마디 하셨어요.”


 그녀의 대답에 버핏의 눈썹 끝이 위로 쑥 올라갔다.


“정말? 정말 나에 대해 그것만 말씀하셨단 말이지?”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는 초조했던 마음을 그제야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훨씬 안정된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확실히 해두자고. 그러니까 왕이 나에 대해 조금의 불만이라도 가진 것 같다던가 아님 불평을 했다던가. 다시 잘 생각해봐라. 아주 사소한 뉘앙스나 눈빛이라도 말이야. 그렇지 않으셨단 말이지? 확실하지?”


 그들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자, 그는 평소의 무표정하면서도 약간 신경질적인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근데 그때 왕의 표정이 왜 그렇게 이상했을까? 기뻐도 모자랄 판에 마치 무슨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이 잔뜩 굳어서는. 쟤들한테 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니 아마 내가 잘못 느낀 거겠지. 맞아, 아마도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급성 배탈이 나서 그런 표정을 지으셨을 거야. 그런 걸 거야.”


 위원장이 걸음을 내딛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뒤로 휙 돌아보며 볼멘소리로 외쳤다.


“따라오지 않고 뭐하니? 다들 딥언더니아 왕국의 최고 대장간으로 이미 실습을 가 있단다. 직접 데려다줄 테니 어서 따라오렴.”


 이안은 걸으면서 옆의 그녀에게 작지만 아주 확신하는 어조로 말했다.


“스톰펌 왕은 지금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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