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이 지나고 D-Day 당일 오후가 되었다.
네 명의 여인들이 언덕을 올라 붉은 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뾰족구두를 신었는데 그중, 레이스가 가득 달린 파란색 드레스를 바람에 휘날리며 가장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의 여주인공 황수진이 되시겠다.
그녀 옆으로 걸음걸이가 상당히 부자연스럽고 자꾸 절룩거리는 의문의 여인네들이 있었으니 이안과 카할 그리고 레빌이었다. 그들은 생전 처음 신은 뾰족구두로 포장 안 된 자갈길을 걷느라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레빌이 하얀 구두를 벗어 맨발로 걸으려 하자 수진이 그대로 신고 있으라고 으름장을 피웠다. 그는 할 수 없이 구두 안에 다시 발을 쑤셔 넣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이틀 전의 일이다. 수진은 식료품 자루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빨간 핸드백을 뒤져 투명한 반지 상자를 꺼냈는데 다들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예전 박지원이 그녀에게 선물로 준 숙녀옷방 미니어처 모형이었다.
식탁과 의자, 기타 가구들을 주변으로 밀어놓고 방 한가운데에 그것을 내려놓자 이안이 마법지팡이로 그것을 두들기며 주문을 외웠다.
“플라잉이글드래곤, 미니아처 커져라!”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집안에 또 다른 방 하나가 생겨났다. 그런데 카할과 레빌은 그것이 아니라 그가 마법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먼저 신기해하며 관심을 보였다.
“와우, 이안, 어떻게 마법지팡이까지 가지고 있는 거야? 마법사 뱀파이어는 처음 듣는 걸.”
“부모님 중 한 명이 마법사이거든.”
“정말 멋있다.”
카할의 감탄에 이안은 싱끗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도 그리 오래 지속되진 못했으니 곧 저 생지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고통 때문이었다. 수진은 부푼 가슴을 안고서 자신 앞의 분홍색 하트 문을 열었다. 그곳은 그녀에게 언제나 꿈의 장소였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방 네 면을 가득 두른 옷장에 각양각색의 옷들이 빽빽이 걸려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열려있는 서랍장에는 속옷, 신발, 가방, 액세서리, 가발, 모자 등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있었다. 그녀는 문 바로 옆에 위치한 화장대로 다가가 화장도구가 다 있는지 체크해보았다.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리라.
그런데 참내, 하트 문에 매달려 안을 쳐다보던 남자들의 표정은 가히 가관이었다. 마치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벼락에 맞아 죽을 것 같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카할, 어서 들어와.”
그녀가 부드럽게 여러 번 불렀지만 반응이 없자 쌔게 호통쳤다.
"카할, 당장 들어오지 않고 뭐해!"
그가 마지못해 흐느적거리며 들어왔다. 갈색 피부를 가진 그를 위해 그녀는 하얀색 바탕에 분홍색 꽃무늬가 그려진 미니 원피스를 추천해주었다. 이 옷은 하이웨스트여서 가슴 아래로 치마가 종처럼 쫙 퍼졌는데 최고급 비단을 사용해서 그런지 광택이 자르르 흘렀다. 카할이 입자 미니가 롱드레스로 변신해 그의 커다란 발까지 다 가려주었다. 막상 입고 보니 그 역시 은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로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으니 파여 있는 가슴 부분이 납작하여 헐렁거리는 것이었다. 수진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자 레빌이 시근덕거리는 음흉한 표정으로 목청을 높였다.
“가슴 문제는 꼭 해결을 봐야 한다. 거인은 빵빵한 여자를 좋아하거든.”
그녀는 속옷이 든 서랍을 뒤져 끈이 없는 뽕브래지어 두 개를 겨우 찾아냈다. 카할에게 하나를 입히자 이번엔 그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거야!”
레빌이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그녀는 분홍색 구두를 찾아와 그에게 신기고 붉고 긴 머리 가발까지 씌어주었다. 와우, 카할이 완벽한 여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레빌 차례였다. 그에게 화려한 원피스들과 드레스들을 수없이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입히면 입힐수록 수진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 마르고 살이 없어 눈만 퀭하니 도드라져 보였는데 흡사 굶어 죽은 귀신처럼 빈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몸도 꼬챙이처럼 비쩍 마르고 피부도 늘어져 조금이라도 노출 있는 옷을 입혀보면 아름답기는커녕 불쌍하고 징그러웠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란 말만 반복하며 옷을 내던졌다. 그녀 옆으로 거부당한 옷들이 점점 쌓여갔다. 한숨이 절로 나고 너무 힘들었지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고 다시 옷장을 뒤져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쏙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웨딩드레스였다. 웨딩드레스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녀는 보는 순간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목에서부터 하얀 공단이 몸을 감싸며 내려와 허리에서 풍성하게 퍼지는 모양새였다. 마지막 기대를 안은 채 그에게 입혀보니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살이 노출되는 부분이 전혀 없고, 크리스털이 박힌 상의와 꽃잎이 포개어진 것처럼 나풀거리는 치마가 그의 마른 몸을 다 가려주었다. 엉덩이 부분에는 커다란 리본이 달려있어 아주 화사했다. 정말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였다.
하얀 구두를 신기고 여러 가발을 시도해보았는데, 역시나 어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생머리, 파마머리, 긴 머리, 짧은 머리, 앞머리도 붙여보고 떼어보고 했지만 여장남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던가? 그녀는 이때만큼 그 말에 실감 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곰곰이 그의 숱 없는 머리통을 쳐다보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리고 부리나케 아까 드레스를 찾은 곳을 집중적으로 뒤졌는데 곧 허리까지 내려오는 면사포가 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챙이 넓은 모자에 붙은 면사포였다.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우자 면사포가 앞으로 내려오면서 얼굴이 다 가려졌다. 대성공이었다.
이제 이안만 남았다. 그는 마치 지옥 유황불로 끌려오는 마냥 그녀에게 억지로 이끌려 방으로 들어왔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녀를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아까 옆에 쌓아둔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러 개를 가져와 대충 대보기만 했는데 하얀 피부에 키가 있어서 그런지 다 잘 어울렸다. 특히 한쪽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보라색 드레스를 갖다 대자 카할과 레빌이 최고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잠시 뒤,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를 보자 모두들 한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가슴 부분이 납작해서 좀 거슬렸지만 늘씬한 체형이 그대로 드러나며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그녀가 그에게 금발의 긴 파마머리 가발을 씌어주고 보라색 구두를 신기자 이건 완전 미인 그 자체였다.
“이안, 너 정말로 예쁘다. 정말 예뻐.”
수진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하자, 카할과 레빌도 옆에서 찬찬히 관찰하며 농담이 섞인 칭찬을 건넸다.
“정말 최고구나. 거인들에게도 인기 만점이겠는데.”
“와, 이안. 너 정말 예쁘다. 그것 벗고 이 꽃무늬 원피스 한번 입어볼래?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한번 보고 싶어.”
“당장 그만두지 못해, 카할. 한마디만 더하면 바로 한 대 칠거야. 레빌 아저씨도 마찬가지예요.”
이안의 얼굴이 금세 붉어지며 그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수진은 아까 카할에게 하나 주고 남은 뽕브래지어를 그에게 채우려 하자, 그가 손으로 탁 막으며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꽥꽥 소리 질렀다.
“싫어!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노출이 있는 옷이어서 꼭 해야 돼. 난 지금 너무 지쳐서 너랑 싸울 힘도 없다고.”
부들부들 떠는 그에게 그녀가 강제로 입히자 그의 몸에 굴곡이 생기면서 정말로 세기의 미인처럼 아름다워졌다.
남자들의 의상이 다 정해지고 이제 그녀의 것을 정할 차례가 되었다. 이것저것 거울에 대 보았지만 방금 전 이안의 아름다운 모습을 봐서 그런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 그다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지친 그녀였기에 옷더미 제일 위에 놓인 레이스가 달린 파란 것으로 대충 정해버렸다. 자신은 여자니까 저들만큼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레빌이 쭈뼛거리며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카할과 이안처럼 나도 가슴을 크게 하고 싶은데 안 될까?”
“있었으면 당장 해드렸을 텐데 브래지어가 2개밖에 없네요. 그리고 아저씨는 구태여 불편하게 그것을 입지 않아도 돼요. 웨딩드레스가 노출이 없이 앞뒤로 꽉 막혀서 그리 흉해 보이지 않거든요.”
“그래도 가슴이 너무 휑해... 뭐라도 집어넣어야지 이래 갖고 거인들이 속아 넘어가겠니?”
‘이런 음흉한 변태 아저씨 같으니라고.’
그녀는 화가 났지만 눈을 흘기며 참았다.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열정으로 치부해버리자고 스스로를 달랜 후 어떻게든 해결해주겠다며 겨우 달래어 내보냈다. 그러나 여자 속옷을 여러 번 뒤지고 또 뒤졌지만 비슷한 것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옷장 구석에 뭉쳐있는 천 뭉치를 발견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2개의 작은 공을 만들었다. 그것들을 본 레빌은 처음엔 섭섭해했지만 결국 순순히 건네받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악한 거인들이 살고 있는 붉은 성으로 향하였다. 성 외벽의 붉은 기운을 하늘과 구름이 흡수하고 있는지 황혼은 점점 더 붉게 타올랐다. 불편한 옷차림과 뾰족구두로 인해 이동속도가 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성이 보기보다 훨씬 멀리에 위치해있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듯 성의 키가 쑥쑥 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성 꼭대기 위에서 무시무시한 청동 드래곤이 몸을 웅크리고 시선은 내린 채 다가오는 이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크게 부릅뜬 두 눈에서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고, 날카롭게 갈린 이빨들을 그대로 드러낸 검은 입은 이곳에 오지 말라는 죽음의 경고를 위협적으로 날리었다. 접혀있는 커다란 날개의 마디 끝마다 징그러운 날개뼈가 삐죽 튀어나왔고, 척추를 따라 꽂힌 가시들은 전보다 더 길어지고 뾰족해진 것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수진이 갑자기 움찔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레빌이 뒤돌아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녀의 목소리가 심히 떨리었다.
“방금 저것의 눈동자가 움직였어요. 나를 보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고요.”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 거지, 실제로는 쇠 조각이란다. 만약 살아있다면 우리한테 벌써 달려들었을 테지.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그녀는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그것의 눈동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번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역시 그의 말처럼 착각이었나 보다. 그녀는 앞서 가고 있는 친구들 옆으로 급히 다가가며 나란히 걸었다. 이안이 아름답게 화장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드래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 위로 올려진 화살표 꼬리가 전보다 더 높이 치솟은 것 같기도 하고, 날개는 좀 펴진 것 같기도 하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불안한 생각을 싹 지워버렸다.
드디어 거대한 성문 앞에 도착했다. 멀리서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충격적이게도 외벽과 성문 위로 끈적이는 붉은 액체가 군데군데 뭉쳐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까지 닿지는 않고 벽에 다시 흡수되어버렸다. 이안이 벽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찍어 코에 갖다 대보았다. 그의 눈앞이 흐려지고 파란색 눈동자에 불꽃이 확 일었는데 피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것을 살짝 혀에 갖다 대었다. 산 생물의 피가 확실했다. 그는 잠시 달콤한 피에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흥분을 자제했다.
그는 문으로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두려운 이들에게 더 큰 공포심을 심어줄 필요가 없어서였다. 이미 문 앞까지 도착한 마당에 말이다. 수진이 다시 고개를 들자 드래곤의 벌린 입 안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빨 하나하나가 너무도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곧바로 그것의 목구멍을 타고 화염이 그들에게 내뿜어질 것만 같았다.
성문에는 별다른 손잡이 없이 둥근 초인종이 달려있었다. 녹이 슨 초인종에는 다행히 피가 묻어있지 않았다. 이안의 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있기에 카할이 그의 어깨를 올라타고 그것을 세게 눌렀다.
“띠링~띠링~띠링~”
초인종에서 전화 벨소리가 나자 아직 마음의 준비를 마치지 못한 아이들과 레빌의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 그들은 나란히 선 채 마음속으로 무사하기를 여러 번 빌었다. 그런데 어째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었다. 카할이 다시 한번 이안의 어깨를 타고서 더 세게 눌렀다.
“띠링~띠링~띠링~”
잠시 뒤 멀리서부터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지더니 초인종 한참 위로 난 자그만 창문이 옆으로 쓱 열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그 뒤로 나타났다. 그것은 사방으로 돌려지다가 아래쪽 이들에게 고정되었다. 눈동자는 사라지고 창문도 바로 닫혔다. 그리고 안쪽에서 철이 서로 긁히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더니 육중한 문이 서서히 안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익~끼이익~ 쿵”
그들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막 가빠져 왔다.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막상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현기증과 멀미가 난 듯 속이 울렁거렸다. 과수원에서 본 적 있는 그 키클로프스족 거인이 문 뒤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부터 질러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찬지 눈앞에서 꼭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이것들은 뭐야? 아직 마법에 걸리지 않았나 보군. 마침 잔치가 있는데 너희들을 샐러드 무침으로 내놓아야겠다.”
거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혀를 다셨고, 일행들은 그만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계획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먼저 뒤돌아 달음박질을 쳤다면 나머지도 바로 뒤쫓아 도망쳤으리라.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정신을 일찍 차린 이안이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즉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여자와 비슷한 목소리로 미리 외워온 대사를 읊은 것이다. 사실 그건 수진의 몫이었는데 그녀가 거의 넋이 나가 있자 그가 대신한 것이다.
“저희는 길을 지나가던 무희들인데요. 해도 곧 떨어지고 근처에 묵을 때가 없어서요. 다행히 이곳을 발견했답니다. 근데 여기에 잔치가 있나 봐요? 잔치는 저희 전문인데, 저희가 춤을 아주 잘 추거든요. 하룻밤만 재워주시면 저희가 더욱 흥나게 만들어 드릴게요.”
“무희들이라? 마침 잘 되었군. 안 그래도 오늘 주인공인 형님이 심심해하던 차였는데... 들어와.”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세요. 공연을 하면 저희를 잡아먹지 않는다고요.”
외눈박이 거인의 얼굴에 사악하고 야비한 미소가 퍼졌고,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말씨로 흔쾌히 승낙했다.
“약속하마. 어서 들어와.”
그들은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으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 뒤로 문이 굳게 닫히었다.
아, 앞으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제발 샐러드 무침으로 비참히 죽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삐걱, 삐걱, 삐르르르~”
그들이 성 안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성의 꼭대기에서 쇠끼리 긁히는 듯한 소름끼치는 의문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니 이럴 수가, 쇠붙이인 줄로만 알았던 드래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고개를 뻣뻣이 들어 올린 채 날개를 펄럭이며 마치 맹수가 포효하듯 입에서 세찬 불길을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문이 닫히자 바깥에서 들어오던 빛이 차단되어 순간 입구가 굉장히 어두워졌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들은 복도 공중에 떠있는 희미한 도깨비불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횃불이나 양초가 아닌 도깨비불이 실내를 밝혀주고 있었다. 파란색 불꽃이 춤을 추듯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외눈박이 거인은 앞장서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겁먹은 얼굴로 그들은 무덤 같은 정적과 독거미와 지네가 우글거릴 것 같이 괴기스러움이 흐르는 복도를 나아갔다. 돌바닥을 때리는 뾰족구두들의 굽소리가 요란스레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거인은 어떻게 이런 횡재가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도저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형님 발로르가 여자를 못 구해왔다고 엄청 화를 냈었는데 이들을 보면 굉장히 기뻐서 마구 날뛰고 자신을 칭찬해주리라. 더군다나 춤을 추는 무희라니 형님 생일잔치에 딱 이었다. 운수 대통한 날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섬뜩한 눈빛으로 쏘아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손으로 틀어막았다. 순간 지독한 입냄새가 코로 들어와 하마터면 질식할 뻔했지만. 특히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애가 꽤나 미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가슴도 빵빵하고.
그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숨을 죽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큭큭 웃어버렸다. 그러자 뒤에서 쫓아오던 아이들과 레빌이 겁을 집어먹고 제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그들의 구두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자 그는 몸을 홱 돌리더니 크게 윽박질렀다.
“빨리 오지 않고 뭐해? 이 조그만 벌레들아. 나중 너희가 춤추는 것을 보고 잡아먹을지 살릴지 결정할 거니까 알아서들 잘해. 만약 잡아먹는다면 그래도 여기까지 와준 수고로 이빨로 꼭꼭 씹지 않고 꿀꺽 삼켜주마.”
“아까 살려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수진의 애처로운 비명에 거인은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