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눈을 다 뜨자 방금 비명이 들렸던 오른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돌 (거인의 기준으로는 돌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몸을 숨길 수 있는 크기의 바위였다)과 나무들만 보일 뿐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내가 꿈을 꾸었나? 정신 좀 차려야겠군.”
말을 내뱉자마자 거인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앉더니 한 손으로 눈을 비비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오른쪽 귀를 힘차게 팠다. 그의 손가락 끝에 누런 귀지 덩어리가 붙어 나왔고, 손톱으로 그것을 툭 튕기자 돌 뒤에 숨은 아이들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자신의 머리통만 한 귀지 폭탄에 그들은 기겁했지만 끽소리조차 내지 못하였다. 거인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크게 기지개를 켰고, 동시에 귀가 멍해질 정도로 우렁찬 하품을 내뱉었다.
“우와앙~”
온 세상이 떠나갈 듯한 하품소리가 계곡을 때리고 과수원 전체로 굽이굽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하품하면서 내뱉은 거센 숨바람이 아이들이 숨어있는 돌을 향해 직접적으로 불어왔다. 이안이 팔로 수진의 어깨를 감싸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녀가 날아갈 뻔하였다. 그러나 최악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것에 섞인 지독한 하수구 냄새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 고통이었다.
거인은 그 후로도 여러 번 하품을 더하여 그들에게 고통의 시간을 연장시키고는 자리에서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그 크기에 다들 할 말을 잃어버렸는데 과보족 용사 ‘따따’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올려져 있었다. 마치 걸어 다니는 작은 산과 같았다. 거인은 외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순간 사탕을 빨듯이 두 뺨이 쏙 들어가더니 아래를 향해 퉷 내뱉었다. 입에서 누리끼리한 가래침이 튀어나와 목표로 삼은 오른쪽 돌에 정확히 맞췄고 끈끈한 시럽처럼 쭈르르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히힛, 이번에도 또 명중이다.”
손뼉 치며 좋아라하는 그와 달리 아이들의 머리와 온몸은 그의 침으로 적셔졌다. 썩어가는 시궁창 냄새가 침에서 진동했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대로 뒤집어쓴 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명중시킨 돌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겠다고 다가오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잠이 완전히 깨자 거인은 옆으로 펼쳐 놓은 자루로 다가가 그 안을 뒤적거렸다. 복숭아나무 개수를 세는 것 같았다. 영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가까이 심어진 나무들로 다가가 양손으로 그것들을 쭉쭉 뽑아 올렸다. 떨어진 복숭아까지 손으로 다 쓸어 담고 다시 개수를 세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자루를 홱 집어던지고 고래고래 악을 지르며 무섭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돌 뒤에 숨은 아이들은 너무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거인의 얼굴이 악마처럼 변하고 침이 소낙비처럼 땅으로 쏟아져 내렸다.
“에잇,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여? 내일모레 열리는 자기 생일잔치에 뭐, 과일이 필요하다고? 그놈 이름이 ‘발로르’인가 ‘말두르’인가, 복숭아 파이가 먹고 싶으면 지가 만들 것이지 왜 나보고 시켜? 눈도 못 뜨는 장님 주제에 마치 지가 왕인 것처럼 행세하는 데, 에잇, 진짜 눈뜨고 못 봐주겠네. 에잇, 짜증 나. 나이가 많아서 형님이라고 불러주면 감지덕지나 할 것이지, 지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야. 그깟 파이는 그래, 내가 어떻게 만들 수가 있다고 쳐.
도대체 어디 가서 여자들을 데려오라는 거야? 이미 움직이는 건 죄다 돌로 변했는데. 눈도 못 뜨면서 엄청 밝히기는. 쳇, 안되면 돌로 변한 과보족 여자 아무나 품 안에 던져주지 뭐. 아휴, 열 받아 미치겠네.”
거인은 제자리에서 쿵쿵 뛰기도 하고 주먹으로 땅을 치기도 하면서 마구 화를 냈다. 마지막에는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입에 넣고 껌처럼 무섭게 씹어대다가 옆으로 퉷 내뱉었다. 얼마간 그렇게 짜증을 더 부리더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체념한 듯 지친 표정을 띠며 한쪽 어깨에 힘겹게 자루를 둘러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나자 아이들은 그의 뒤를 조심히 미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지막한 언덕이 나타나고 넘어가자 또 다른 언덕이 나타났다. 거인이 사라진 언덕 끝에 거의 다다를 무렵, 앞장서 가던 카할이 움찔하며 몸을 황급히 낮추었다. 그의 다급한 몸짓에 수진과 이안도 덩달아 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그들은 배를 깔며 기어올라 언덕 끝에 도달했고 그제야 고개를 조금씩 들어 올렸다.
다른 곳과 달리 눈이 거의 쌓이지 않은, 자갈과 흙으로 덮인 황무지가 그들 앞에 쭉 펼쳐져 있었다. 그 끝자락에 어마어마하게 크고 괴기스러운 '붉은 성'이 위협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성의 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성문을 제외하고 밖을 향해 뚫려있는 건 창문 같은 것조차 전혀 없었다. 과연 저 안에 숨을 쉴 수 있는 산소가 충분히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문은 아주 굳게 닫혔고, 밖에서 지키는 자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위로 길게 뻗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울퉁불퉁한 겉 표면을 따라 흐르는 진득한 액체의 색이 어찌나 진한지 ‘검붉다’란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한마디로 기괴하고 우중충했다. 성의 색깔만으로도 보는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더욱 공포를 자아내게 만든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성의 지붕이었다. 검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드래곤 한 마리가 그 위에 웅크리며 있었던 것이다. 마치 몸 아래에 둥지라도 깔고 앉은 듯 드래곤은 똑바로 앉은 채 고개턱을 살짝 내려 시선을 정면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카할이 지니고 다니는 단도의 두 배 정도 크기의 뾰족한 가시들이 머리 정수리부터 시작해 척추를 따라 꼬리까지 일렬로 꽂혀있고, 끝이 화살표 모양을 한 꼬리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들려있었다. 아이들이 있는 위치에서 보면 드래곤의 정수리 위로 화살표 꼬리가 머리장식처럼 바로 이어 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한동안 그것을 관찰하였다. 움직이지 않는 굳은 청동이었지만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 일어나기만 해도, 저기서 금방 날개를 펴서 파닥거리며 이리로 날아올 것만 같았다.
공포감에 침만 꼴깍 삼키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어느새 뒤쫓아 온 레빌이 옆으로 기어 오더니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진짜 기분 나쁜 곳이네. 너희가 저기를 들어가겠다고?”
레빌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말이다. 저 굳게 닫힌 성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가니? 아무리 봐도 위험해. 괜히 생죽음 당하지 말라고.”
아이들은 그의 말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꽉 막힌 건물은 정말로 처음이었던 것이다.
“오늘처럼 거인이 밖으로 나올 때 몰래 숨어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카할의 물음에 레빌은 그다지 신통한 답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반대했다.
“오늘은 거인이 어쩌다 나온 날이고. 가끔 마을로 오는 것으로 보아 자주 외출은 않는 것 같더군. 그러니 하루가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어떻게 알고 계속 기다릴 수 있겠니? 더군다나, 자 봐라, 성문의 양 옆으로 막힌 데가 전혀 없어 숨을 데도 없잖아?”
“아, 진짜 저기를 어떻게 들어가나? 이거 큰일 났네.”
당황한 이안이 입을 열며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수진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지어지고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이안이 왜 그러냐고 눈동자로 묻자 그녀는 밝은 어조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에게 아주 좋은 수가 생각났어.”
숲길 위로 커다란 자루들이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들고 다니는 것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매우 뚱뚱한 자루들이 아이들과 레빌의 등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자루에 든 것은 선물이 아니라 식량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진과 카할, 레빌의 등에는 자루가 하나만 올려져 있었지만 이안은 두 개를 등에 짊어지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머리 위에 한 개가 더 얹어져 있었다. 머리 위의 것은 나무 넝쿨로 묶어 그의 턱 아래에 단단히 고정되었기에 까딱 고개를 잘못 돌리거나 균형을 잡지 못하면 자루와 함께 뒤나 옆으로 넘어져 흡사 목이 꺾일 위험이 있었다. 수진은 처음엔 걱정을 했지만 뱀파이어는 목이 잘리지만 않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레빌의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레빌은 제일 앞에서, 그 뒤를 수진과 카할이, 좀 떨어져서 이안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짐을 나르는 나귀처럼 한 발 한 발 조심이 내디뎠다. 특히 이안은 자신이 먹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바리바리 힘들게 짊어져야 하는지 화가 났지만 앞의 친구들을 슬쩍 쳐다보며 참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온전히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 집까지 거리가 반이나 남았지만 자루 때문에 이미 너무 지쳐버려 그들은 중간에 잠시 쉬어야 했다. 아이들은 그제야 무거운 짐을 내리고 눈 바닥에 뻗어버렸다. 이안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가오자 카할이 겨우 일어나 그의 머리에서 짐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오의 밝은 햇살이 큰 나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눈꽃과 나뭇잎, 줄기와 가지들이 서로 그림자놀이를 하면서, 누워있는 그들의 몸에 얼룩 반점을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했다. 게다가 밝은 대낮에는 ‘알유’가 활동을 안 한다기에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하늘과 나무를 쳐다보는 그들 중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들었던 계획에 대해 다들 속으로 곰곰이 따져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몇 분이 그렇게 지나가고, 카할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일어나 앉아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진의 의견이 가장 좋은 것 같아. 우리 그냥 하자.”
이안은 누운 채 한 손으로 뒷목을 쓰다듬다가 그 말에 고개를 훽 돌렸다. 그리고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비죽거렸다.
“절대 안 돼. 난 죽어도 못해.”
“그럼 넌 더 좋은 계획이 있는 거야? 어디 한번 말해봐.”
“지금은 없어, 수진. 하지만 오늘 밤에 꼭 생각해 낼께.”
“오늘 밤 지나고 생각 안 나면 어떡할 건데. 바로 내일모레라잖아. 내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우리 모두 오늘부터 꼬박 이틀간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고. 시간이 없어, 이안!”
이안이 있는 쪽으로 돌아누우며 째려보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레빌이 두 번째로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는 다정하고도 은근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히잉, ‘우리 모두’에 나는 포함 안 되는 거다. 그렇지?”
“실은, 아저씨께 저희와 같이 가자고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아저씨도 같이 가요.”
그녀가 누운 채로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애원했다. 그러자 마치 저승사자가 잡으러 온 마냥 깜짝 놀란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불안스레 왔다 갔다 하며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소리냐? 내가 거기를 왜 가? 난 곱게 죽고 싶지 거인 입 속에 들어가 죽기는 싫다. 도대체 왜 나를 갖다 붙이는 거야? 토르의 망치를 찾으러 온 것은 너희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야지. 나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잔뜩 흥분한 그가 제자리에서 팔딱팔딱 뛰며 요란스레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요동치 않은 얼굴로 일어나 앉아 그를 향해 똑 부러지게 따졌다.
“저희들은 총 3명이잖아요. 4명이 되어야 거인과 짝이 맞지요. 아저씨 빼고 다 돌로 변해서 데리고 갈 자도 없잖아요. 그러니 아저씨도 같이 가셨으면 해요. 부탁드려요.”
“부탁이고 뭐고 싫어. 난 절대 저기 못 들어가, 절대로! 저곳에서 죽기 싫단 말이다. 난 죽기 싫어. 앙앙앙~”
그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온 몸을 흔들어대며 아기처럼 보채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이안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향해 어떡할 거냐고 쏘아보았다. 정작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데 어른 혼자 발버둥치고 울고 떼쓰는 장면이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레빌에게는 목숨이 걸린 아주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런 그를 우리는 정말로 이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아까 샨샨의 집에서 그를 울릴 뻔 한 카할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저씨 말이 맞아. 그에게 같이 가달라고 요구하는 건 너무 큰 무리야.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도 잘 알잖아, 수진?”
그런데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그에게 몰래 윙크를 했다. 그러자 카할이 신호를 알아듣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우선 안심시키려는 척 이런저런 말을 하며, 아예 드러누워 발버둥치고 있는 레빌 곁으로 다가갔다. 마치 세 살짜리 아이를 보채듯 쯧쯧쯧 하며 그의 등을 어루만져주자 레빌이 울음을 그쳤다. 카할은 감정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그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아저씨, 잘 아실 거예요. 저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딥언더니아인이 아저씨를 영웅인 척하는 거짓말쟁이라고 놀렸었나요? 사기꾼이라는 별명은 또 어떻고요? 이젠 지겹지 않으세요? 당신을 놀렸던 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진짜 영웅이 되어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요, 바로 지금이에요. 이 기회를 잡으세요. 토르의 망치를 가지고 저와 함께 딥언더니아로 돌아가면 아저씨는 진짜 영웅이 되는 거예요. 그 유명한 용사 ‘막심’보다도 아저씨가 더 유명해질 거라고요. 아무도 더 이상 아저씨를 사기꾼이라 부르지 않고 ‘딥언더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사 레빌’이라 대대손손 칭송할 거예요. 그리고 결투장에 세워진 막심의 전신상 옆으로 아저씨 전신상이 더 크게 세워질 거고요. 상상만 해도 근사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네?”
순간 레빌의 마음에 파도와 같은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눈 앞에 어떤 장면이 떡하니 나타났다.
한 손에는 커다란 자루를, 다른 손엔 토르의 망치를 든, 태양 아래 번쩍번쩍 빛나는 자신의 전신상이었다. 왕께서 자신에게만은 재료로 늘 쓰던 대리석 말고 특별히 황금을 명하신 것이다. 그동안 놀리며 비웃던 이웃과 친구들 모두가 자신의 상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아,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용맹한 딥언더니아 남자로 태어나 영원히 남을 명예와 존경을 위해 이깟 목숨이 뭐 그리 아쉽다고.
방금 전까지 울며 떼쓰던 그의 얼굴에 전혀 다른 빛이 감돌았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사에게서 드러나는 결연한 의지와 굳은 각오였다. 그는 카할의 손을 덥석 잡더니 강하게 흔들어대며 까닥 잘못되면 ‘저승 직행열차’의 탑승자 명단에 낄 것을 당당히 공표했다.
“좋다. 나도 너희를 돕겠다. 토르의 망치를 되찾아 당당하게 딥언더니아로 돌아가자꾸나.”
레빌까지 결정을 내리고 나자 이안 홀로 반대해봤자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쯤 되자 수진은 한층 고무되어 자신의 계획이 꼭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레빌이 가장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안은 그녀가 예전의 겁 많던 그녀가 맞나 싶어 잠시 의아했지만 우선 믿고 따르는 수밖에 별수 없었다.
어느새 오후로 들어서는 햇살을 감지한 그들은 다시 자루를 메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알유가 돌아다니기 전에 어서 집에 도착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