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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pr 18. 2020

6. 과보족 마을 - 1

 6. 과보족 마을


 다음날 아침 레빌과 아이들은 과보족 마을로 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먼저 사다리를 타고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조심하라는 경고가 들렸다. 그리고 자루 더미가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레빌이 위에서 소리쳤다.

 

 “각자 들어라.” 


 쾌청한 아침, 나무 사이로 맑은 햇살이 비치자 어제 목격한 알유 같은 괴물은 없다는 듯 새침을 딱 떼며 겨울 숲이 싱그럽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곳곳에 놓인, 눈이 살짝 덮인 돌덩이들이 이곳에서 일어난 비극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것들 사이를 지나가자 아이들의 마음은 다시금 불편해졌다. 그들은 그것들을 밟지 않으려고 요리저리 피해 다녔지만 레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밟히면 밟고 간간히 뻥 차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수진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산딸기와 블루베리 등 야생과일들이 얼린 채 달려있어 아침으로 먹기에 충분했다. 다들 레빌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데 문득 커다란 바위 하나가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자세히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때 레빌이 바위 앞에 멈춰 서더니 그들을 불러 세웠다.


 “얘들아, 이 분이 바로 위대한 족장 ‘따따’이시다. 이리 와서 문안 인사드려야지.”


 그제야 아이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그가 가리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그 바위는 바로 돌로 변한 과보족 용사였던 것이다. 대머리인 용사는 걸으면 출렁거릴 아랫배 아래로 삼각팬티만 입은 채 다른 옷은 전혀 걸치지 않았다. 뱀을 한 마리씩 귀 양쪽에 걸고 또 양쪽 손목에 감았는데, 네 마리 모두 주인처럼 단단히 굳은 채 앞을 응시하며 위협적으로 입을 쫙 벌리고 있었다. 위대한 족장의 두 눈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는데 만약 돌이 아닌 실제 그 눈을 바라본다면 바로 심장마비에 걸릴 듯 부리부리했다. 오른손에는 긴 창이 들려있고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상체를 뒤로 젖혀 곧바로 창을 던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따따’는 과보족을 이끄는 족장이자 위대한 용사라 칭송을 받았지. 과보들 중 가장 힘이 세고 용맹스러웠지만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거든. 완전 이방인인 나에게도 먼저 다가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자상하게 물어봐 주곤 했었는데. 그만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어버리다니.”


 레빌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잠시 옛 회상에 잠긴 듯했다. 아이들도 조용히 ‘따따’를 쳐다보며 그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레빌이 눈을 뜨더니 몸을 틀어 바위 옆으로 돌아가자 그들도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던, 나무 기둥으로 쳐진 테두리벽의 허물어진 틈을 지나 수십 개의 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초원에 도착했다. 바위 하나하나가 아까 ‘따따’보다 훨씬 컸고 모양도 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마치 아이스크림콘이 땅으로 떨어져 거꾸로 엎어진 모습이었고, 또 어떤 것은 뱀 2마리가 서로 엉켜있는 듯 구불구불 말린 모양이었다. 레빌의 집처럼 끝이 버섯모양을 가진 것, 고깔모자의 모습, 피라미드와 파도가 높게 이는 모양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공동체를 이루지만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는 바위의 아랫부분에는 문이 뚫려 있고, 특히 가장 거대한 파도 바위에는 여러 개의 문들이 위아래로 달려있었다. 모두 과보들이 사는 주택이란다. 사과나무가 군데군데 심어져 있고 맑은 시냇물이 마을을 관통하여 졸졸 흘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예전의 활동적이며 생명 충만했을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타깝고 끔찍한 광경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문 안으로 도망치려다 돌이 되어 버린 아이, 공포에 질린 아기를 향해 팔을 쭉 뻗으며 달려오다가 그대도 굳어버린 엄마,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과일바구니와 썩어빠진 사과들. 손질한 가죽을 걷는 도중에 돌로 변해버린 여인네들.


“못된 거인들과 남자가 여기로 침범한 거야.”


 레빌의 언급에 아이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부분의 과보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을 향하여 놀라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남자과보들이 몽둥이나 도끼, 창 등을 들고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떼 지어 달려오다가 그대로 돌로 굳어져버렸다. 급한 나머지 자기의 팔에 매달린 뱀을 풀어 지금 레빌이 있는 쪽을 향해 던지려다 그대로 동작이 멈춘 소년,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문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할머니, 아이들을 안고 도망치다 이쪽을 뒤돌아보고 변을 당한 부모들. 적의 급박한 출현에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하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꼴로 만들어놓다니.”


 수진이 흐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괜한 분풀이로 땅을 여러 번 발길질하였다. 카할과 이안은 그녀처럼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심란한 표정들이었다.      



 레빌과 아이들은 과보족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거의 마을이 끝날 때쯤 구석에 홀로 세워져 있는, 커피잔 모양의 바위 집으로 레빌이 다가갔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찰나, 그 크기와 비교하여 그들이 문득 작게만 느껴졌다. 햇빛이 안으로 잘 반사되었기에 집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한가운데 난로와 그 위로 커다란 무쇠 솥이 얹어있었다. 벽에는 갖가지 연장 도구와 불룩한 주머니들이 걸려있고, 방 한쪽 바닥에는 색색의 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물품들이 과보 사이즈에 맞게 컸다. 


 난로 뒤로 한 과보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하는 모습이었다. 거의 수진의 몸만 한 초록 덩어리를 칼로 자르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레빌이 가까이 다가가더니 석상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애틋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샨샨, 오늘도 널 보러 왔어. 물론 그저께도 왔었지. 친한 사이라면 친구의 불행을 그냥 눈감고 있을 수는 없잖아? 마침 집에 손님이 들어 치즈가 벌써 떨어지기도 했고 말이야. 언제쯤 마법이 풀려 예전처럼 같이 놀 수 있을까? 그리운 친구.”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그 초록 덩어리로 달려들었다. 그의 어깨에 멘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그것을 살살 긁자 그 밑으로 노란색 치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빌은 거의 자신의 머리 두 개 만 한 덩이를 잘라내어 자루 속에다 집어넣었다. 자루의 1/4이 치즈로 가득 찼다. 

 그는 아이들을 불러내 방 한쪽에 차곡차곡 배열해놓은 바구니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안의 어깨를 딛고 오른 레빌이 초록색 바구니 뚜껑을 열자 그 안에 하얀 밀가루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는 수진에게 자루를 받아서 밀가루를 가득 퍼 담았고, 그 옆 바구니에서 땅콩과 견과류까지 자루 끝이 더 이상 조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쟁여 넣었다. 그렇게 나머지 자루들도 갖가지 식재료들로 엄청 무거워졌다.

 

 우연히 바구니들 뒤에 숨긴 꿀 항아리를 발견하자 그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내질렀다. 항아리 입구 모서리를 꺾은 허리로 매달린 채 오른손에 든 물병을 아래로 향하여 꿀을 담으려 했다. 하지만 꿀의 수면이 낮아진 상태여서 수면에 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서운 집념으로 계속 시도했고 그럴수록 몸을 지탱하고 있는 허리가 휘청거렸다. 까닥 항아리 안에 빠질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자 이안이 그를 도우러 모서리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내려주자 그는 항아리 깊숙이 들어가 드디어 그것을 뜰 수 있었다. 그는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꿀병을 가슴에 소중히 품고 내려왔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아저씨. 친구를 방문하여 슬픈 영혼을 달래준다는 건 다 핑계고 식량 훔치러 오는 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마구 가져가도 돼요?” 


 레빌이 꿀병을 아주 조금 자리가 남아있던 자루에다 무자비하게 쑤셔 넣자 카할이 무거워진 자신의 자루를 들여다보며 불평했다. 그러자 그가 흥분하여 윽박질렀다.


“훔쳐가다니, 이건 ‘빌려가는’ 거야. 암, 잠시 빌리는 거지. 너희들은 그 유명한 외국소설 ‘허클베리 핀의 모험’도 안 읽어봤냐? 전혀 모르겠다고? 이런 무식한 것들. 그럼 잘 들어봐. 그 책의 가장 유명한 부분을 말이야.

허클베리 핀은 이렇게 말했어.” 


 그러면서 외우기 시작하는데 아예 한 페이지를 통째로 읊어댔다. 자신이 마치 허클베리라도 된 것처럼 그는 쇳소리를 섞어 간지러지게 흉내내기까지 했다.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기회만 있으면 언제나 꼭 닭을 훔치라고 말했었지요. 만약 내가 닭을 원치 않으면 그걸 원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고, 또 착한 일은 잊혀지지 않고 두고두고 고마움을 받는 법이라나요. 

(~생략~)

해가 뜨기 전 아침이면 나는 옥수수밭으로 몰래 기어 들어가 수박이며 참외며 호박이며 햇옥수수며 그런 것들을 슬쩍 빌려왔습니다. 아빠는 언젠가 갚을 생각만 있다면 그런 것들을 빌려와도 나쁘지 않다고 했지요.” 

(민음사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P144)



 "나도 꼭 갚을 생각이란 말이야. 그러니 친구 사이에 잠시 빌려와도 전혀 나쁘지 않아. 그런데 나의 우정을 그리 오해하다니. 친구 샨샨, 어서 마법에서 풀려나 우리의 깊은 우정은 이렇게 마구 빌려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면 얼마나 좋겠니?”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 채 울먹거리자 안 그래도 못난 얼굴이 더 못생겨져 보였다. 카할이 당황하여 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오해를 했어요. 제발 울지 마세요.”


 안정을 되찾은 레빌은 바구니 뚜껑 위를 뛰어다니며 이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매고 왔던 자루들은 정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해졌다.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아이들은 과연 이것을 짊어지고 집에까지 갈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여기 바구니에서 쬐금, 저기 바구니에서 쬐금씩 빼내서는 자신의 옷 속과 주머니에 마구 쑤셔 넣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라도 바구니를 비워낸 후 좀 더 쑤셔 넣기 위해서 말이다. 게다가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하도록 시켰다.

 


 대충 일이 끝나자 그는 한 곳에 모아둔 자루들로 다가와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쉬는 동안, 카할은 화장실이 급하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진과 이안은 그동안 여유를 갖고 집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놓인 대나무 바구니 앞에서 그들은 자동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이안, 이건 예전에 절벽을 건넜을 때 탔던 바구니 크기와 비슷한걸. 그것보다 좀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추억에 잠긴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근데 이것이 더 튼튼해 보이네. 이걸 썼으면 히든벅이 추락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하하하.”


“혹시 그에게 이곳에 온 걸 알렸어?”


“아니, 안 했어. 위험하다고 못 오게 할까 봐.”


 문득 바구니 옆으로 벽에 세워놓은 한 더미의 나뭇가지들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멀리서는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앵두만 한 크기의 열매 여러 개가 서로 뭉쳐 붉은 꽃을 이루고 있었다. 잎은 하나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녀가 열매 가까이 코를 갖다 대자 향긋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확 올라왔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졌다. 가지 하나를 집어 이안에게 보여주자 그는 매우 흥미를 보이며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아보고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다. 별안간 그의 눈에 광채가 돌더니 후다닥 달려가 레빌의 잠을 깨웠다.


“혹시 이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레빌의 반쯤 떠진 눈이 그의 손에 쥔 나뭇가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그것은 내가 갖다 놓은 거야. 뭔지는 모르는데 학들이 따서 잘 먹기에 샨샨에게 선물로 주려고 딴 거야. 그런데 절대 먹지는 마렴. 내가 그날 아침에 하나 먹어봤는데 하마터면 몇 년 전에 먹은 쥐고기가 넘어올 뻔했거든. 얼마나 맛이 없던지. 관상용으로만 끝내야 해.”


“그날 아침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건가요?”


“그날 아침? 못된 거인들이 침입한 바로 그날 말이다.”


 이안은 뭔가 눈치챈 듯 열매를 하나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머리를 그것으로 딱 치며 흥분하여 소리쳤다.


“아, 바로 이것이었어, 이것 때문이었다고! 이 열매는 아주 희귀한 거야. 나도 실제 보기는 처음인데 예전 와이즈맨이 빌려준 ‘마법의 약초도감’이란 책에서 그림을 본 적이 있어.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그것이 맞는 것 같아. 이름이 뭐였더라? 아, 이름이.. 맞아. ‘캉무’야. 이걸 먹으면 불운한 기운이나 저주, 주문, 마법 등을 피할 수 있데. 즉 마법에 걸리지 않도록 방어해주거나 마법을 파괴시키는 거지. 그래서 아저씨가 돌로 변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학들도.”


 이안은 마치 소중한 보석이라도 얻은 듯 아주 기뻐했다. 용변을 보고 막 돌아온 카할과 옆에 있던 수진은 그와 함께 캉무열매를 가지에서 따서 바닥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다 따고 보니 양이 꽤 되었다. 이안이 자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완두콩을 쏟아내고 대신 그것을 집어넣었다. 카할과 수진도 그를 따라하자,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레빌이 벌떡 일어나서는 돌풍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콩과 식량들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는 그것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자루 하나를 더 챙겨오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다가 결국 여기서 어떻게든 다 싸가지고 가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루로 쓸 만한 것을 찾으라고 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이 일에 흥미를 잃은지라 찾는 흉내만 내다가 잽싸게 문 밖으로 도망쳐나갔다.  

“얘들아, 어디 가니? 자루 찾아야지!”


“여기는 아무리 봐도 없는 것 같아요. 다른 데서 찾아볼게요.”


 수진의 변명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그들을 믿고 기다리느니 성미 급한 레빌이 어떻게든 방도를 찾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루고 식량이고 다 잊어버린 채 멀리 펼쳐져 있는 과수원을 향해 내달렸다. 눈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싱싱한 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살짝 경사진 내리막 땅을 가꾸어서 만든 과수원은 굉장히 방대해서 그 끝이 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안이 나무 위로 올라가 복숭아 몇 개를 따서 밑으로 던졌다. 수진이 한 입 깨물자 달짝지근한 과즙이 쭈르륵 흘러내렸다. 카할이 성큼 먹으면서 감탄했다.


“와, 이곳 복숭아는 참 달고 맛있네.”


 세찬 바람이 아래에서 그들을 향해 쏴아 불어왔다. 그런데 바람 속에 축축하고 고약한 하수구 냄새가 섞여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다. 또다시 그 역겨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번엔 쇠가 갈리는 소음과 천둥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호기심이 든 그들은 소리를 쫓아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무척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과수원이 이어져 있는 계곡에 한 거인이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거인의 벌려진 입에서 바람이 튀어나와 그들이 서 있는 곳으로 세게 불어왔다. 정말로 역겨운 시궁창 하수구 냄새가 심하게 풍겨왔다. 입 안으로 보이는 삐죽삐죽 날카로운 이빨들이 서로 부딪치며 쇠 갈리는 소리가 나고, 코까지 골자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온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옆으로 복숭아가 가득 달린 나무 몇십 그루가 뿌리 채 뽑혀 통째로 커다란 자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외눈박이 거인족인 ‘키클로스프’다.”


 카할이 조용히 말하자 이안과 수진은 가까이 있던 복숭아나무 뒤로 얼른 숨어버렸다. 이안은 겁이 났지만 나무 위로 올라가 고개를 살짝 내민 채 자세히 관찰해 보았다. 거인의 키는 엄청났고, 누런 가죽을 덧대서 만든, 한쪽 어깨를 훤히 드러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누런 얼굴의 이마 중간에 큰 눈 하나가 달려있고, 그 아래 코와 입도 다 큼지막했다. 피부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처럼 부스럼 같은 것이 많이 나 있고, 날카로운 이빨들은 고르지 못해 뒤죽박죽 엉켜있는데 음식물이 군데군데 끼어 지저분하고 치석도 검게 보였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카할이 조심조심 거인의 얼굴 바로 오른쪽에 놓인 바위 뒤로 다가갔다. 그가 안전하다는 손 표시를 하자 이안과 수진도 그리로 다가가 얼른 숨었다. 바위 옆으로 카할의 머리가, 그 위로 수진의 머리가, 그 위로 이안의 머리가 삼층이 되어 동시에 내밀어졌다. 거인은 점점 심하게 코를 골더니 몸을 한번 뒤척이자 지진이 일면서 주변 나무에서 다 익은 복숭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가 깨기 전에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 잘못하면 망치를 찾기도 전에 잡혀 먹힐지도 몰라.”


 수진이 귓속말로 전하자 그들은 몸을 낮춰 조심스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발자국 떼지 않아 수진이 바닥 위로 튀어나온 돌을 미처 보지 못해 그만 걸려 넘어졌다. 긴급 상황 때마다 그녀가 넘어져서 일을 만든 적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이번에도 역시나 그냥 넘어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얏~”


 그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카할과 이안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방금 떠나왔던 바위 뒤로 다시 뛰어가 숨었다. 이안에게 잡혀 온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입을 막은 그녀의 두 손은 덜덜 떨렸다. 그들은 거인을 주시했다. 제발 깊은 잠에 빠져 그녀의 비명을 듣지 못했기를.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 간절히 바라는 예상은 늘 빗나가고, 정말 생각하기조차 싫은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기 마련이다. 


 거인의 코 고는 소리가 점차 줄어들더니 눈꺼풀에 경련이 일며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그들은 얼른 고개를 집어넣고 마치 전신마취가 된 것처럼 그대로 바위 뒤에 딱 붙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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