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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un 21. 2020

7. 발로르의 생일잔치 - 2


“어차피 이 안으로 들어온 이상 저 문 말고 나갈 길은 없어. 그리고 저 문은 너희가 절대 열지 못할 정도로 아주 아주 무겁지. 히히히. 너희 목숨은 이미 내 손안에 있는 거야. 형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 살려두고 아님 바로 잡아먹을 테다. 약속은 무슨 약속, 우하하하~”


 거인의 말에 수진은 겁을 집어먹어 또다시 비명을 질렀고 눈물이 핑 돌았다. 레빌의 얼굴은 면사포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이따금씩 헛걸음질도 쳤다. 본래 용감한 카할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빨간 립스틱이 두껍게 칠해진 윗입술을 세게 깨물어 아랫니들에 립스틱이 잔뜩 묻어났다. 이안은 몸을 떨거나 입술을 깨물거나 하진 않았지만 자꾸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마도 비상시에 도망갈 출구를 찾는 것만 같았다. 


 문득 그들 머리 위의 도깨비불이 환하게 타올랐다. 복도의 양쪽 벽을 따라 쭉 매달려있는 요상하게 생긴 돌들이 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박쥐 날개가 달려있고 꼬리가 기다란 원숭이 조각들이었다. 그들을 향하여 부릅뜬 그것의 눈동자에 광기가 서려있고, 비웃는 듯이 삐죽 올라간 입술 밑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모두 99개나 되는 것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양쪽 벽면에 일렬로 들러붙어 있었다. 빛과 그림자로 인해 매끄러운 눈동자들이 아래로 걸어가는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도깨비불이 위쪽을 다 비추지 못해 천장이 얼마나 높은 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위의 어둠 속에서 약한 신음소리가 들리다 안들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만약 혼자 이곳에 있다면 단 몇 분 만에 심장마비가 올 것 같다고 수진은 생각했다. 제일 뒤에서 따라오던 이안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뱀파이어의 눈으로 도깨비불이 꺼진 캄캄한 복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예민한 동물적 감각은 어둠의 장막 저 어딘가에 뭔가가 숨어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네발 달린 짐승의 터벅터벅 걷는 소리도 언뜻 들려왔다. 소리가 나자 그는 재빨리 뒤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왠지 오면 안 될 곳을 온 것처럼 불안해지고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토르의 망치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작은 부분이나마 이곳에 남겨두고 갈 것 같다는 찝찝함, 그리고 누군가가 지금 자신을 시험하고 있고 일부러 이곳으로 부른 것 같은 기묘한 느낌 등이 뒤섞여 굉장히 기분 나쁘고 마음이 무겁고 앞으로 나아가기가 두려웠다. 제발 이 예감이 틀린 것이기를. 



 아이들과 레빌은 거인을 따라 무덤 같은 복도를 깊숙이 들어갔다. 대체 언제까지 가려는 걸까? 이러다 지옥문 앞까지 가는 건 아닐는지.


 거인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종종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가슴은 벌렁벌렁 뛰곤 했다. 드디어 저 끝으로 불빛이 조금 새어 나오는 문이 나타났다. 거인이 커다란 문손잡이를 확 잡아당기자 환한 노란 불빛이 한꺼번에 그들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 그리고 화끈거리는 열기가 뒤섞여 그들을 반겨주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들은 경악했고 숨이 턱 막히며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세 명의 거인들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옆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왔다 갔다 움직이며 정신없이 주위를 맴돌았다. 벽난로 위로 커다란 은쟁반이 올려져 있는데 반짝반짝 잘 닦여져서 방안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었다. 마치 거기에 똑같이 생긴 거인들이 한 명씩 더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전에 레빌이 목격했었던 키클로프스들이 아닌 아주 생소한 모습의 거인들이 었던 것이다. 거의 키클로프스와 비슷한 크기인데, 다섯 거인이 모두 모이니 마치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기와 복숭아 파이 등 여러 음식이 올려진 거대한 테이블의 정 중앙 자리에는 겹이 진 두꺼운 눈꺼풀로 외눈을 완전히 덮은 거인이 앉아있었다. 그의 이름은 ‘발로르’였다.


 레빌이 수레에 탄 그를 목격했었는데 그의 생김새는 특이하고 괴상했다. 이마 정중앙에 박힌 외눈이 얼마나 큰지 거의 얼굴의 반을 차지할 정도였고, 그것을 덮은 두꺼운 눈꺼풀 밑으로 쇠스랑이 꺼풀 끝을 감은 채 매달려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발로르의 눈은 전쟁시에만 떠지는데 스스로 무거운 눈꺼풀을 뜨지 못해, 네 명의 장정들이 눈꺼풀 끝에 달린 쇠스랑을 말아 올려주어야 한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떠진 눈이 바라본 곳은 예외 없이 완전히 초토화될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단다. 그리하여 ‘파괴안(眼)’을 지닌 그가 거인들 중에서 가장 우대를 받았고, 오늘 유일하게 그를 위한 생일파티까지 열어준 것이다. 비록 감긴 눈이었지만 자신 앞에 놓인 고기를 잘도 집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의 오른쪽으로, 윗니 두 개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무릎까지 길게 자라난 ‘착치’라고 불리는 거인이 있었다. 


 이빨의 끝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마치 조각을 할 때 쓰는 끌처럼 생겼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힌 후 이빨 끝으로 고기 덩어리를 찍어 긴 혀끝으로 그것을 빼내어 먹었다. 다른 음식도 똑같이 먹었다. 대머리인 얼굴 위에는 종기들이 울퉁불퉁 튀어나와있는데, 마치 화분이라도 되는 냥 종기 위로 초록색 이끼와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여기저기 흙도 묻고 지저분한 얼굴과 몸이었지만 미백치약으로 이 닦기를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어 그의 두 앞니만큼은 아주 새하얗게 빛이 났다.  


 파티 주인공의 왼쪽으로 백 개의 팔이 등과 옆구리에 달린 거인 ‘브리아레오스’가 앉아있었다. 


 손들이 마치 해파리 촉수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고기와 술잔들을 들어 그의 입안으로 쉴 새 없이 들이 붇고 있었다. 빈 잔은 테이블로 돌아갔고 남아있는 손이 술 항아리를 들어 잔을 다시 채운 후 그의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고도 아직 남은 손들이 많았기에 발로르와 착치를 위해 그들의 잔도 계속 채워주는 등 서빙 서비스까지 제공해주었다. 그리고도 남아있는 손들에는 칼과 창, 방패 등이 들려있어 파티를 즐기면서도 무장을 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들어갔을 때 테이블 옆에서 홀로 왔다갔다 부산스레 움직였던 거인은 바로 지하세계의 관리자인 ‘토백’이었다.


 다른 거인들보다 조금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몰골만큼은 그중 최악으로 끔찍하게 흉측했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행여나 그 모습이 꿈에라도 나올까 봐 그들이 다시 쳐다보기를 주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의 등은 꼽추처럼 툭 튀어나왔고 얼굴은 호랑이를 닮았는데 머리 위로 두 개의 날카로운 뿔이 달려있었다. 그의 눈은 모두 세 개인데 호랑이의 눈동자와 닮았고, 눈꺼풀이 아예 없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알 자체도 겉으로 튀어나와 360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다. 그래서 그는 정면뿐 아니라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을 동시에 다 볼 수 있었다. 양쪽으로 길게 찢어진 빨간 입술 안으로 뾰족뾰족 나있는 검은 이빨들이 드러났다. 자세히 보니 송곳니에 붉은 살덩이가 끼어있기까지 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누런 머리카락은 마치 번개를 맞은 듯 하늘을 향해 바짝 서 있고, 온몸은 황토색이었는데 피부에 부스럼이 나있었다. 온전한 옷을 입은 다른 거인들과 달리 잡풀로 대충 만든 초록색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그 밑으로 나온 다리도 여기저기 관절뼈가 튀어나오고 혹이 달려있는 등 매우 징그러웠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그래도 다음에 비하면 강도가 약한 편이었으니, 그들을 몸서리치게 만든 아주 결정적인 특징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향해 앞으로 내민, 붉은 피로 범벅된 그의 두 손이었다. 지하세계 관리자인 토백은 피로 물든 두 손으로 저승에 온 자들을 쫓아다니며 잡아먹기를 즐겼고, 죽은 자들은 그에게 먹히지 않으려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평소 죽은 자나 추한 것을 주로 접하던 토백 앞에 어여쁘게 치장한 여자들이 등장하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 개의 눈알 모두가 몇 초 동안 그들을 향해 정지하였다. 관찰이 끝나자 눈알들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문에 서 있는 거인을 향해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이, 펜카르. 저 조그만 것들은 뭐여?”


 문에서부터 그들을 데리고 들어온 키클로프스의 이름이 ‘펜카르’였다 보다. 그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와 생일잔치 주인공인 발로르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형님,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여자들을 대령하였습니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저 여자들이 형님을 위해 춤까지 춘다고 합니다. 비록 형님이 앞을 보지 못하지만 당신의 존귀한 탄생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제가 이날을 위해 무희들을 준비했습니다. 저 펜카르 가요.”


“근데 덩치가 너무 작잖아? 차라리 그냥 잡아먹는 게 더 즐겁겠는데.”


 발로르가 입을 열기에 앞서, 토백이 피 묻은 양 손을 비비적거리고 입맛을 다시며 먼저 말했다. 착치는 마침 날카로운 이빨 끝에 걸려있던 고기 덩어리를 얼른 혀로 빼내 꿀꺽 삼키고는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는데 이빨 끝으로 침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브리아레오스는 앞에 놓인 음식들을 집으려던 수십 개의 손동작이 별안간 딱 멈추더니 곧 등에서 창과 칼, 방패가 넘어와 앞으로 쭉 내밀어졌다. 


 펜카르를 따라 옆에 나란히 선 무희들은 거의 정신이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눈물도 나려 했지만 서로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아이들은 딥언더니아의 스톰펌 왕이 서재에서 해주었던 무서운 경고와 호통이 그제야 진정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문을 열어줘서 들어가면 안에서 거인이 귀여운 표정으로 웃음을 띠며 “어서 오세요. 자, 망치 여기 있습니다.”라고 할 것 같으냐? 이 바보들아, 거인이 얼마나 크고 무시무시한지 알기나 하느냐?.....]


 하지만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한들 너무 늦어버렸다. ‘토르의 망치는 고사하고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란 의문이 그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였다.


 발로르를 제외한 나머지 거인들이 먼저 먹겠다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아우성쳤다.


“내 손으로 저것들을 주물럭거려 피로 양념을 한 후 꼭꼭 씹어 먹을 테다.”

“무슨 소리, 이 앞니로 탁탁 찍어 조각들을 낸 후 한 조각 한 조각 음미하며 삼킬 테다.”

“니들이 앞으로 나가기 전에 내 칼과 창이 먼저 저것들을 바닥에 꽂아버릴 걸. 내가 꽂힌 칼과 창을 뽑기 전까지 너희는 절대 빼어낼 수 없지.”

“흥, 니들이 여기까지 다가올 때면 이것들을 벌써 내 목젖으로 넘어가고 있을 테다.”

 

 말을 마친 펜카르가 순식간에 무희들을 양 손바닥으로 쓸어 담더니 그의 못생기고 커다란 입 바로 위까지 가져갔다. 입이 크게 벌려져 시커먼 목젖이 훤히 보이자 그의 손들이 조금씩 열렸는데 안에서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탕탕탕.”


 여태껏 잠자코 있던 발로르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자 테이블뿐 아니라 붉은 성 전체가 쿵쿵쿵 하고 흔들렸다. 음식 접시들이 테이블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지거나 부딪쳐 쨍그랑거렸다. 그 소리에 더 화가 치밀어 오른 발로르가 시뻘게진 얼굴로 노발대발했다.


“으악, 내 생일날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예의도 없는 놈들. 당장 하던 짓 멈추고 내 앞에 대령시키지 못할까! 안 그럼 모두에게 벼락을 때릴 테다, 이 찌질이 못나고 밥맛없고 재수 없는 놈들아.”


  펜카르가 아쉽다는 듯 손바닥 위에 올려진 이들을 향해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테이블로 다가와 상 위에 내려놓았다. 음식 그릇들 사이에 서 있는 무희들은 마치 테이블을 장식하는 꽃처럼 보였다. 브리아레오스의 긴 손들이 재빨리 주위의 그릇들을 가장자리로 밀어버리자 즉석에서 이들을 위한 넓은 무대가 만들어졌다. 


 발로르는 직접 그들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옆에 있는 브리아레오스와 착치에게 자기의 눈꺼풀을 아주 조금만 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듯 두 거인이 엉기적거리며 다가와 눈꺼풀 아래 달린 쇠스랑을 양쪽에서 조금씩 말아 올라갔다. 천천히 그의 눈이 떠지었다. 살짝 떠진 그의 눈동자는 야광등과 같은 파란빛을 띠는 하얀색 공일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아이들과 레빌의 몸이 갑자기 마비되었다.


“더 이상은 힘듭니다, 형님. 저들을 바로 즉사시킬 수 있으니까요.”


 펜카르의 애원에 그는 알겠다고 답한 후 다시 덮으라고 명령했다. 쇠스랑이 아래로 내려와 눈알을 완전히 덮자 그들의 마비된 몸은 풀어졌다.

  

“저들의 상을 눈에 넣었기 때문에 눈은 감았지만 이제 움직임을 대충 볼 수가 있다. 자, 어서 춤을 추어라. 파티의 흥을 돋아라. 어서~”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레빌이 휘파람을 불며 신호를 보내자 아이들은 어젯밤까지 연습했던 춤 대형으로 나란히 섰다. 거인들이 보는 위치에서 이안, 카할, 레빌, 수진 순이었다. 무서운 표정의 거인들이 불량한 태도로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레빌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핸드백에서 오래된 MP3와 소라껍데기를 꺼냈다. MP3로 음악을 틀고 그 앞에 소라껍데기를 바로 갖다 대자 음악이 껍데기의 고동을 통과하여 나왔다. 볼륨이 몇 배 이상 커졌고 온 방안으로 빵빵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노래는 대만 유명가수가 부른  ‘섹시한 스튜어디스’이었다. 남자의 미성과 강렬한 비트가 섞여있는 이 곡은 사실 그녀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롤리마을에서부터 가지고 온 그녀의 MP3에 저장된 모든 곡을 레빌에게 들려주었는데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 이유는 제목이 가장 섹시하단다. 그는 그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100퍼센트 확신하건대, 거인들은 섹시하고 야한 것을 좋아해. 그러니 우리도 섹시한 춤을 준비해야지. 내가 그 분야에 전문가이니까 나만 믿어.”


 그가 장담하며 선택한 이런 ‘섹시한’ 노래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거인들은 반주만 듣고 처음에는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되돌아왔다. 비트에 맞춰 무희들의 치맛자락이 서서히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 곡의 안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문가인 레빌이 도맡아 짰는데 솔직히 딱 한 가지 동작밖에 없었다.

 

 그저 엉덩이를 최대한 흔들면서 한 손으로 턱 아래를 받치고 다른 손은 허리를 잡은 채, 입술을 최대한 동그랗게 모아 앞으로 쭉 내밀면서 “우우~~”라고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이 동작이 반복되었다. 아이들은 과연 그가 확신하는 것처럼 정말로 섹시한지 어떤지 도저히 알 수 없었으나 이런 방면에선 어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별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정말로 열심히 춤을 췄다. 


 그런데 말이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객 입장에서는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해 보였다. 아니, 눈 감은 발로르까지 그렇게 여겼다. 이건 마치 소들이 떼 지어 “우우~”거리는 것 같았고, 왜 또 저렇게 엉덩이를 흔들어대는지 정말 짜증이 났다. 


 곡이 중간쯤 왔을 무렵 거인들의 표정은 가히 심상치가 않았다. 무섭게들 인상을 팍팍 쓰고 숨소리가 씩씩 커져 갔다. 오직 레빌 만이 그런 반응을 싹 무시한 채 스스로의 춤에 도취해갔고, 그러다 흥분하여 순간적으로 원래 안무에도 없던 동작이 불쑥 튀어나왔다. 웨딩드레스 앞자락을 들어 올려 양쪽 다리를 번갈아 위로 쭉쭉 뻗기 시작한 것이다.


 전혀 면도가 안 된, 갈색 털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종아리를 보자 거인들은 충격에 휩싸여 그만 숨을 멈추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실수로 레빌의 면사포가 뒤로 넘어가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자 그들은 경악하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토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들고 있던 술잔을 벽으로 홱 던지며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술맛 떨어지게 시리 도저히 못 참겠네. 다리털 보인 놈 내가 먹어치우겠어.”  


 브리아레오스가 수십 개의 팔로 그를 붙잡아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빌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그의 팔과 다리에 매달려 말리기 시작했다. 수진이 재빨리 음악을 끄고 그에게 돌아서는데 한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형사고가 또 터진 것이다. 레빌을 말리는 중에 카할이 잘못해서 그의 왼쪽 가슴을 쳤는데 그만 그것이 옷 아래 배꼽 근처로 쭉 내려온 것이다. 오른쪽 가슴은 그대로 위에 빵빵하게 붙은 채 말이다. 


 이쯤 되자 거인들의 표정이 어땠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힉힉, 헉헉, 컥컥, 크으으~" 


 그들의 몸에 두드러기와 경기가 일어나더니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충격에서 제일 먼저 빠져나온 펜카르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형님을 향해 애원 복걸하며 사죄하였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줄도 모르고 괜히 데려와서 형님 기분만 상하게 하고, 술맛도 완전 떨어지게 하고. 아예 지금 다 먹어버리심이 어떠실지? 그럼 기분이 좀 풀리지 않겠어요?”


 발로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나머지 거인들끼리 이들의 생사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진은 레빌의 배꼽으로 내려온 가슴을 재빨리 올려주고 면사포도 앞으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발로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저희가 준비한 춤이 하나 더 있거든요. 이번 것은 마음에 꼭 드실 거예요. 네?”


 다른 거인들은 괜히 눈 버리지 말고 당장 잡아먹자고 아우성을 쳤지만 발로르는 가만히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좋다. 하나 더 준비했다니 까짓것 보지 뭐. 우린 손해 볼 것이 없으니까.”


 과연 그는 거인들 사이에서 형님이라 부를만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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