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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Nov 29. 2021

13. 차가운 이별 - 1

13. 차가운 이별 


 그날 밤 과보족 마을에서는 축제가 열리었다. 돌마법에서 풀려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도와준 레빌, 이안, 수진, 카할을 위해 일부러 큰 잔치를 벌일 예정이었다. 또한 부활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시하고 기념하기 위해 거인족의 오랜 전통인 ‘거인들의 댄스파티’도 함께 열기로 결정되었다.


 사실 딥언더니아의 ‘학과의 결투’가 열리던 그날이 원래 전통적으로 파티가 치러지는 날이었지만 이미 그때에는 과보족이 돌로 변해있었기에 열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년 일어나는 행사를 DNA 속에 뚜렷이 각인하고 있는 학들은 오랫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습관적으로 그날 아침이 되자 보금자리를 떠나 날아올랐다. 그리고 딥언더니아로 바로 향하였으리라.


 오늘처럼 늦은 밤, 나무 위에서 곤히 자고 있을 그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족장 따따는 이 유서 깊은 전통을 지키지 않고 올해를 그냥 넘기자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바삐 음식과 필요한 여러 가지들을 준비시키느라 하루 종일 온 마을이 들썩였고 계속 쿵쿵 울려댔다.


 레빌의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말끔히 세수하고 숙녀옷방 미니어처에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수진은 청바지에 분홍색 니트를 입고, 잘린 머리를 감추느라 푸른 리본핀을 이용해 뒤로 넘겨버렸다.      



 요툰하임에 어둠의 장막이 두껍게 내려오자 주변 사물이 서로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무척 깜깜해졌다. 몰려든 구름들이 가느다란 달빛조차 가리고 있어 혹 태초의 암흑이 여기에 재현된 것이 아닌 가 싶을 정도로 심히 어두웠다. 하지만 과보족 마을 입구는 작은 불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횃불들이 땅에 박혀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지상으로 내려온 것처럼 빛을 발산하였다. 한껏 배불리 먹고 난 과보들과 그날의 영웅인 레빌과 아이들은 서로 웃고 떠들며 반짝이는 밝음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가까이 다가온 어린 과보 소년 곁을 빙 둘러쌌다. 그리고 한 명씩 그의 손목에 둘린 작은 뱀을 떨리는 손으로 살살 쓰다듬어보았다. 피부가 미끈미끈하고 차가운 것이 느낌이 이상했다. 한 번은 아이의 귀에 달린 뱀이 카할의 손목으로 떨어져 그가 벌벌 떨며 어서 떼어내라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보로동동동 보로동동동~”


 그들 뒤에 위치해 있는 고깔모자 모양의 집 안에서 힘찬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과보들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깜깜한 그 안에서 족장 따따가 예복을 입은 채 벌떡 튀어나왔다. 북을 든 악사 여러 명이 뒤따라 나왔다.

 

 성장을 차린 따따의 모습에 아이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의 머리 위에는 학의 깃털과 그 앞으로 호박 보석들이 멋들어지게 엮어진 머리띠가 왕관처럼 얹어있었다. 양팔 구멍이 나 있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천을 예복으로 둘렀는데 앵두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거기에는 과보들의 상징이자 동반자인 누런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습이 천 아래 테두리를 따라 띠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위로는 그들이 사냥하는 모습, 나무 열매를 채집하는 모습, 가죽을 다듬는 모습 등 일상생활의 장면들이 그려졌다.


 예복의 제일 위로 그의 가슴을 덮은 면에는 그들의 신화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있었다. 한 과보가 달리기 시합을 하듯 노란 태양을 따라 달리다가 넘어져 땅에 파묻혔고 그의 몸이 뿌리로 변하여 나무로 변해가고 있는 내용이었다.

 

 따따는 천이 구겨지지 않도록 한번 털더니 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보통 때는 한 마리만 감고 있던 손목과 팔에 여러 마리의 뱀들을 칭칭 감았는데, 그것들 각자도 뭔가를 준비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지그재그 빳빳이 들어 올리고 빨간 혀를 현란하게 입 밖으로 내밀었다.


“얍!”


 힘찬 기압 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악사들의 북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지고 박력 있어졌다. 족장은 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은 뒤통수를 때리면 특 튀어나올 것처럼 잔뜩 힘을 주었고, 혀를 뱀처럼 날름거리며 절도 있게 한 발씩 번갈아 들어 올린 후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돌더니 앞으로 세 번 텀블링을 했다. 그의 팔목과 귀를 휘감은 뱀들도 그와 함께 몸을 돌리며 잔뜩 흥분해서는 뱀 춤을 추어댔다.  


 과보들이 요란한 함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작으로 몸을 흔들었다. 혀를 날름거리고 한 발씩 들어 올린 후 엉덩이를 씰룩하며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돌고는 텀블링 대신 앞으로 폴짝 세 번을 뛰었다. 레빌과 아이들은 눈치껏 동작을 엇비슷하게 따라하느라 노력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고조되자 족장은 이제 텀블링 대신 뜀박질을 하면서 불타는 횃불을 땅에서 뽑아 들고 마을 입구를 나섰다. 그 뒤를 악사들과 횃불을 든 과보들이 뒤따랐다. 처음부터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즉 춤을 추면서 어두운 숲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타오르는 불의 가위가 넓게 펼쳐진 검은 캔버스를 두 동강으로 자르며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리라.


 횃불의 행진이 길게 이어져갔다. 불은 커다란 북소리에 맞춰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돌며 앞으로 나아가면서 천천히 주변 어둠을 몰아내고 따듯한 온기를 숲에 나누어주었다. 잠을 자고 있던 학들이 깨어나 휘둥그레진 눈으로 보다가 나무 둥지 위로 황급히 날아올랐다. 그러나 아이들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학보다 큰 거인들이 그들을 둘러싸며 보호해주었기 때문이다.


 레빌은 춤을 추는 샨샨의 어깨 위에 앉은 채 두 손을 이리저리 꼬아대고 어깨를 들썩여 흥을 자아냈다. 카할은 좀 전에 뱀을 만지게 해 준 소년과 어느새 친해져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아갔다. 이안과 수진은 행렬의 끝에서 이젠 제법 그럴듯하게 춤을 추면서 따라갔다.

 


 꽤나 숲 깊숙이 들어왔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때였다. 이안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행렬에서 벗어나 왼쪽으로 펼쳐진 어두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놀란 그녀가 손목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저리로 가야지, 왜 이리 가는 거야?”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빠른 걸음으로 무작정 그녀를 끌고 갔다. 북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마치 이 세상에 암흑과 그와 그녀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든 그녀는 그를 멈추게 하려고 제자리에 서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드디어 걱정하던 때가 온 거로구나. 내 피를 원하는 거야. 낮에도 이상하게 쳐다보더니만 아아, 이 일을 어쩌지?’


 질질 끌리어간 그녀의 눈앞에 나무가 없는 작은 평지가 나타났다. 마침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가느다란 달빛이 그곳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곳 중간에 허연 커다란 뭔가가 서 있었다. 유령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그녀가 살짝 비명을 지르자 이안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히든벅이야!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


 그녀가 다시 쳐다보니 정말로 그였다. 그녀는 이안이 잡고 있던 손을 딱 뿌리치고 히든벅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그의 옆구리를 푹 껴안았다. 그가 꼬리와 머리 위의 뿔을 살짝 흔들어대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던데 다행히 건강해 보이는군.”


 이안이 옆으로 다가오자 그는 그의 모습도 유심히 살피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건강을 확인한 듯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다. 수진이 그에게서 떨어지자 그는 앞으로 몇 발자국 나아가더니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잠시 주위가 전등을 끈 것처럼 어두워졌다가 다시 달빛이 흩어진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그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의 우아하고 새하얀 뿔이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가운데, 못 보던 지난 몇 달 사이에 뿔이며 몸집이 더 자란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가 평소 알고 지내왔던 그가 아니라 어느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 불편함이 그에게서 발산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에게서 어떤 강한 권위와 딱딱하고 똑 부러지는 기계 같은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는 그런 분위기에 맞게끔 진지하면서도 낮게 깔린 기계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그가 정말로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그녀였다.

  

“그래, 수진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녀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녀가 이안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집요한 시선을 무시한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집으로 보낼 때가 된 거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녀는 그때 빅락으로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여기 남아서 결코 좋을 일도 없고 말이야.”


 히든벅의 말에 그녀는 당혹하여 바로 맞받아쳤다.


“전 집에 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 여기 남을 거라고요. 이안과 함께 계속 새로운 모험을 할 거예요.”


“아니야, 넌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어. 여기 남으면 안 돼!”


 이안은 순간적으로 목청을 높이었다. 화가 난 그녀가 분통을 터트렸다.


“안 간다니까. 그때 공룡이 있었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겠다고 그냥 둘러댄 것뿐이야.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그녀가 안 가겠다고 계속 고집을 피우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든벅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달래는 어조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이안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넌 롤리마을로 돌아가 주어야만 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샌드펜 편지를 통해 다 들었단다. 너의 꿈에 대해서 말이야. 결국 마왕 블랙수트가 이안이 아닌 너를 선택했더군. 한번 잘 생각해보렴. 왜 그가 브라잇 동맹 출신이 아닌 너를 선택하고 이용하려 하는지. 그래, 바로 마왕이 이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란다. 너를 볼모로 잡고서 그를 흔들려고 결심한 거지. 이미 상황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를 것 같구나. 그러니 더 이상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넌 여기서 그만 빠져주어야 해. 그럼 널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는 거지. 롤리마을로 돌아가면 아마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못 할 게다. 부디 마음 상해하지 마렴. 이게 현재로서 너의 친구를 진심으로 위하는 유일한 길이니까.”


 수진의 뺨 위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서 바라보는 이안의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그였기에 겉으로 조금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은 채 냉랭하게 고개를 숲 쪽으로 돌려버렸다. 수진이 그를 쳐다보며 말없이 애원했지만 그는 딴 곳만 쳐다보며 외면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이내 그녀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부우웅~ 부우웅~” 


 구름이 군데군데 깔린 하늘의 저 멀리에서 부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지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로펠러 소리였다. 그러자 히든벅이 하늘을 휙 둘러보더니 서둘러 그녀를 재촉했다.


“타고 갈 게 오고 있군.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단다.”


“이안, 정말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그녀는 떨리지만 침착함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듯이 한 자 한 자를 강조하며 물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듯, 희망과 실망이 반반 섞인 애처로운 얼굴로 말이다. 그는 딴 곳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내 얼음 같은 냉정함을 도로 되찾았다. 그의 목소리조차 처음 그녀를 대했을 때처럼 무뚝뚝하게 들려왔다.


“응, 난 네가 떠났으면 좋겠어. 매번 너를 보살펴주기도 이제 지치고 짜증 나.”


 마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그녀의 눈앞에 별들이 슉슉하며 마구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고 미치도록 슬펐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했는지 조금도 모르겠다는 저 괘씸하고 뻔뻔한 그의 얼굴. 그녀의 내부에서 화가 확 솟구쳐 오르더니 부글부글 분노의 마그마가 말로 분출되어 나왔다.


“으악, 이 냉혈 뱀파이어야. 나도 더 이상 너랑 같이 있기 싫어!”


 독하게 쏘아붙이며 그녀는 그를 완전히 외면한 채 돌아섰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녀의 온몸은 분노의 불길을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와 꼭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었다. 


 그때 그들 머리 위 상공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엄청난 소음으로 변하였다. 드디어 그 주인공이 구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커다란 노란 천을 아래로 매달은 중형 드론 (Drone)이었다. 그리고 드론의 바닥 쪽으로 아마존 (Amazon)이라는 회사명이 찍혀있었다. 아마존 회사는 사람까지도 배달하는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나 보다. 

 드론이 그들 앞 평지 위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드론의 배 밑으로 천이 길게 늘어지며 떨어졌다.


 히든벅이 가까이 다가가서 앞발로 그녀가 편히 탈 수 있게 천을 펴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쿵쾅거리며 달려와 먼저 그 안으로 몸을 던져버렸다. 그러면서 핸드백에서 파란 총알을 꺼내 이안 쪽으로 훽 내던졌다. 그들과 반대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며 누운 그녀의 뺨은 마치 잔뜩 심술이 난 6살 아이처럼 부풀어 올라 씩씩거렸다. 


“미리 예약한 대로 한국의 롤리마을로!”


 히든벅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드론의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갔다. 상공으로 오르자 천이 그녀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푹 쳐지며 드론이 순간 기우뚱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배신감과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혀 무섭고 뭐고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드론이 점점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땅에서 멀어져 갔다. 곧 구름 사이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안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일부러 그녀 앞에서는 내색을 안 했지만 그녀가 떠나자 무척 서운하고 슬픈 그였다. 마치 이 넓은 우주에 자신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철저히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고독하고 외로웠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너무 외로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히든벅이 말없이 잠시 옆에 있어주었다. 


 이안은 소음이 사라진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흐린 하늘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벌어질 일에 더 이상 엮이지 않겠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거예요. 그렇죠? 아마 곧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고 새로운 친구도 사귈 거고요. 그렇죠?”


 그의 말에 동조하듯 히든벅의 뿔 달린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이안은 이내 누르고 있었던 슬픔을 목소리에 완전히 실은 채 말을 이어갔다.


“나도 잊고, 카할도 잊고, 히든벅도 잊을 거예요. 그렇죠?”


“그래, 차갑게 대하며 보냈으니 더욱더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최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니? 너를 위해서도 또한 그녀를 위해서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그렇게 한 거고요. 하지만...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 걸까요?”


“당연하지. 허나 곧 괜찮아질 거다. 너에겐 그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주어졌다는 걸 항상 잊으면 안 돼.”


“더 중요한 일이요?”


“그래, 브라잇 동맹원 모두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이지. 이제 곧 마왕이 전면전에 나올 거야. 그리고 너와 대면하겠지. 두 번째 전쟁인 ‘블랙수트마키아’가 다시 여기 ‘하하호호히히’를 덮칠 거란 불안한 예감이 자꾸만 드는구나. 아니, 이미 저 세상의 시계탑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쟁의 표식이 이미 나타났단다. 우리는 이제부터 준비해야 해. 그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희생과 노력,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앞으로 많이 힘들어질 거다. 각오 단단히 해야만 해.”


“전 그와 싸우기 싫어요. 삼촌 제임스가 왕좌에 앉아 있으니 저 대신 싸울 거예요.”


“훗, 그는 적통자가 아니야. 마왕도 이미 그 점을 눈치채고 너와 가까운 수진에게 접근한 거고. 결국 네가 브라잇 동맹을 이끌어야 한단다.”


“싫어요!”


“이안,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네가 일룸니아 왕국의 적통왕자로 태어난 이상 자연적으로 부여된 굴레이자 의무인 셈이지. 너는 그럴 운명을 타고 태어난 거야. 선택의 여지는 없다. 참 희한하게도 ‘1차 블랙수트마키아’ 시절, 동맹을 만들었던 위대한 왕 이안 1세와 이름까지 똑같으니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이 아닐는지.”


“전 지금 인간이 아니고 뱀파이어라고요. 이전과 달라요!”


“뱀파이어는 브라잇 동맹원이 아니더냐?”


“제 말은 일룸니아 왕국 안에서 말이에요. 그들이 뱀파이어를 적통 왕자로 인정하겠어요?”


“해야 할 거다. 아니, 해야만 해. 그 밖에 다른 수가 없으니.”


“쉽진 않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 당연히 그럴 거야.”


“만약 왕국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저를 거부하면요? 피를 먹고사는 뱀파이어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면은요? 그러면 어떡하죠?”


“흠. 그렇지만 넌 여전히 마법지팡이를 갖고서 마법을 쓰지 않느냐? 어쩌면 인간일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하게 되었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강한 자를 왕으로 세우려 할 게다. 게다가 넌 일룸니아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적통자이니 명분은 충분해.”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걱정은 그만하렴. 내가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 자, 과보족 마을로 어서 돌아가자꾸나. 요툰하임의 숲에서는 밤에 무리에서 떨어져서 오래 있는 게 아니란다. 어둡고 악한 기운이 워낙 강해서 어떤 위험에 닥칠지 모르거든.”


 말을 마친 히든벅이 잽싸게 몸을 돌려 나무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 역시 밤눈은 밝은지 나무에 부딪치지 않고 잘도 헤치며 나아갔다. 이안은 그를 따라가려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이 점점 흩어지며 드러난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달이 투명하게 비치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도 밝은 달빛 몇 줄기가 하늘에서 길을 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수진은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옆자리가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외로움과 침묵이 그녀를 대신하여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그는 하늘색에 가까운, 빛을 반사하는 눈동자로 드론이 사라진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틋하지만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나를 잊겠지만 난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제 안녕, 나의 반짝이는 보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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