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녀가 이안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집요한 시선을 무시한 채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집으로 보낼 때가 된 거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녀는 그때 빅락으로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리고 여기 남아서 결코 좋을 일도 없고 말이야.”
히든벅의 말에 그녀는 당혹하여 바로 맞받아쳤다.
“전 집에 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 여기 남을 거라고요. 이안과 함께 계속 새로운 모험을 할 거예요.”
“아니야, 넌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어. 여기 남으면 안 돼!”
이안은 순간적으로 목청을 높이었다. 화가 난 그녀가 분통을 터트렸다.
“안 간다니까. 그때 공룡이 있었을 때는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겠다고 그냥 둘러댄 것뿐이야. 지금은 전혀 아니라고.”
그녀가 안 가겠다고 계속 고집을 피우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든벅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달래는 어조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이안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넌 롤리마을로 돌아가 주어야만 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샌드펜 편지를 통해 다 들었단다. 너의 꿈에 대해서 말이야. 결국 마왕 블랙수트가 이안이 아닌 너를 선택했더군. 한번 잘 생각해보렴. 왜 그가 브라잇 동맹 출신이 아닌 너를 선택하고 이용하려 하는지. 그래, 바로 마왕이 이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란다. 너를 볼모로 잡고서 그를 흔들려고 결심한 거지. 이미 상황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를 것 같구나. 그러니 더 이상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넌 여기서 그만 빠져주어야 해. 그럼 널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는 거지. 롤리마을로 돌아가면 아마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못 할 게다. 부디 마음 상해하지 마렴. 이게 현재로서 너의 친구를 진심으로 위하는 유일한 길이니까.”
수진의 뺨 위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옆에서 바라보는 이안의 가슴이 저미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그였기에 겉으로 조금의 동정심도 내보이지 않은 채 냉랭하게 고개를 숲 쪽으로 돌려버렸다. 수진이 그를 쳐다보며 말없이 애원했지만 그는 딴 곳만 쳐다보며 외면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이내 그녀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부우웅~ 부우웅~”
구름이 군데군데 깔린 하늘의 저 멀리에서 부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커지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프로펠러 소리였다. 그러자 히든벅이 하늘을 휙 둘러보더니 서둘러 그녀를 재촉했다.
“타고 갈 게 오고 있군.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단다.”
“이안, 정말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그녀는 떨리지만 침착함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듯이 한 자 한 자를 강조하며 물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듯, 희망과 실망이 반반 섞인 애처로운 얼굴로 말이다. 그는 딴 곳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러나 이내 얼음 같은 냉정함을 도로 되찾았다. 그의 목소리조차 처음 그녀를 대했을 때처럼 무뚝뚝하게 들려왔다.
“응, 난 네가 떠났으면 좋겠어. 매번 너를 보살펴주기도 이제 지치고 짜증 나.”
마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그녀의 눈앞에 별들이 슉슉하며 마구 떠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고 미치도록 슬펐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했는지 조금도 모르겠다는 저 괘씸하고 뻔뻔한 그의 얼굴. 그녀의 내부에서 화가 확 솟구쳐 오르더니 부글부글 분노의 마그마가 말로 분출되어 나왔다.
“으악, 이 냉혈 뱀파이어야. 나도 더 이상 너랑 같이 있기 싫어!”
독하게 쏘아붙이며 그녀는 그를 완전히 외면한 채 돌아섰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녀의 온몸은 분노의 불길을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와 꼭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었다.
그때 그들 머리 위 상공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엄청난 소음으로 변하였다. 드디어 그 주인공이 구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커다란 노란 천을 아래로 매달은 중형 드론 (Drone)이었다. 그리고 드론의 바닥 쪽으로 아마존 (Amazon)이라는 회사명이 찍혀있었다. 아마존 회사는 사람까지도 배달하는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나 보다.
드론이 그들 앞 평지 위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드론의 배 밑으로 천이 길게 늘어지며 떨어졌다.
히든벅이 가까이 다가가서 앞발로 그녀가 편히 탈 수 있게 천을 펴려고 했다. 그때 그녀가 쿵쾅거리며 달려와 먼저 그 안으로 몸을 던져버렸다. 그러면서 핸드백에서 파란 총알을 꺼내 이안 쪽으로 훽 내던졌다. 그들과 반대방향으로 얼굴을 돌리며 누운 그녀의 뺨은 마치 잔뜩 심술이 난 6살 아이처럼 부풀어 올라 씩씩거렸다.
“미리 예약한 대로 한국의 롤리마을로!”
히든벅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드론의 프로펠러가 힘차게 돌아갔다. 상공으로 오르자 천이 그녀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푹 쳐지며 드론이 순간 기우뚱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배신감과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혀 무섭고 뭐고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드론이 점점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땅에서 멀어져 갔다. 곧 구름 사이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안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표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일부러 그녀 앞에서는 내색을 안 했지만 그녀가 떠나자 무척 서운하고 슬픈 그였다. 마치 이 넓은 우주에 자신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철저히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고독하고 외로웠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너무 외로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히든벅이 말없이 잠시 옆에 있어주었다.
이안은 소음이 사라진 고요한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흐린 하늘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벌어질 일에 더 이상 엮이지 않겠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편안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거예요. 그렇죠? 아마 곧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고 새로운 친구도 사귈 거고요. 그렇죠?”
그의 말에 동조하듯 히든벅의 뿔 달린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이안은 이내 누르고 있었던 슬픔을 목소리에 완전히 실은 채 말을 이어갔다.
“나도 잊고, 카할도 잊고, 히든벅도 잊을 거예요. 그렇죠?”
“그래, 차갑게 대하며 보냈으니 더욱더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최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니? 너를 위해서도 또한 그녀를 위해서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그렇게 한 거고요. 하지만...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 걸까요?”
“당연하지. 허나 곧 괜찮아질 거다. 너에겐 그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주어졌다는 걸 항상 잊으면 안 돼.”
“더 중요한 일이요?”
“그래, 브라잇 동맹원 모두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이지. 이제 곧 마왕이 전면전에 나올 거야. 그리고 너와 대면하겠지. 두 번째 전쟁인 ‘블랙수트마키아’가 다시 여기 ‘하하호호히히’를 덮칠 거란 불안한 예감이 자꾸만 드는구나. 아니, 이미 저 세상의 시계탑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쟁의 표식이 이미 나타났단다. 우리는 이제부터 준비해야 해. 그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희생과 노력,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앞으로 많이 힘들어질 거다. 각오 단단히 해야만 해.”
“전 그와 싸우기 싫어요. 삼촌 제임스가 왕좌에 앉아 있으니 저 대신 싸울 거예요.”
“훗, 그는 적통자가 아니야. 마왕도 이미 그 점을 눈치채고 너와 가까운 수진에게 접근한 거고. 결국 네가 브라잇 동맹을 이끌어야 한단다.”
“싫어요!”
“이안, 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란다! 네가 일룸니아 왕국의 적통왕자로 태어난 이상 자연적으로 부여된 굴레이자 의무인 셈이지. 너는 그럴 운명을 타고 태어난 거야. 선택의 여지는 없다. 참 희한하게도 ‘1차 블랙수트마키아’ 시절, 동맹을 만들었던 위대한 왕 이안 1세와 이름까지 똑같으니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이 아닐는지.”
“전 지금 인간이 아니고 뱀파이어라고요. 이전과 달라요!”
“뱀파이어는 브라잇 동맹원이 아니더냐?”
“제 말은 일룸니아 왕국 안에서 말이에요. 그들이 뱀파이어를 적통 왕자로 인정하겠어요?”
“해야 할 거다. 아니, 해야만 해. 그 밖에 다른 수가 없으니.”
“쉽진 않을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 당연히 그럴 거야.”
“만약 왕국 마법사들과 마녀들이 저를 거부하면요? 피를 먹고사는 뱀파이어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면은요? 그러면 어떡하죠?”
“흠. 그렇지만 넌 여전히 마법지팡이를 갖고서 마법을 쓰지 않느냐? 어쩌면 인간일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하게 되었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강한 자를 왕으로 세우려 할 게다. 게다가 넌 일룸니아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적통자이니 명분은 충분해.”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
“걱정은 그만하렴. 내가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 자, 과보족 마을로 어서 돌아가자꾸나. 요툰하임의 숲에서는 밤에 무리에서 떨어져서 오래 있는 게 아니란다. 어둡고 악한 기운이 워낙 강해서 어떤 위험에 닥칠지 모르거든.”
말을 마친 히든벅이 잽싸게 몸을 돌려 나무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 역시 밤눈은 밝은지 나무에 부딪치지 않고 잘도 헤치며 나아갔다. 이안은 그를 따라가려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이 점점 흩어지며 드러난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달이 투명하게 비치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도 밝은 달빛 몇 줄기가 하늘에서 길을 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수진은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옆자리가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외로움과 침묵이 그녀를 대신하여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그는 하늘색에 가까운, 빛을 반사하는 눈동자로 드론이 사라진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틋하지만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나를 잊겠지만 난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제 안녕, 나의 반짝이는 보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