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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an 29. 2022

13. 차가운 이별 - 2  [THE END]

[ 에필로그 ]


 5월의 셋째 주 일요일 저녁이었다. 성큼 다가왔던 봄이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들자 롤리마을에서는 벌써부터 초여름 날씨가 기승을 부렸다. 집집마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텔레비전 소리와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등이 뒤섞여 마을 골목 어디를 가든지 속삭이는 정도의 배경음이 계속해서 깔리었다. 

 

 여름이 가까워짐에 따라 롤리마을의 명물인 초록갓 아이스크림 가게의 폐장 시간도 점점 늦어지는 중이었다. 수진과 말자 여사는 저녁을 먹은 후 8시쯤 그곳에 나와 앉아 지원이 서비스로 제공하는 ‘레드점핑초코의 아침식사’를 맛있게 떠먹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브라잇 동맹에서 보여주었던 그 엄청난 활기와 에너지를 그만 떠날 때 그곳에 남겨두고 와버렸는지 지금의 수진은 왠지 힘이 없고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의기소침한 것이 마치 딴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처음 여기 할머니 댁에 왔을 때보다 더 내성적인 몸짓과 표정으로 그저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간간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꺼내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고, 밀려드는 주문에 허리가 휘도록 바쁜 지원을 향해 감사인사를 전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 행인이 줄어들 때쯤 거리의 가게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하였다. 밤 10시 정시가 되자 피곤한 표정의 지원이 드디어 머리에서 초록갓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것을 손으로 살살 털은 후 계산대 위의 선반에 올려진 투명 플라스틱 상자 안의 모자 받침대에 그것을 소중히 걸었다. 예전엔 가게 안에서나 밖에서나 집 밖으로 나갈 때는 항상 쓰고 다녔었다. 그러나 골동품처럼 몇 대를 거쳐 내려오자 점점 낡아지고 내구성도 약해지기에 보존을 좀 할 필요가 있다 여겨 가게 안에서만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신 밖에서 쓸 튼튼하고 빳빳한 새 초록갓을 따로 마련하였다. 그는 그것을 곱슬머리 위에 바꿔 쓰고 대충 가게를 정리한 후 문 밖으로 나가면서 뒤를 향해 크게 외쳤다.


“열심히 일해! 내일 아침에 보자! 그리고 제발 갓 좀 건드리지 마. 알았지?”


 만약 마을 주민이 그를 보았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싶었을 것이다. 그가 가게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뻔히 아는 데 마치 누군가가 남아있는 듯이 행동을 했으니 말이다. 


 밖으로 나온 지원은 눈사람 모양의 문을 잠금장치와 자물쇠로 단단히 잠갔다. 그리고 노란 가로등 불빛이 발하는 거리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주말이지만 늦은 시골 거리에는 그 밖에 아무도 없었다. 아마 다들 벌써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리라. 그의 얼굴엔 오늘 하루도 무사히 평안하게 보냈다는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나른한 몸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롤리교회 앞을 지나 대로를 따라 내려갔다.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이었다.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거리 분위기에 그의 터벅터벅 구두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싶은 그때였다. 대로 반대편에서 한 젊은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원은 밤늦게 누구인가 싶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런데 젊은이의 행색이 참으로 별난 것이었다.    


 큰 키에 찢어진 청바지, 헐렁거리는 하얀 박스티를 입고, 화려하면서 배꼽까지 내려오는 긴 보석 목걸이를 걸었다. 그리고 유명 브랜드의 최신식 검정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힙합가수를 제외하고 저런 복장을 직접 이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보기란 처음이었다. 젊은이의 머리에는 커다란 챙모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는데 그의 갸름하고 하얀 턱만이 챙 밑으로 비칠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 동네 소속은 아닌 듯했다. 아마 도시에서 이곳 친척집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손님 같았다. 


 지원은 젊은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갓 앞 테를 살짝 들어 올리며 먼저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밤길 조심히 가세요.”


 젊은이가 지원의 옆을 휙 지나치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살짝 몸을 돌리었다. 지원도 의아한 표정으로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마치 모자를 통과하여 지원의 얼굴을 샅샅이 감상이라도 하는 듯 잠시 그렇게 있었다. 그의 모자 밑으로 한쪽 귀에 걸린 사파이어 귀걸이가 순간 반짝였다. 젊은이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눈길 조심하세요.”

 

 대꾸하는 젊은이의 목소리가 매우 허스키했다. 지원은 히죽거리며 그와 반대방향으로 몇 걸음 전진해 나갔다. 


‘구식 농담도 다하고, 참 재밌는 젊은이네. 이 더위에 눈이라니.’


 그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의 노란 불빛 아래 힙합 복장의 청년이 롤리교회로 향하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님을 뵈러 왔나 보다. 교회 지붕을 비추던 바로 옆 가로등이 여러 번 깜빡이더니 불이 나가버렸다. 고장이 났다 보다. 지원은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한 오 분쯤 지났을까? 그의 앞으로 하얀 뭔가가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잘못 본거려니 대수롭게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잠시 후, 하얀 것들이 우수수 뭉텅이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그가 얼른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에나, 5월의 초여름 날씨를 보이는 지금,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롤리마을 위로 하얀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어떤 두려움을 느끼며 달리기 시작했다. 주택들이 들어선 골목에 들어섰을 땐 이미 눈이 꽤 쌓여 구두가 푹푹 빠질 지경이었다. 갓 위에도 눈이 꽤 쌓였는지 머리를 누르는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기온이 무척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분명 코와 입으로 하얀 입김이 새어나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였다. 얇은 옷 아래 추위로 닭살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그가 문을 열려고 하였다. 그런데 순간 발이 꽁꽁 얼음이 된 것처럼 바닥에서 떼어지지가 않았다. 별안간 불안한 기운이 차가운 냉기처럼 발로부터 허리를 타고 올라와 그의 머리를 세게 강타하였다. 


‘아, 맞다! 그 청년.’ 


 눈길 조심하라는 농담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럴 수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두꺼운 구름들도 점점 개이었다. 그는 냉기를 털어내려는 듯 몸을 여러 번 털었다. 그리고 힘겹게 발을 떼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어떤 불운한 기운도 같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의 뒤에서 문이 세게 꽝 닫히었다.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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