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완전히 질려버린 인형이 드레스 자락을 잡은 손가락을 탁 펼치었다. 수진은 그대로 추락하여 핸드백 끈에 달랑달랑 매달리게 되었다. 수진은 몰랐지만 그녀의 발은 바닥에서 겨우 50센티 정도밖에 띄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몸을 계속 이리저리 흔들어 끈을 잡아당겼지만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뒤돌아 일행들을 향해 절규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카할, 어서!”
그제야 정신이 든 카할이 토르의 망치를 들고 테이블 위에 당당히 섰다. 인형은 그와 망치를 보더니 가소롭다는 어조로 비웃기 시작했다.
“요 쪼그만 게 감히? 기다려라. 곧 갈 테니.”
화가 난 그가 망치든 손을 위로 치켜들고 명령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쪼그만하다는 그 말 곧 후회하게 해 주마. 매운 망치 맛 좀 보아라!”
그는 온몸의 기를 망치로 모은 후 힘껏 그녀를 향해 내던졌다. 망치는 빙글빙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여 날아가서는 도자기 얼굴의 정수리 부분을 정확히 딱 때렸다. 그리고 스스로 후퇴하여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레빌과 이안은 처음 보는 망치의 위력에 감탄하였다.
찍혀 구멍이 생긴 부분에서 사방으로 금이 찍찍 그어지기 시작했다. 인형의 손에서 핸드백이 떨어지고 양손을 머리 옆으로 갖다 대었다. 그녀의 얼굴에 난 금 사이로 얼핏 도자기 방울이 보였다. 요툰하임의 생명체를 돌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것이었다.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인형의 입에서 새어 나오더니 검은 연기가 그녀의 정수리 구멍과 입으로 무시무시하게 품어져 나왔다. 수진은 그동안 가방을 들고 일행들이 있는 테이블로 마구 달려왔다.
“끼야아악~”
날카로운 괴음과 함께 인형 얼굴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방울도 같이 깨져나갔다. 그리고 몸 밑으로 금이 쩍쩍 나아가더니 도자기 드레스가 뭉텅 깨지며 부서져 내렸다. 레이디 포터리의 비참한 최후였다. 그녀의 머리와 온몸에서 새어 나온 검은 연기가 천장으로 모이더니 폭풍을 부르는 구름처럼 마구 소용돌이쳤다.
그들이 서 있는 바닥이 휘청거리고, 천장과 벽에서 대리석들이 떨어졌다. 아기천사 조각상들이 화산재처럼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곧 무너지려는 징조 같았다. 놀란 그들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샹들리에가 크게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테이블에서 벗어나자마자 곧 그것이 떨어져 테이블을 완전히 박살내어 버렸다. 유리파편들이 튀어 이안의 등을 긋고 지나갔지만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다행히 마법이 풀렸는지 다들 황금 카펫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문이 굳게 닫혀서는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다 함께 낑낑 밀고 당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안이 카할에게 다급히 외쳤다.
“망치로 부숴봐!”
카할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뒤로 물러서게 한 후 그는 망치를 힘껏 내던졌다. 대문이 단번에 부서졌다.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는 잔해를 통과하여 다들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한 명이 모자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레빌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다시 대문 자리로 되돌아와 성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저 앞 바닥에 구부리고 있는 그의 말라비틀어진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위로 서랍들이 날아다니고 주전자와 포크 등이 무기처럼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주변으로 대리석 돌들과 가루가 비처럼 떨어져 내렸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카할이 다급히 소리쳤다.
“레빌 아저씨, 어서 나와요!”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약간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발 앞 깨진 틈으로 커다란 다이아몬드 보석알이 박힌 채 반짝이고 있었다. 카할은 그것이 아까 레이디의 치마 안에 걸려있던 두상에 박힌 보석알 중 하나라는 것을 순간 알아차렸다. 인형이 깨지자마자 그것들도 따라서 사방으로 튀고 구르고 한 것이었다. 레빌은 그것을 가져가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서도 떠나지 못하고 두 손으로 낑낑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서 나와요. 보석은 그냥 두고요!”
카할과 수진이 울부짖었지만 그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요 예쁜 것, 넌 내 거야.”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의 아름다움에 확 사로잡혀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나 그에게는 황금과 보석을 목숨보다 더 끔찍이 좋아하는 난쟁이 딥언더니아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천장의 대리석 덩어리가 꿈틀하더니 움직이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고 했다. 카할과 수진이 공포의 외마디를 질렀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대리석이 추락해 큰 굉음과 먼지를 품어낸 후에야 그들은 겨우 눈을 떴다. 다행히도 이안이 재빠르게 구출해온 레빌이 그들 옆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뻔했던 것보다도 보석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성이 있는 비석에서 멀리 떨어져 섰다. 곧 비석이 와르르 무너지며 아래에 생긴 검은 구덩이 안으로 사라졌다. 구덩이는 휙휙 빠르게 커지더니 도망치려는 그들까지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깜깜한 암흑 속으로 빠진 그들은 강한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이리저리 마구 돌려졌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흐흠.”
레빌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푸른 것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다. 푸른 잔디가 바로 얼굴 밑으로 깔려 있었다. 눈동자를 아래로 돌려보았다. 엎드려진 카할의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레빌은 겨우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주변으로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지고 쫑알거리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파랑새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와 잠시 앉았다가 다른 새들과 함께 날아갔다. 이안과 수진은 그의 위쪽에 누워있었는데 서로 한 손씩 다정히 붙잡고 있었다. 조금씩 몸을 들썩이는 것이 곧 그들도 잠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그들 옆으로 토끼들이 몰려와 풀을 뜯었다. 사슴 떼도 지나갔다.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레빌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걸어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무들은 어디서 본 듯하고, 저 숲도 좀 익숙해 보이고.’
별안간 그는 깜짝 놀라 두 눈을 깜빡이었다. 정다운 그의 집 요툰하임이었다. 그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려지며 주변을 다시금 두리번거렸다. 그랬다. 틀림없이 붉은 성이 위치했던 그 황무지 자리였다. 그런데 성은 사라지고, 자갈과 흙바닥에 잔디와 꽃이 피어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내 알아차렸다.
이곳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마법이 드디어 풀렸다는 것을.
땅에 등을 댄 체 누워있던 이안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카할이 흐느적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잡고 있는 손을 흔들자 수진은 잠꼬대를 하며 눈을 떴다. 그들은 깡충깡충 춤을 추고 있는 레빌을 목격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주위의 움직이는 활기찬 생명의 증거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도 큰 기쁨에 북받쳐 벌떡 일어나서 그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진이 일어나자 엉덩이 부근에 깨져버린 도자기 방울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은 채 지옥에서 무사히 살아 나왔고 이곳에 생명의 부활을 다시 일으켰다는 감동과 환희를 막 나누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언덕 아래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쿵쿵쿵 울리었다. 춤을 멈춘 레빌이 두려운 낯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것 같은데.”
바로 그때였다.
“어이, 레빌!”
누군가가 정답고 우렁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믿기지가 않는 듯 무척이나 흥분된 얼굴을 띠며 언덕 아래로 달려 나갔다. 곧 저 아래로 한 무리의 과보족 거인들이 나타났다. 가장 앞장선 과보는 바로 그가 매일 방문해서 음식을 가져오던 친구 ‘샨샨’이었다. 레빌은 매우 행복한 함성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샨샨이 바닥으로 무릎을 구부려 한쪽 손을 내밀자 그는 잽싸게 몸을 날려 그 위에 앉았다. 그러자 그쪽 팔을 감싼 노란 뱀이 반갑게 혀를 내밀며 구부정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는 예전처럼 샨샨의 어깨 위에 앉아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뒤이어 족장 ‘따따’가 따라왔다. 삼각팬티만 걸친 채 대머리인 그는 돌이었을 때보다 훨씬 더 늠름하고 힘이 세어 보이는 근육질의 용사 그 자체였다. 긴 창을 어깨 위로 걸친 채 힘차게 걸어오다가 아이들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번뜩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맙소. 그대들 덕에 다시 살아났소. 정말 고맙소.”
그가 먼저 악수를 건넸지만 그의 손목을 휘감은 누런 뱀 때문에 그들은 아무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였다. 눈치챈 그가 휘파람을 불자 뱀이 팔을 타고 어깨 위로 쓱 올라가버렸다. 그들은 악수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저 그의 커다란 손가락 끝에 자신들의 손바닥을 갖다 대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그는 카할의 요청대로 그를 자신의 어깨 위에 얹은 채 거인들을 거느리고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할의 손에는 딥언더니아의 성물인 ‘토르의 망치 묠니르’가 들려있었다.
들판에는 색색의 다양한 들꽃이 활짝 피어있고 푸르게 펼쳐진 잔디밭 언덕 위로 이안과 수진만이 남았다. 수진이 무리를 따라가려 몸을 돌리자 이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돌아섰다. 그제야 그녀의 처참한 몰골이 그의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한쪽으로 싹둑 잘린 머리카락하며 잘려나간 드레스, 땀과 눈물로 꾀죄죄해진 얼굴을 보자 그의 가슴 한편이 저리고 뜨끔해졌다. 레이디 포터리의 치마 안에서 무슨 큰일을 당한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물어보기조차 미안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불러다 놓고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를 이상스레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네가 너무 고생한 것 같아서.”
“그걸 인제 알았어? 그러니 나한테 잘하라고. 구박 좀 하지 말고 말이야.”
말을 마친 그녀가 뒤돌아 가려하자 그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운 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전과 달리 잠기었다.
“그때 빅락에서 따라와 줘서 고마워. 절대 잊지 않을 게. 그리고 이번 모험도 항상 기억하고 있을 거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어디 아파? 혹시 그동안 굶주려서 잠시 머리가 이상해졌나? 나 먼저 간다!”
혹시 자신에게 피라도 좀 나눠달라 부탁이라도 할까 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녀는 저 앞으로 냉큼 달려 나갔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그의 얼굴 위로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어두운 그늘이 미소를 내보내고 그의 입가에 잔뜩 어리어졌다.
이젠 정말 때가 되었나 보다. 그래, 그녀에게 옳은 일일 거야.
그런데 그녀가 떠나고 나면 난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