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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Sep 26. 2021

12. 지하무덤과 레이디 포터리 - 3


 카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 포터리의 드레스 치마 속이었지만 마치 깊은 동굴처럼 매우 어둡고 싸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오래 묵은 곰팡이 냄새가 진하게 맡아지자 그는 여러 번 재채기를 해댔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전에 수진에게서 받은 램프반지를 손가락에서 발견하고 수정을 돌리자 빛이 생겨났다.


 황금 카펫이 깔린 계단과 그 위로 펼쳐진 터널 같은 통로가 그의 앞에 비치었다. 통로를 올려다본 그는 갑자기 공포에 휩싸여 하마터면 치마 벽을 뚫고 도망칠 뻔하였다. 그러나 수진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심호흡을 하며 겨우 진정하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자 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반지 낀 손가락을 위로 치켜든 채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종 모양을 이루는 치마 통로의 내부 벽은 바깥처럼 하얀 칠이 되어 있지 않아 검은 진흙이 그대로 드러났고 파란 얼룩이 종종 끼어있었다.


‘도대체 이것들은 다 뭐래?’


 계단의 양쪽 벽에서 그에게 심한 공포를 선사한 그것들이 적나라하게 환영인사를 퍼부었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등의 가공된 큰 보석알들을 사람의 눈구멍, 콧구멍, 입구멍, 귓구멍마다 박아놓은 여러 개의 두상들이 관람자의 눈높이에 맞게 걸리어 먼저 그를 맞이하였다. 피부는 곰팡이가 슬어 퍼렇게 변했지만 썩지 않은 상태였다.

 

 보석이 줄줄이 박힌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몸뚱이가 마치 옷걸이처럼 왼쪽 벽에 딱 걸려 있는데 목 위로는 댕강 잘린 상태였다.


 여자의 벗겨진 머릿가죽에 그대로 붙은 채 풍성하게 자라고 있는 금발 다발이 좀 떨어져서 맞은편 벽에 걸려있었다. 금발은 그의 반지의 빛을 받아 금실처럼 윤이 자르르 나는 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찰랑거렸다.


 긴 목 위로 깨끗이 잘려나가고 허리도 잘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건 여자의 나체 흉상이 걸려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거무죽죽하여 투명한 보석이 대비적으로 아름답게 빛났기에 눈길을 주던 카할의 등골이 순간 서늘해졌다.


 누런 금링에 커다란 사파이어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이 달린 손목 부분이 매끄럽게 잘린 채 위를 향하여 벽에 걸려 있었다.


 핑크빛이 도는 커다란 진주 귀걸이를 단 사람 귀 두 개를 그대로 잘라낸 상태로 흑색 진주, 노란 진주 등 색색 세트마다 다른 귀들이 양쪽 벽에 나비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빈 벽이 이어졌다.


 위를 향하는 카할의 눈이 두 배로 커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흥분하여 단박에 뛰어올라갔다. 파란 얼룩이 진 오른쪽 벽에 그가 그렇게도 찾던, ‘토르의 망치’가 걸려 있었다. 뭉툭한 쇠해머에 짧은 나무 손잡이가 달린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어떤 금망치보다 빛나도록 화려하였다. 딥언더니아를 수호해주는 성물인 ‘묠니르’를 아이런 대장간의 모조품이 아닌 실물로 마주한 순간 그는 너무도 감격하여 현재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잠시 잊어버렸다. 그는 급히 망치에 달라붙어 두 발을 벽에 댄 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손잡이를 감싼 얇은 도자기 끈이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단검으로 마구 찔러댔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한 마법이 걸린 것임에 틀림없었다. 꽥꽥 악을 지르며 망치에 매달려 낑낑 애를 쓰고 있던 그때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자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할이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혹시 수진의 목소리인가? 정신이 번쩍 난 그는 벽에서 내려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치마 통로가 거의 끝나갈 무렵 왼쪽 벽으로 커다란 것이 매달려 있었다.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목과 모아진 발목, 그리고 위로 활짝 벌려진 양팔의 손목을 도자기 끈이 단단하게 고정시키었다. 빨간 핸드백은 정면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그녀의 배꼽 위치에 놓여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가 여태껏 보았던 경우 중에 지금이 가장 아름답고 광채까지 자르르 났다.


“수진, 괜찮아?”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허옇게 뜬 것이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는 발목 부근의 도자기 끈을 단검으로 때려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며 그가 울먹거렸다.


“토르의 망치를 발견했는데 도무지 떼어낼 수가 없어. 이 끈들도 마법이 걸려 있나 봐. 어떡하지?”


 그녀가 아무 반응이 없자 덜컥 겁이 난 그는 그녀의 발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녀가 힘없이 눈을 뜨고 겨우 입을 조아렸다.


“끈들이 점점 조여들고 있어. 숨을 쉬기가 힘들어. 카할, 이안에게..마지막 인사..전해줘.”


“마법을 풀어야 돼, 마법을!”


 유언처럼 들리는 그녀의 절망적인 어조에 그의 뺨으로 물줄기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번뜩 떠지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 생기가 생긴 것 같았다.


“카할, 핸드백에 캉무 열매가 좀 있어. 혹시나 싶어 챙겨 왔어... 그게.. 마법을 풀 수 있을지도...”

 

 다시 눈을 감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핸드백에 매달려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겉보기엔 작고 앙증맞은 크기였지만 그 안은 상당히 넓고 깊었다. 물건이 잔뜩 들어가 있어 이리저리 뒤져야만 했는데 음식을 싼 종이를 지나고, 긴 삼지창과 둘둘 말린 양탄자를 옆으로 제치자 붉은 캉무 열매가 들어간 종이봉투가 나왔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열매를 손목 끈에 바로 갖다 대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그것을 문질러 보고 단도로 찔렀지만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잘못해서 단도 끝이 캉무 열매를 찔렀고 열매의 노란 즙이 끈에 좀 묻었다. 그러자 그것에서 연기가 나며 녹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는 것이다. 카할은 캉무 두서너 개를 입에 넣고 와드득 씹은 후 뱉어내어 다른 손목 끈에 문지르자 그것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녀의 두 손목이 풀려났다. 신이 난 그는 핸드백을 밟고 올라가 그녀의 목을 감싼 끈에 씹은 열매를 갖다 대려던 찰나였다.


“쓱싹쓱싹~ 쓱싹쓱싹~”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위쪽 통로의 막다른 끝에는 바닥에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는데 인형이 누워있던 관 아래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대장간에서 금속을 갈고 있는 듯 시끄럽게 쓱싹거리는 소리는 그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캉무를 여전히 손에 든 채 그의 고개가 대수롭지 않게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그녀의 두 눈이 희미하게 떠졌다.


 그런데 그녀의 눈동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내질러졌다.


“빨리, 빨리 해, 어서!”


 다시 뒤를 돌아본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쪽의 그 구멍 위로 그의 얼굴 두 배만 한, 반달 모양의 칼날이 어느새 둥둥 떠서는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황하여 재빨리 으깨진 캉무를 그녀의 목 끈에다 마구 문질러댔다. 연기가 나고 녹기 시작했다.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앗, 날아온다!”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녀의 목을 향해 가로로 눕혀져 휙 날아왔다. 그는 손에 불이 나도록 열매즙을 끈 전체에다 바르고 마구 문질러댔다. 칼날은 곧 3/4 지점에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 끈이 다 녹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은 극도의 공포로 물들어 이젠 비명조차 나오지 못하였다. 2/4 지점, 1/4 지점, 채 1미터를 못 남겨둔 시점에 드디어 끈이 풀어지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신속히 아래로 끌어내렸다. 칼날은 좀 전에 끈이 있었던 바로 그녀의 목 자리에 정확이 들어박혔다. 그녀는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고정된 발목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카할은 있는 힘을 다하여 질겅질겅 씹던 캉무를 그녀의 발목 끈에다 마구 펴 발랐다.


 그런데 벽에 박힌 칼날이 꿈틀꿈틀 대더니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곧 그녀의 왼팔이 놓여있었던 쪽을 내리쳤다. 수진은 몸을 비틀어 겨우 피했는데 그녀의 머리카락 일부와 치맛자락이 싹둑 잘려나갔다. 하마터면 귀까지 잘릴 뻔하였다. 칼은 후퇴하여 오른팔 자리도 찍어버리고 다시 뒤로 튀어나왔다. 칼이 덮친 자리마다 깊게 파인 자국이 벽에 날카롭게 그어져 있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이제 그녀의 발목 차례라는 것을. 칼날은 잠시 뒤에서 꿈틀대며 숨을 고르더니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씽 소리 내며 날아왔다. 무슨 영문인지 발목을 감싼 끈이 다른 데보다 두 배 이상 두꺼워 녹는데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그녀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느낀 순간, 카할에게 “비켜!”라고 소리치고는 녹아내리는 끈을 양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약해진 끈이 가루로 부서지며 깨져나갔다. 떨어진 그녀와 잡으려던 그는 바닥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뻗어버렸다. 


 반달 칼날이 그들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 벽을 찍고는 멈추었다. 칼날 아래에 깔린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미동이 없자 살금살금 옆으로 기어 나온 그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내려갔다. 다시 한번 쇳소리가 났다. 놀란 그들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벽에 박혔던 칼날은 이미 사라지고 소리는 아까 그 구멍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곧 이내 조용해졌다.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아 안심이 되었지만 걸음을 서둘렀다. 그들은 토르의 망치 앞으로 다가갔다. 카할은 남은 캉무 열매 두 개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뱉어서는 손잡이 부분을 고정한 도자기 끈에 싹 발랐다. 끈이 연기와 함께 사르륵 녹기 시작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아까처럼 위협될 만한 것은 없었기에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었다. 이내 망치가 카할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전에 대장간 박물관에서 보았던 모조품과 정말 똑같아서 놀라웠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그런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살짝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돌려준 후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벽에 매달리기 전까지 정신을 잃었던 그녀였기에 지금 옆으로 지나쳐 보이는 것들은 그녀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레이디 포터리가 자랑하던 주인의 선물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그녀의 입은 차마 다물어지지 못하고 저절로 벌어졌다. 특히 붉은 드레스를 입은 얼굴 없는 시체가 옷걸이처럼 걸린 것을 보자 그녀의 등골로 찬 기운이 스치며 지나갔다. 카할이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목과 두 손목, 발목이 잘린 자신의 몸뚱이가 저렇게 걸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고 앞으로 긴 치마 통로가 이어졌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그녀는 있는 힘껏 벽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그럴 줄 미리 예상이나 한 것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카할은 계단을 다 내려오자 더 이상 통로로 나오지 않고 계단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뒤돌아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막혔어!”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그는 조금의 당혹감이나 두려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여유에 오히려 그녀가 당황하여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뭘 그리 걱정하니? 우리에겐 이것이 있는데.”


 그가 손에 든 것을 위로 치켜들었다. 토르의 망치가 있으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투였다. 의구심이 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난 사실 못 믿겠어.”    


“그럼 이리로 와서 한번 해보자. 해보면 알 거 아니야?”


 그녀는 그의 옆으로 미적거리며 다가갔다. 그는 망치든 손을 앞으로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치 과거의 영웅이자 망치의 주인이었던 토르나 된 것처럼 잔뜩 폼을 잡은 채 힘껏 그것을 내던졌다.


“휘이익~”


 망치가 바람소리를 내며 저 앞으로 휙 날아갔다. 그리고 정면의 도자기 벽을 딱 찍고는 돌아와 다시 그의 손에 들려졌다. 곧이어 벽 주변으로 두꺼운 금들이 쩍쩍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척 놀라워하는 그녀를 향해 카할은 힘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가 레이디의 드레스 치마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우리의 친구 이안과 레빌은 레이디와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술래인 그녀가 이리로 오면 그들은 저리로 도망가고, 그녀가 저리로 가면 그들은 이리로 도망치는 등, 쫓고 쫓기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두꺼비는 그들에게 방해물이 되지 않았다. 되도록 발바닥을 끌고 다녀 그것들을 옆으로 밀거나 정 급할 때에는 그냥 밟아버렸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레이디가 두 팔을 내민 채 그들에게 다가오려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춘 것이다. 그녀는 전원 나간 로봇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안은 그녀 내부의 이상 조짐을 짐작하고 그녀의 얼굴과 치마를 유심히 살피었다. 카할이 해낸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떤 환영이 자신의 눈에 순간적으로 포착된 것이다. 도자기 인형의 하얀 얼굴 위로 금발의 얼굴이 뚜렷이 겹쳐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누구인지 도대체 떠오르지가 않았다. 잘생긴 그의 표정은 몹시 거만하고 위선적으로 보였다. 그는 레빌에게도 보이는지 물어보려 다시 얼굴을 쳐다봤을 땐 이미 그것은 사라진 후였다. 레빌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안은 순간 잘못 본 거려니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환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기억 아주 깊숙한 서랍 속에 저장되어버렸다.


“이것들이 내 몸에.. 내 몸에..”


 레이디가 동작 멈춤을 해지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팔을 위아래로 부산스레 움직였다. 중얼거리는 입으로 검은 연기가 거세게 내뿜어졌다. 이안은 그녀의 내부에서 무슨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확신했다. 레빌에게도 넌지시 그 점을 알렸다.


“펑!”


 폭발음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퍼져나갔다. 마구 날아오는 도자기 파편을 피해 그들은 테이블 밑으로 내려가 몸을 잔뜩 수그렸다. 하얀 가루와 파편이 날리는 가운데 이안은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드레스 앞치마에 굴 같은 검은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망치를 든 카할이 잽싸게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수진도 꾀죄죄한 몰골로 튀어나왔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는 이내 마음이 놓였다. 안도의 한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런, 아직 일렀나 보다. 달리려는 그녀 뒤로 불쑥 레이디 포터리가 나타나더니 성큼 손을 내밀어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확 집어 올렸다. 레이디의 치마에 구멍이 뚫리긴 했지만 전체에 비해 적은 부분이어서 균형 잡고 서 있기에는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만 움직이는 것은 불편한 것 같았다. 거꾸로 들리어진 수진의 두 손이 바닥으로 향한 채 그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악, 놓아주란 말이야. 이 괴물아!”


“이것만 주면 놓아주지, 어서 내놔!”


 레이디가 남은 한 손으로 아래로 쳐진 수진의 핸드백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녀 역시 이제 와서 뺏길 수 없다는 듯 그것의 끈을 죽자살자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악을 내질렀다.


“이건 내 거야! 이 도둑 여인네야!”


“도둑이고 뭐고 맘에 드는 건 다 내 거야!”


“손 안 놔! 죽어도 내 건 못줘!”


 핸드백을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하는 두 여자의 치열한 전쟁의 서막이 마침내 열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레이디 쪽이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향한 수진의 집념도 만만치 않았다. 만약 앞에 도자기 인형이 아니라 불을 내뿜는 지옥 악마가 있었다 해도 그녀는 불에 타 죽을지언정 절대 놓지 않을 기세였다. 이전의 벌벌 떨던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변화된 모습이었다.


“여자에게 핸드백이 저런 존재라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구나. 정말 무섭다, 그지?”


 레빌의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묻자 이안과 카할도 그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잠시 공격을 잊은 채 넋을 잃고 그녀들의 싸움을 구경하였다. 인형은 수진의 머리카락까지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오는 그 유명한 ‘일리아드’의 저자 호메로스가 만약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그가 노래한 전설적인 전쟁씬 중 지금 이 장면이 능히 한 에피소드를 차지하고 남을 처절한 싸움으로 기억되었으리라. 그는 분명 깨달았으리라.


 핸드백을 향한 여자들의 아주 무시무시하고 무덤 속에서도 기어 나올 그 처절한 집념과 목숨을 건 애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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