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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Jan 05. 2017

1. 악의 도래

(브라잇 동맹 1권 딥언더니아 편에 이어 연재됩니다.)


1. 악의 도래


 밤하늘 가운데 떠있는 초승달이 황량한 땅 위를 고요히 비추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나지 않는 땅에서는 생명의 숨결이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유황냄새가 섞인 바람만이 이곳의 주인으로 자청한 듯 휭휭 지나쳐 다닐 뿐이었다.


 돌과 자갈, 화산재로 덮인 그 땅을 쩍 가르는 수직 낭떠러지 밑으로 좁고 깊은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곧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이 깎아지는 절벽과 울퉁불퉁 거칠게 파인 바닥의 모습은 우기 때마다 넘쳐흐르는 급류의 파괴적 흔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무겁게 끈적이는 죽음의 고요가 협곡에 낮게 드리운 가운데,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그곳의 완벽한 조화를 일시에 깨뜨려버렸다. 유일하게 숨을 내쉬는 그는 무생명을 연상시키는 이곳의 불쾌한 풍경과 큰 대조를 이루었다. 달빛이 협곡 사이로 내려왔지만 희미하여 거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미로와 같은 이곳의 지형을 이미 머릿속에 완벽히 저장이라도 해놓은 듯 그는 어둠 속에서 단 한 번의 머뭇거림이나 막힘없이 쓱쓱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협곡이 끝나자 화산이 막 지나간 후 뜨거운 용암이 식어가는 검은 벌판이 나타났다. 아직도 불길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그의 검정 운동화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땅에서 노랗게 품어 나오는 유황 연기와 악마의 블루파이어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마치 아름다운 꽃밭을 거니는 듯 가볍고 경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벌판의 끝에 다다랐다. 사각뿔의 반이 날아간 채 아랫부분만 남은 피라미드가 달빛 아래 흉물스러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폭격과 공격을 받아 떨어져 나간 검게 탄 돌벽 잔해들이 주변 바닥에 어지러이 뒹굴어져 있었다. 벽에는 터진 구멍들이 숭숭 나 있고, 군데군데 시커멓게 탄 자국들이 보기에 흉측하고 징그러웠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챙이 긴 모자를 쓴 그가 피라미드의 아래쪽으로 나 있는, 툭 터진 입구로 들어갔다. 그곳은 마치 힘센 누군가가 바깥에서 억지로 잡아 뜯은 듯이 무지막지하게 뚫려 있었다. 어두운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먼저 그를 맞이하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지하실이 숨겨져 있었다. 지하실은 더러운 악취와 유독 가스로 가득 차 있고 원한 깊은 악령들이 거주하였다. 그는 그곳의 기괴함을 음미하려는 듯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돌바닥이 끝나고 부드러운 흙이 신발 밑으로 느껴지자 그는 약간 긴장한 듯 걸음이 빨라졌다. 아주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우아한 자세로 바위 위로 점프해 올라갔다. 그리고 정확히 그 끝에 멈추어 섰다.


‘여태껏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내가 먼저 너희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달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그곳은 지옥에서 흘러온 고대의 암흑과 공포가 지배하였다. 문득 그 사이로 웅성거림과 으르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모자의 챙을 들어 올려 주위의 존재들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침을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더니 바로 그의 옆에서 끙끙거렸다. 그는 어둠 속으로 손을 내밀어 그것의 정수리를 정확히 만져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짐승은 청동 기구를 서로 문지를 때 나는 소리를 내며 그르렁거렸다. 남자는 살며시 미소를 띤 채 코와 입을 활짝 벌렸다. 그곳에 가득 차 있는 부패한 가스를 들이마시기 위하여, 마치 그것이 향기로운 꽃향기라도 되듯이 말이다.


 한참 뜸을 들이던 그는 카리스마가 담겨있지만 가슴의 울분과 한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소리는 살짝 떨리었고 그의 눈은 금세 촉촉해졌다.


“고생하였도다, 나의 친구이자 동료들이여. 그동안 잊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었구나. 그래, 기다리고 있었어.”


 갑자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섬광들이 성운처럼 움직였다. 흥분된 숨소리와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었다. 바닥이 꽝꽝 울려댔다. 뭔가가 벽을 치는지 철썩철썩 소리도 들리었다. 흙바닥의 쿵쾅거림이 그가 서 있는 바위 끝까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드디어 내가 되갚아 줄 차례가 되었다! 이번엔 절대로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우렁차게 외치며 망토 안에서 흑요석 거울을 꺼내 머리 위로 힘차게 들어 올렸다. 소름 끼치도록 두렵고 커다란 굉음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와 온 실내에 가득 울려 퍼지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거울에서 붉은 빛이 여러 번 번쩍이더니 회색 연기와 함께 내뿜어졌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밝아졌다.


무시무시한 장면이었다.


 바위에 올라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옥에서 올라온 마물과 거인들의 흉측한 얼굴과 몸이 내비쳤고,


 그의 바로 옆으로 머리가 세 개에 살아있는 뱀을 꼬리로 단 지옥의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발광했다.


 바위 밑으로 미할과 아이들이 오두막에서 목격했었던 백골로 이루어진 군사들이 정렬한 채 칼을 들어 올려 허공을 향해 마구 찔러댔고,


 상체는 늑대이고 하체가 인간인 늑대인간들이 목청을 높여 사납게 울부짖었다.


 미노타우르스족이 제자리에서 말발굽으로 바닥이 깨져라 때려대며 두 눈을 부릅뜬 채 괴성을 내질렀고,


 파란색의 거대한 구렁이 파사와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구영이 몸을 이리저리 들썩였다.


 키메라의 입에서 강한 불길이 토해져 나왔고,


 막 무덤을 파고 나온 듯, 흙 묻은 몸의 여기저기가 썩어 들어가는 좀비들이 뼈마디를 꺾으며 절룩거렸다.


 흉측한 오르크족이 침을 질질 흘리며 무기를 든 채 포효했다.      



 악의 군단들은 열광했으나 극렬한 증오와 분노로 들끓었고,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할 환희에 잠기었다.


 드디어 주인님이 자기네 곁으로 돌아왔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오랜 기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돌아와 준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음을 우리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알리는 바이다.     



< 뉴욕의 하이드파크 >

     

 뉴욕의 명소이자 파란 점인 하이드파크. 


 수많은 뉴요커와 관광객이 휴식을 취하러 몰려드는 이곳에도 거의 인적이 드문 비밀스러운 장소가 하나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가려져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그곳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높이의 시계탑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는 하이드파크의 80살 된 최고령 관리인조차 잘은 몰랐지만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점만은 이미 외관상 뚜렷이 증명하고도 남았다. 여기저기 깨지고 허물어져 점점 으스러지는 벽돌의 붉은색은 세월의 때가 잔뜩 끼어 거의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3층에 위치한 깨진 유리판 안의 시계도 멈춰버린 채였다. 


 시계 밑으로 날씬한 여자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크기의 함석 문이 있었는데 밧줄처럼 두꺼운 거미줄과 넝쿨이 대부분을 가려버리고 그나마 노출된 부분도 빨갛게 녹이 슬어 보기에 매우 흉측했다.      


 오후 들어 갑자기 비가 내리었다. 공원을 순찰하던 그 최고령 관리가 웬일인지 시계탑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비 피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근처 시계탑의 함석 문을 발견한 것이다. 문은 안으로 움푹 들어간 탓에 간신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에잇, 오늘 마누라에게 저녁 얻어먹긴 틀렸군.”


 아침에 늙은 아내와 부부싸움을 한 그였다. 혼자 투덜거리며 문 앞에 주저앉았다. 담배를 한 대 꺼내어 물고 제발 아내의 화가 풀리기를, 그래서 맛있는 저녁을 해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를 하늘에 기원해보기도 했다. 곧 비가 그치었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막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톡. 톡.”


 별안간 깜짝 놀란 그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톡. 톡. 톡. 톡...”


 고요한 정적 속에서 소리가 똑똑히 계속해서 들려왔다. 얼른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얼음이 된 것처럼 동작과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온 정신을 소리에 집중해 따라가 보았다.


‘설마.’ 

 

 그가 고개를 들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시계탑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세상에나, 시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뾰족한 시침 분침이 톡톡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갔다. 여기서 일했던 지난 55년 동안 단 한 번도 작동된 적이 없었는데, 분명 망가졌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순간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과 불안한 예감에 그는 도망치려 뒤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안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이 시계탑의 함석 문이 “쾅”소리와 함께 바깥으로 활짝 열리었다. 그리고 차가운 돌풍이 불어 나와 그를 앞으로 쓰러뜨렸다. 엎드린 채 그의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가 뒤로 천천히 돌려졌다. 그의 두 눈이 밤송이처럼 크게 확대되었다. 


“악!”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엉거주춤 일어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쳐버렸다. 그는 무엇을 보았길 레 그렇게나 기겁했을까?


 시계탑의 열려있는 문 안으로 허옇게 탈색되어가는 노란 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벽 중간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붉은 뱀들이 서로 몸을 구부리고 엉키어 어떤 표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딱 두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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