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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Apr 07. 2017

5. 침묵을 지키는 복도

5. 침묵을 지키는 복도


 홀 안으로 붕대 풀린 미라가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진의 몸에 짝 달라붙은 하얀 티셔츠는 엉덩이까지 덮었는데 아래쪽으로 담뱃불로 지진 듯 보이는 구멍들이 여기저기 뚫려있었다. 풀린 하얀 붕대들이 티셔츠에 주렁주렁 매달려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게 여간 눈에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우란과 카할, 해마와 티앤 단까오가 방에서 나왔다. 그들 역시 옷 때문에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일 불쌍해 보이는 사람은 오나시아에서 온 왕허준이었다. 툭 튀어나온 아랫배가 티셔츠의 압박에 시달려 숨쉬기가 쉽지 않자 스스로 그것을 뒷장 중간지점부터 칼로 쭉 찢어버린 것이다. 찢긴 천사이로 불룩한 등살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누가 보고 비웃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듯 살벌한 경고의 눈빛을 마구 쏘아댔다. 그래서인지 감히 웃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그럭저럭 어울리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안이었다. 훤칠한 키에 늘씬하다 보니 이 아방가르드적 티셔츠도 모델 의상 같았던 것이다.


 식탁 주위로 맛있는 냄새가 풍기자 괴상한 의상 때문에 기분이 상한 참가자들의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카할과 우란, 티앤 단까오와 수진은 벌써 의자에 앉아 앞에 있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감상하고 있었다. 해마는 자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소라구이에 시선을 집중했고, 왕허준은 볼록 튀어나온 배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눈으로 능히 먹고도 남을 듯이 그것들을 무섭게 훑어보았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그는 앞에 놓인 바비큐 한 조각을 얼른 집어 먹었다. 그것을 목격한 수진이 앞에 놓인 옥수수떡에 막 손을 대려던 그때였다. 


“안 돼!”


 불쑥 나타난 버핏 위원장의 마법지팡이가 붕 날아와 그녀의 손등을 딱 때리고 달아났다. 


“음식은 6시 정시에 다같이 먹습니다. 먼저 슬쩍 맛보거나 비겁하게 몰래 먹는 것은 딥언더니아에서 수치스러운 불명예에 해당됩니다. 차려진 음식은 어디 하나 건드린 곳 없이 완벽해야 하고 위원장인 제가 허락한 후에야 먹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느끼겠지만, ‘메리슨 폰데 캠프’는 개최국의 문화와 규칙을 매우 중시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딥언더니아 왕국’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식사예절도 꼭 지키도록 합시다.”

 

“하지만 쟤가 먼저 먹기 시작했다고요!”


 억울하다는 표정의 수진이 손가락으로 허준을 가리키며 툴툴거렸지만, 위원장은 모른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직사각형 식탁의 짧은 면에 위치한 상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냅킨을 무릎에 깔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누군가 빠진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젤라가 아직 오지 않았군요. 그녀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버핏의 감시 아래 그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 앞에서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특히 왕자 허준은 생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허기를 참아야 했기에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고 눈앞이 핑핑 돌 정도였다. 그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안젤라 방문을 쏘아보던 중, 드디어 섹시한 검정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였다. 특히 남자들의 눈이 일률적으로 휘둥그레졌는데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오직 버핏 만이 그녀의 아찔한 마법에서 금방 깨어나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우아하게 다가오더니 이안 옆에 앉은 카할에게 비키라고 하자, 그는 순순히 자리를 양보하며 식탁 끝의 우란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녀는 자신 때문인지도 모르고 배고픔과 굶주림에 지쳐 뿔난 헐크처럼 표정이 변한 참가자들에게 우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젤라 카피, 제가 분명히 저녁식사에 단체 티셔츠를 입고 나오라 말했을 텐데요? 그새 잊어버렸나요?”


 위원장의 단호한 톤에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당당한 태도와 대담한 시선으로 그녀가 맞받아쳤다.


“저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도저히 입을 수가 없어요. 누가 만든 것인지 완전 누더기잖아요. 저의 아름다운 몸에 그런 누더기를 걸친다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어요.”


“그래도 규칙은 규칙입니다. 누구는 하고 누구는 안 한다면 그것을 규칙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참가자들은 다 입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잘 몰라서 그렇지 제 눈에는 누더기가 아니라 예술입니다, 예술. 이 옷을 만들기 위해 의상 디자이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지금 당장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오지 않으면 아예 여기를 나가십시오. 참가비는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지만 그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그녀는 옆의 이안을 쓱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술성이 가미된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그녀가 호들갑 떨던 것보다 보기에 꽤 괜찮았다. 이런 이상하고 예술적인 옷조차 이안과 안젤라의 우월한 외모를 꺾지는 못하였다. 수진이 부러운 눈으로 자신도 그녀처럼 키가 크고 늘씬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랬다. 


 모두 모이자 버핏은 직접 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딥언더니아인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의상 디자이너에게 바로 갖다 주시오. 궁금해 미치겠다고 계속 칭얼대더군.”     


 위원장이 포크로 고기를 집어먹기 시작하자 드디어 그렇게나 기다리던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안과 안젤라 앞에는 피가 가득 든, 정밀하게 세공된 은제 맥주 컵 2잔이 각각 놓였다. 수진은 이제 익숙해져서 피를 마시는 장면이 아무렇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좀 어색해하는 듯 보였다. 


 오랜만의 만찬에 신이 난 수진은 이것저것 덜어 먹다가 식탁 끝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고기튀김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쥐튀김이었다. 그녀는 옆의 우란에게 접시에 좀 담아달라고 부탁했고, 우란은 옆의 카할에게 대신 부탁하며 접시를 건넸다. 먹음직스러운 쥐튀김 여러 개가 드디어 수진 앞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뼈와 살이 단단히 붙어있어 포크로 찍어 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저렇게 찍으려 시도하다가 그만 탁 헛찍었다. 튀김이 튕겨 올라가더니 건너편에 앉은 티앤 단까오 어깨너머로 붕 날아가 매끄러운 바닥에 떨어졌다. 안젤라가 그 장면을 보고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수진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안젤라는 이안도 같이 비웃어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저 무표정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우란이 양손으로 쥐튀김을 들더니 시범 삼아 한 입 뜯으며 수진과 다른 이들을 향해 크게 외치는 것이었다.


“딥언더니아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이렇게 두 손으로 먹습니다. 그냥 손으로 편하게 드세요.” 


 그러자 다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음식을 퍼먹기 시작했다. 수진은 그녀에게 감사의 미소를 보내며 손으로 잡고서 편안히 튀김을 뜯었다. 곧 그들의 입 주변은 양념과 크림이 묻어 지저분해졌다. 위원장은 아까 자신이 한 말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먹긴 했지만, 한 입 먹고 냅킨으로 닦고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이안은 우아하게 맥주잔을 들고 시원스레 들이키며 왁자지껄한 식탁을 쳐다보았다. 안젤라는 거지들 소굴에 들어온 듯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수진은 한 조각 남은 체리파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으로 무슨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불빛이 찰랑거렸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머, 어머머.”


 어머나, 천장에 서로 대치하고 있던 두 마리 아나콘다의 몸통들이 꿈틀대었다. 그러더니 단단한 조각상들이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마리의 벌린 입이 상대의 목을 공격하려 하자 상대방 역시 똑같이 맞대응을 하며 공격해왔다. 그들의 몸통에 매달린 불쟁반이 심하게 빙빙 흔들거렸지만 다행히 불씨는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식탁에 둘러앉은 참가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침만 꼴깍 삼킨 채 천장을 주시하였다. 거의 남지 않은 음식 접시 위로 돌가루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날카로운 포크 하나가 한 마리의 몸통을 향해 날아갔다. 허준이 장난삼아 던진 것이었다. 포크는 뱀의 몸통을 맞고 식탁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공격을 받아 잔뜩 성이 오른 뱀이 아래를 노려보더니 허준을 향해 입을 쫙 벌려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다. 겁이 난 그가 식탁에서 벗어나 방으로 도망치려 하자, 그것은 쟁반이 매달린 밧줄에서 스르륵 몸을 빼내어 천장을 잽싸게 미끄러졌다. 그리고 바로 그의 머리 위까지 내려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것의 사나운 이빨들이 그의 머리를 찍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퍼런 번갯불이 날아와 그것의 목을 강타했다. 위원장이 마법지팡이를 쓴 것이었다. 그것은 그를 향해 항의하듯 눈알을 부라리며 씩씩거렸다. 그러나 이내 몸을 돌려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서는 원래 있던 자리에 예전 모습 그대로 굳어졌다. 다시 조각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다만 불쟁반이 다른 뱀의 몸뚱이에 매달려 조명의 위치가 이전과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위원장이 냉큼 허준에게 달려가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소, 왕자?”


 그는 잘못을 나무라지 않았다. 다시 식탁으로 되돌아온 위원장은 식사가 다 끝난 것을 확인하고는 손짓을 했다.


“나를 따라오세요.”      


 그는 참가자 무리와 떨어져 앞장서 나아갔다. 그리고 직사각형 별궁 홀의 짧은 면을 이루는 벽 앞에 섰다. 거기엔 문이 없었다. 그런데 불현듯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모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하는데 갑자기 벽에서 그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수진이 그의 손을 잡자 그녀는 확 이끌려 통과해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 서로의 손을 잡아끌며 어두운 액상 젤리로 이루어진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몸은 전혀 젖지 않았다. 


 그들 앞으로 길게 뻗어 나가는 좁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복도 끝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여러분이 앞으로 이용하게 될 ‘침묵을 지키는 복도’입니다. 대부분의 캠프 일정들이 여기서 진행될 예정이지요.”


 위원장이 소개하며 가리킨 복도의 양쪽 회색 벽에는 나무문들이 도미노처럼 끝없이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방들일까? 그냥 일반 침실일까? 참가자들은 상기된 얼굴로 버핏을 따라 걸으며 재빨리 문들을 지나쳐갔다.  


“여기 있는 문 중에 몇 개를 여러분이 이용할 예정입니다. 매일 아침, 유일하게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알겠지요? 열려있는 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저와 중요한 약속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닫힌 문을 밀거나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지 마세요. 물론 열리지도 않겠지만 열려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마세요. 모두 안전한 곳은 아니랍니다. 위험천만한 방도 꽤 있어 자칫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닫힌 문은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알겠습니까? 대답해보세요. 모두 잘 알아들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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