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참가자들과 버핏 위원장, 스톰펌 왕과 관계자들은 코브라 머리장식이 반으로 갈라지며 열리는 육중한 ‘황금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동맹 안에서도 그렇게나 유명하다는 딥언더니아의 ‘소금궁전’이 그 엄청난 위용을 드러내려는 찰나였다.
문에서 궁전 앞까지 넓은 도로가 나 있는데 그것의 반을 갈라 오른편에는 황금이 깔려있었다. 도로의 양쪽으로 대리석 제단들이 가로수처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들에는 황금을 입힌 두상(頭狀)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저것들은 왕의 사후(死後)에 진짜 머리를 염장해서 황금 옷을 입힌 거랍니다. 조상님들께서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셈이지요. 언젠가 이 머리통도 저기에 얹히겠지요.”
왕이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발언에 참가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감히 그것들을 쳐다보지 못하였다.
소금 암석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벽과 천장은 온갖 반짝이는 보석들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이루며 별자리처럼 박혀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조명이 비치는지 어두침침한 원형광장과 달리 굉장히 밝고 대낮처럼 환했다.
황금길은 오직 왕만이 걸을 수 있단다.
그러나 스톰펌 왕은 소수의 참가자들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발휘하여 특별히 큰 은혜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참가하지 못한 자들이 나중에 알고 부러워서 땅을 치며 후회하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그는 목청을 높여 기쁘게 외쳤다.
“내가 도끼로 목을 후려칠 정도로 기쁘니 참가자 전원이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특혜를 오늘만 허락하는 바입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흥분한 이는 카할이었다. 그는 엉덩이를 덩실덩실 흔들고 춤까지 춰가며 황금길을 걸어갔다. 지금 이 영광이 그의 후손 대대로 전해지리라. 가끔씩 그의 이상한 춤 동작 때문에 뒤에서 걷던 수진과 우란이 까르르 웃으며 넘어갔다.
거대한 소금궁전 앞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그것의 웅장함과 정교함에 넋을 잃은 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수없이 많은 별 모양의 창문과 거기에 끼인 황금 창틀, 궁전의 하얀 벽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조명 빛으로 인해 그 색감이 조금씩 변하는데 지금은 옅은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대문의 양쪽으로 거대한 원기둥이 각각 받치고 있는데, 각 기둥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의 거인이 어깨 위로 궁전의 높은 지붕을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 생생히 조각되어 있었다.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고 있을 두 거인의 굽은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스톰펌 왕이 금도끼로 성을 가리키며 낭랑한 어조로 설명했다.
“딥언더니아의 자랑이자 위대한 유산인 소금궁전입니다. 단단한 소금 암석을 장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파서 건축한 것이지요. 자, 눈깔을 크게 뜨고 잘 보시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예술품인지. 이곳이 다른 곳보다 훨씬 밝은 이유는 위의 천장 어디선가 햇빛이 통과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구멍이 얼마나 작은지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지요. 앞으로 두개골이 수천 번 깨졌다 붙어도 절대 찾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
또한 이곳을 장식한 황금과 보석은 우리 스스로 열심히 광산을 파서 마련한 것이랍니다. 우린 반짝이는 걸 아주 좋아하지요. 타고난 본성이 그렇소. 특히 황금은 끔찍이 사랑하는 애인과 다름없지요. 단 하나 예외라면, 방금 지나왔던 ‘황금의 문’만은 ‘일룸니아 왕국’에서 받은 황금으로 제작한 것이랍니다. 약 3,000년 전,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이 승리하는데 기여한 보상으로 받은 건데 뭐, 우리뿐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서도 다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나의 목을 걸고 단언컨대, 저 문처럼 아름답게 황금을 사용한 나라는 동맹국 중 없을 거외다.”
그 말을 듣자 이안의 머릿속에 문득 일룸니아 궁전 앞에 세워진 ‘승전비’가 떠올랐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승전 원주에는 마왕 블랙수트가 이끄는 다크 동맹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브라잇 동맹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얼음으로 싸늘하게 변해가는 마왕의 머리에 발을 얹고 있는 이안 1세의 당당한 모습은 제일 압권이었다. 고대의 강력한 마법이 걸린 원주의 조각들은 한 달에 한 번, 햇빛을 받는 정오가 되면 스스로 되살아나 원주 표면을 돌아다니며 전쟁을 되풀이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는 지금 이곳의 ‘황금의 문’보다 그 원주가 더 아름답다고 느껴졌지만 더 이상 말을 아꼈다. 괜히 스톰펌 왕의 목을 빼앗아올 필요는 없으니까.
“근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요. 소금 암석이지만 소금이니 혹시 물에 닿으면 녹지 않을까요?”
해마의 질문에 왕이 악어처럼 입을 쫙 벌린 채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너무 웃어서 그의 왕관이 머리에서 떨어질 듯 마구 흔들렸다.
“좋은 질문이군. 그러나 천장에서 비가 새진 않습니다. 이 암석은 물에도 녹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강하지요. 또한 소금이란 본래 소독과 정화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불운한 기운이 깃들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차원이기도 하고. 그런 깊은 뜻이 있었기에 바로 이곳에 선조께서 왕궁을 지으신 겁니다. 세상의 온갖 더럽고 악한 것들이 신성한 이곳만큼은 절대 침략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었는데...그랬었.....그랬었는데....”
갑자기 그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더듬자 버핏이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부 섞인 목소리가 간드러지고 희미하게 떨리었다. 뒤에 있던 실크롱이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의 흔들리는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왕이여, 안심하시옵소서. 이젠 그런 악한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3,000년 전의 전쟁에서 브라잇 동맹이 승리한 후로는요.”
“그건...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누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봤답니까? 악한 것들이 정말로 다 죽었는지 말입니다. 땅속 저 깊은 어둠 속에 몰래 숨어 우리를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요.
위원장, 악은 우리 주위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가슴 깊이 명심하길 바라오.”
버핏은 부르르 떠는 왕이 혹시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 그의 안색을 살피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에 좀 전에 없던 짙은 그늘이 생기고 표정도 매우 어두웠다. 왕이 병이 난 것으로 단정 지은 위원장이 옆의 신하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신하는 왕을 데리고 궁전 안으로 후다닥 들어가 버렸다.
버핏 위원장은 8명의 참가자들을 데리고 궁전 옆에 위치한, 같은 소금 암석으로 지어졌지만 궁전과 비교하여 너무나도 검소해 보이는 ‘푸다크 별궁’으로 다가갔다. 별궁 앞에 검은 석판이 하나 놓여있는데 노란색 페인트로
‘메리슨 폰데 캠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무거운 별궁 문을 지나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나왔다. 한쪽 벽에 처진 커튼을 들추자 지하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직사각형 모양의 넓은 홀이 자리해있었다. 이곳부터는 벽과 바닥이 소금 암석이 아닌 광장의 재질과 같은 짙은 회색 암석으로 바뀌었다. 홀의 길쭉한 양변에는 정사각형 나무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박혀 있었다.
천장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이들은 그만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로 몸뚱이가 얽힌 채 머리가 아래로 내려진 아나콘다 두 마리를 조각한 전신상이 천장 중간에 딱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입을 크게 벌려 서로 대치하고 있는 그것들의 몸뚱이를 감고 내려온 밧줄 끝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씨가 든 쟁반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바로 그 아래로 직사각형 모양의 긴 식탁이 놓여있고 족히 의자는 백 개가 넘어 보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식탁 위로 하얀 먼지 담요가 살포시 덮여있었다.
버핏이 그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이곳은 앞으로 여러분이 머무를 '푸다크 별궁'의 중앙홀입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낼 곳이지요. 우선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꽤 남았으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갖겠습니다. 저쪽의 입구 문부터 시작하여 각자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달린 방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미 명패 마법이 걸려있으니 본인이 아니면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그럼 푹 쉬었다가 저녁식사가 시작되는 6시에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말을 마친 후 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이미 방을 찾아 흩어진 참가자들을 향해 크게 알렸다.
“저녁식사에는 방안에 준비된 캠프용 단체 티셔츠를 입고 나와야 합니다. 앞으로 캠프가 진행되는 동안 입을 총 4벌의 티셔츠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따 봅시다.”
“난 매일 새 옷을 입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틀에 한 번꼴로 갈아입으라는 거야? 지저분하게. 아이 짜증 나, 진짜.”
안젤라가 마구 화를 내자 옆에 서 있는 카할이 득의양양한 태도로 웃으며 말했다.
“난 한 벌로도 족히 한 달은 버틸 수 있는데. 너도 이번 기회에 한 번 해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녀는 못 들은 척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방을 찾아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나머지 참가자들도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제일 처음 방은 티앤 단까오, 두 번째는 왕허준, 세 번째는 안젤라 카피, 네 번째는 우란 미스가, 다섯 번째는 해마, 여섯 번째는 이안 드보르자, 일곱 번째는 카할 캐이브 방이었다. 이안과 카할까지 다 방으로 들어가고 당연히 그다음이라고 생각한 수진은 예상한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런, 명패가 걸려있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하여 문을 앞으로 밀어보았다.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다음, 그다음, 그다음 문으로 다가가 확인해 보았지만 명패는 걸려있지 않았다. 건너편 벽까지 수십 개의 방문들을 다 살펴본 후 처음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방은 없었다. 그녀는 허탈과 실망감에 제자리에 주저앉아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도대체 내 방은 어디에 있는 거야? 왜 내 이름만 쏙 빠졌지?’
힘없이 일어난 그녀는 오던 방향을 되돌려 다시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가려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어느 방문을 노크했다. 이안이 문을 열고 나왔다.
“왜 울어?”
“내 방이 없어, 없다고!”
마음속의 울분과 억울함이 그녀의 목소리를 쩍 갈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깜짝 놀라며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양손을 내밀어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같이 등록을 했는데 왜 없겠어? 아까 네 이름도 불렀잖아?”
그는 그녀가 좀 전에 왔다 갔다 하던 길을 따라 열심히 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아니, 어째 이런 일이. 아마 착오가 있었나 봐. 보다시피 방은 이렇게 많으니까 네 방도 금방 다시 만들어 줄 거야. 우선 내 방에서 좀 쉬고 나중에 위원장에게 말하자.”
그는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옆으로 나란히 서 있던 문들 중 하나가 따라 조심스레 닫혔다.
저녁식사까지 아직 2시간이나 넘게 남아있었다. 수진은 혹시 자신에게 배정된 방이 없으면 어떡하나 걱정에, 방 한가운데 놓인 돌탁자 앞의 쿠션 의자 위로 발을 올려 앉은 채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이안은 만약 방이 없다면 지금 이 방을 주고 자신은 카할과 같이 쓰겠다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선심의 효과는 그녀가 받은 충격을 완화하기에는 미미할 뿐이었다.
그의 방은 깨끗하고 전날 그들이 묵었던 최상급 호텔 객실보다 모든 것이 훨씬 고급이었다. 침대는 아주 크고 푹신했으며 깨끗한 시트와 담요로 덮여있었다. 책상, 탁자와 의자, 소파, 옷장, 화장대, 벽난로까지 한눈에도 꽤나 아늑하였다. 양초가 든 램프들이 벽 곳곳에 걸려있어 방안에 어둠이 깃들진 않았으나 뱀파이어에겐 밝은 게 부담스러웠는지 램프 두 개는 꺼져 있었다.
그는 옷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꼭 쥐며 밖으로 내밀었다. 루비 목걸이였다. 이곳에서 보니 예전보다 더욱 영롱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주변에 품어내는 반짝이는 광채에 다시금 빠져들자 그녀는 불안과 걱정이 점점 사라짐을 느꼈다. 그는 루비를 침대 담요로 살살 문지르며 닦더니 다시 옷 속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묵묵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가 주었는지 물어봐도 돼?”
예전에 그가 보인 반응을 떠올리며 그녀는 질문을 해놓고 그의 눈치를 살피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전혀 짜증이 안 묻어난 솔직한 태도로 그가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가 준거야. 나에겐 유품과도 같은 거지.”
“아, 그랬구나.”
그가 왜 그리 예민하게 굴었었는지 그녀는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어느 날 새벽에 아버지가 갑자기 날 깨우더니 이것을 목에 걸어주셨어. 그러면서 절대 아무에게도 이것에 대해 말하거나 보여주지 말라고 명하셨어. 본인도 그 기원은 잘 모르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일룸니아의 왕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물건이래.”
“그럼 다른 이는 그것의 존재를 모른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물론, 난 허술하게 관리해서 너와 거북영감에게 이미 들켰지만. 저기, 이거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우리 사이의 비밀이니까. 약속 꼭 지켜줄 거지?”
“응.”
수진은 손가락으로 입술 지퍼를 쫙 닫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두 번째 노크가 들리자 이안은 카할인가 싶어 문을 열었다. 안젤라 카피였다. 그녀는 아까 입었던 하늘색 원피스에서 가슴이 확 파인 빨간 이브닝드레스로 바꿔 입고는 유혹하는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의 당황한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그녀는 그의 동의 없이 불쑥 안으로 쳐들어왔다.
“심심해서 놀러 왔어. 우리 뱀파이어들은 피곤을 안타잖니. 너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그녀는 활발히 떠들다가 의자에 앉아있는 수진을 발견하곤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더니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머, 너도... 있었네. 둘이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어, 그게...”
노여움이 한껏 묻어난 안젤라의 목소리에 수진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녀는 이안을 힐끗 쳐다보며 SOS를 보냈지만 그는 괜스레 헛기침만 내뱉을 뿐이었다. 두 여자의 예상치 못한 신경전에 어색해진 그였다. 그러나 그녀의 무시무시하게 째리는 눈초리에 결국 그는 마지못해 안젤라에게 상황을 이해시켜야 했다.
“수진의 방이 없어서 말이야. 아마 뭔가 착오가 생겨서 그런 것 같은데. 저녁식사 전까지 내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어.”
“아니, 방이 없다니. 아마도 네가 여기 있는 것을 원치 않나 보다. 이왕 나도 왔으니 우리 셋이서 재밌게 놀아볼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안젤라는 이안의 침대 위에 바로 걸터앉았다. 그보다 약간 작은 키였지만 늘씬한 몸매는 앉아서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몸에 딱 달라붙은 이브닝드레스 밑으로 아랫배조차 튀어나오지 않고 완전 평평했다. 지금 이 표현을 여성이라면 십분 이해하리라. 게다가 더 질투나게 하려는지 옆으로 쫙 찢어진 드레스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긴 다리는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완벽했다.
수진은 그녀의 몸매를 훑어본 후 자신의 두리뭉실한 그것과 비교해보았다. 안젤라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자신만만한 미소로 되돌아온 안젤라는 유혹하는 눈빛으로 이안을 간절히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계속 문 옆에 그렇게 서 있을래? 어서 내 옆으로 와 앉아.”
그녀의 말에 그는 어쩔 줄 모른 채 겨우 문을 닫긴 했으나 침대로 가지 않고 수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들은 한참 동안 조용히 있었다. 이내 너무 불편해서 질식할 것만 같아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젤라, 아까 위원장이 단체 티셔츠 입고 나오라 하지 않았니?”
그녀의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더니 수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가 미쳤니? 그런 붕대 쪼가리를 입게. 그걸 입으라고 다시 요구한다면 난 이곳을 박차고 나가겠다고 당당히 말할 거야. 그것은 내 미모를 엄청 깎아 먹으니까.”
“넌 붕대 쪼가리를 입어도 괜찮을 거야.”
이안의 약간 수줍어하는 말투에 그녀의 노한 얼굴은 금세 누그러졌다. 이어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마저 수진에게 말하던 때와는 완전 딴판인, 애교 그 자체였다.
“정말? 넌 내가 예쁘다고 보는 거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서 가서 갈아입어야지. 그럼 좀 있다 봐.”
그녀는 혼자 흥분해서 냉큼 일어나더니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로 나가지 않고 살짝 뒤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진을 지긋이 쳐다보는 게 아닌가? 둘의 눈동자가 딱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으로 안젤라의 섬뜩한 경고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는 내 거야. 건드리면 가만 안 둬.’
6시까지 40분이나 남은 시각이었지만 이미 문밖에서는 가구가 끌리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의자에서 잠이 들었던 수진은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깨어났다. 이안이 그녀의 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좀 이르지만 밖에 나가보자고 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 쟁반 아래 위치한 식탁 위로 어느새 하얀 식탁보가 깔리고 파란 꽃봉오리가 담긴 아름다운 화병들이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딥언더니아인들이 부지런히 음식 접시들을 날라와 그 위에 차려내고 있었다. 수진은 가까이 다가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을 눈으로 감상하였다.
때마침 버핏 위원장이 홀에 나타났다. 이안이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알렸다.
“저기요, 수진 방이 없어요.”
“뭐라고요?”
“저의 이름이 적힌 방이 없다고요.”
그들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매우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은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럴 리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문패가 없다니, 정말입니까?”
당황한 위원장이 그녀와 그가 아까 몇 번이나 돌았었던 원을 따라 빙빙 돌았다. 너무나도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그는 홀연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허둥지둥 홀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긴 종이가 들려있었는데, 거기에는 각 참가자의 방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며 빠르게 훑어보다가 카할 다음 방 앞에서 멈칫 서 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분명 서류에는 이 방인데 왜 문패가 없을까?”
위원장은 서류 종이 아래에 끈으로 매달린 검은 조약돌을 들고 문을 세 번 노크했다.
"똑똑똑."
그러자 아까 수진이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던 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이 아닌가? 그가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뒷바닥에서 뭔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문패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 올려 이리저리 살펴본 후 직접 문 앞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정중히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군요. 아마 청소부가 청소를 하다 실수했나 봅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자, 어서 들어가서 단체 티셔츠로 바꿔 입고 나오세요. 의상제작자에게 직접 들었는데 자신의 예술성을 불태워 만들었다고 자랑이 대단하더군요. 여러분의 입은 모습을 빨리 그에게 보이고 싶습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이안은 안심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대 옆에 던져놓았던 단체 티셔츠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우 타이트해서 입기조차 쉽지 않았다. 무슨 갑옷을 껴입는 것 같이 갑갑하게 쪼여댔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방금 전의 일이 계속 그의 주의를 붙들고 있었다.
‘왜 하필 그녀의 문패만 떨어져 있던 걸까? 위원장의 추측대로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건일까?’
다 갈아입자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화장대 앞에 섰다. 그는 허겁하여 그만 분노의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세상에, 이게 옷이야, 걸레야?”